1898년 11월 4일 박정양 내각은 독립협회에 공문을 보내어 5일까지 25명의 중추원 의관을 선출하여 명단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독립협회는 11월 5일에 독립관에서 중추원 민선의관 선거를 실시한다고 공고하였다.그런데 11월 4일 밤에 ‘익명서(匿名書)’가 서울 광화문과 시내 곳곳에 게시되었다. ‘익명서’에는 ‘독립협회의 의회설립 목적은 황제를 몰아낸 후, 대통령 박정양 · 부통령 윤치호 · 내부대신 이상재 등을 내세워 공화제 국가를 만들려는 것’이라고 적혀있었다. 이는 의정부 찬정 조병식, 군부대신 서리 유기환, 법부협판
1498년 7월 18일에 이원이 공초하였다.“신은 일찍이 김종직에게 수업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김종직이 동지성균(同知成均)으로 있을 적에 신이 생원(生員)으로 성균관에 머물면서, 목은(牧隱)의 관어대부(觀魚臺賦)를 차운하여 김종직의 과차(科次)로 나아가니 김종직이 저를 칭찬하였습니다. ”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8일 3번째 기사)이원이 차운했다는 목은의 ‘관어대부’는 목은 이색(1328∽1396) 지은 부(賦)이다. 이 부는 에 ‘관어대소부(觀魚臺小賦)’란 제목으로 실려있다. 그런데 김종직도 관어대부(觀魚臺
1898년 10월 30일 의정부 참정 박정양은 29일에 열린 관민공동회에서채택된 헌의 6조를 고종에게 보고했다. (고종실록 1898년 10월 30일 2번째 기사)“이달 29일에 백성들이 종로 거리에 크게 모여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라 일컬으며 나라의 폐단과 백성들의 고통에 대해 의논하여 제거할 것이 있다고 하면서 의정부의 여러 신하들이 함께 모임에 참가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관리와 백성의 협상이 비록 처음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백성들이 이미 나라의 폐단과 백성들의 고통에 대해 의논하여 제거할 것이 있다고 말
고종의 집회 금지 명령에도 아랑곳 않고 독립협회는 철야농성을 계속했다. 그런데 상황은 독립협회에 점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1898년 10월 23일에 고종은 의정부 찬정 박정양을 참정(參政 총리)으로 승진시키고, 중추원 의장에 한규설, 부의장에 윤치호를 임명하였다.(고종실록 1898년 10월 23일 6번째 기사)아울러 고종은 중추원 관제를 중추원 의장·부의장과 협의해서 개정하라는 조칙을 내렸다.이에 독립협회는 이상재 등이 마련한 중추원 개정안을 정부에 제출했는데, 이 안에는 의관 50명 가운데 관선과 민선을 25명씩으로 하고 민선
1498년 7월 18일에 이주(李胄)가 공초하였다."신이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설재(設齋)가 편안하지 아니하다는 것을 논하여 서계(書啓)하기를, ‘성종은 나의 임금(吾君)이온데, 신이 멀지 않아 죽으면 무슨 면목으로 성종을 지하에서 뵈오리까. 바라옵건대 신을 파직하시고 신의 죄를 다스려서 신으로 하여금 성종을 지하에서 뵐 적에 할 말이 있게 해 주시오면 이는 전하의 은사이옵니다.’ 하였습니다.이른바 ‘성종은 나의 임금이다.’라고 한 것은 옛날에도 역시 ‘나의 임금[吾君]’이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오며, ‘할 말이 있다’고
1898년 10월 17일에 고종은 3년간 귀양 보낸 조병식을 의정부 찬정 (贊政)에 임용했다. 독립협회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10월 20일에 고종은 토론은 정치문제 이외에만 허용하고, 집회는 한 장소에서만 하도록 k하고 이차집회(離次集會: 장소를 옮겨서 집회를 여는 것)를 금지하는 조칙을 내렸다.“무릇 협회라는 이름 아래 제멋대로 쫓아다니면서 치안을 방해하는 자는 엄격히 금지시키도록 하라.” (고종실록 1898년 10월 20일 1번째 기사)10월 21일에 고종은 독립협회의 규탄을 받고 물러난 윤용선을 의정부 의정(議政)에 제수하였
1893년 3월 19일에 충청감사 조병식(1823~1907)을 파직한 고종은 선무사 어윤중을 충청도로 보냈다. 4월 1일에 어윤중은 보은군수와 함께 동학교도에게 임금의 윤음을 읽으면서 해산을 명하였다. 아울러 어윤중은 탐학한 관리들을 엄히 처벌하겠다고 약속했다.이에 동학 지도부는 어윤중의 말을 믿고 해산하였다.1893년 11월 7일에 어윤중은 탐오한 죄인 조병식의 처벌을 아뢰었다.“양호(兩湖 호남과 호서) 선무사(宣撫使) 어윤중의 장계(狀啓)에, ‘전 충청 감사 조병식의 탐오하고 포악한 정절(情節)에 대하여 조사하고 성책(成冊)하여
1498년 7월18일, 김일손에 대한 국문은 7일째로 접어들었다. 이 날 유자광은 김종직의 시를 읽은 조위등 6명을 국문하기를 청했다.김종직의 문집에 사가독서(賜假讀書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한 조위 등에게 보냈다는 시(詩)가 있었다. 이 시에는 ‘육군(六君)의 성명이 이미 영(瀛 :홍문관)에 올랐구려[六君名姓己登瀛]’라는 구절이 있었다. 이때 사가독서한 자가 무릇 6인이었기 때문이다.그런데 유자광은 이 시 구절은 ‘필히 동한(東漢)의 당인(黨人)들이 삼군(三君)이라고 한 말과 같은 것’이라
1893년 3월 25일, 고종은 삼정승과 보은 집회 관련 회의를 계속했다.고종 : "지금 오랫동안 태평하여 군사를 양성하지 않고 있다. 지금 들으니 군사가 없다고 한다. 그런가?"우의정 정범조 : "단지 노비들과 사령(使令)들만 있을 뿐이니, 허술하기 짝이 없습니다."고종 : "장차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영의정 심순택 : "어윤중이 도어사(都御史)로 명을 받고 내려갔는데, 잘 타일러서 해결된다면 된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어찌 처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좌의정 조병세 : "처단은 회유한 다음의 일입니다."정범조 : "
1893년 3월 중순에 2만 명의 동학교도들은 충청도 보은에서 모여 척왜양(斥倭洋)과 부패한 수령의 척결을 외쳤다. 이러자 조정에선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3월 19일에 고종은 조병식을 충청도 관찰사에서 파직하고, 후임으로 조병호를 발령냈다. 이어서 고종은 선무사로 어윤중을 파견하였다.3월 25일에 고종은 삼정승과 보은 집회 관련 대책 회의를 하였다.영의정 심순택 : "연이어 올라오는 전라도와 충청도 감사의 보고와, 충청감사 조병식과 병사 이용복의 장계를 보니 허망한 무리들이 날로 더욱 무리를 불러 모아 전라도와 충청도에 깃발을 세우
1498년 7월 17일에 “김종직의 제자를 모조리 추핵(推覈)하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말한 연산군은 대신들이 우려를 표명하자, "김종직의 제자를 끝까지 추궁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내가 그 사람됨을 알고자 하니, 모조리 써서 아뢰라."고 전교하였다.이에 윤필상 등이 아뢰었다."김종직의 제자는 이미 김일손의 사초에 모두 기록되어 일찍이 대내(大內 내전)로 들어갔습니다."이러자 연산군이 전교하였다."그 사초에 기록된 김종직의 제자 신종호 등 약간 명도 모두 김일손처럼 수업을 하였느냐, 그렇지 않는 자도 있느냐? 또 김일손의 말에 ‘나
1898년 10월 12일에 독립협회는 고종 미수 암살사건인 김홍륙독다(커피)사건으로 촉발된 노륙법과 연좌법 부활 기도를 저지시켰다. 심순택, 신기선 등 친러 수구파 일곱 대신이 파면되었고, 의정부 찬정(贊政) 박정양이 의정부 의정 서리로, 민영환이 군부 대신으로 임용되었다. (고종실록 1898년 10월 12일 2번째 기사)12일 저녁에 독립협회 회원들과 시민들은 만세를 부르면서 해산했다.각국의 외교관들은 대한제국에서 민중운동에 의해 개혁 정부가 수립된 사실에 놀랐다.주한미국공사 알렌은 ‘하나의 평화적 혁명(a Peaceful Rev
1498년(연산군 4년) 7월 17일에 윤필상 등은 김종직(1431∽1492)이 지은 「도연명(365∽427)의 술주(述酒)시에 화답하다〔和陶淵明述酒〕」란 시에 관해 아뢰었다.“김종직의 시는 조의제문보다 더 심한 점이 있어서 차마 말을 못하겠습니다.”윤필상 등은 시권(詩卷)을 올린 뒤 서문의 뜻을 해석하였다."그 ‘이는 영릉(零陵)을 애도하는 시다.’라고 한 것은, 영릉을 노산(魯山)에 비한 것이요, 그 ‘유유의 찬시(纂弑)의 죄’라 함은 유유를 세조에게 비한 것이요, 그 ‘《춘추》의 일필에 비교한다.’함은 맹자(孟子)가 ‘《춘추》
김종직의 「화도연명술주시」의 네째 단락을 살펴보자. 넷째 단락은 6구이다.사령(四靈)이 응했다고 핑계를 대어 諉以四靈應태산에 봉선하고 분음에 제사했네. 宗岱且祠汾거짓 천명을 만들 수는 있으나 僞命雖能造세상의 혼란 의당 분분하였네. 世亂當紛紛천리란 본디 순환하길 좋아하기에 好還理則然소가 마침내 천친을 멸하였도다. 劭也蔑天親그러면 한 구씩 살펴보자사령이 응했다고 핑계를 대어, 諉以四靈應태산에 봉선하고 분음에 제사했네. 宗岱且祠汾사령은 네 가지 신령스런 동물인 기린(麟)·봉황새(鳳) ·거북(龜)·용(龍)을 말하는데, 사령이 나타나는 것은
김종직의 「화도연명술주」시의 셋째 단락을 살펴보자. 셋째 단락은 8구이다.네 올빼미가 무슨 공이 있으랴 四梟者何功하늘의 보답을 참으로 자상했도다 天報諒殷懃온화하였던 안제와 공제는 婉婉安與恭바로 이 유씨들의 임금이었는데 乃是劉氏君푸른 하늘을 속을 수 있다고 여겨 蒼天謂可欺높이 요순의 훈풍을 끌어댔으나 高把堯舜薰선위를 받는게 끝내는 역적이였네 受禪卒反賊사씨는 글을 교묘하게 꾸몄다네. 史氏巧其文그러면 한 구절씩 살펴보자.네 올빼미가 무슨 공이 있으랴 四梟者何功하늘의 보답은 참으로 자상했도다 天報諒殷懃올빼미는 어미 새를 잡아먹는다 하여 패
1898년 10월 11일에 독립협회는 경운궁 앞에서 농성을 계속했다. 종로 시전 상인들도 모두 철시하고 농성에 가담하였다. 농성 중인 윤치호는 상소하여 심순택, 신기선, 민영기 등 일곱 대신의 파면을 거듭 촉구했다.“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견고해야 나라가 편안한 법입니다. 그런데 근본이 견고하지 못하며 나라가 편안하지 못하게 된 것은 첫째도 일곱 신하들의 죄이고 둘째도 일곱 신하들의 죄입니다.폐하께서는 어째서 보잘것없는 일곱 신하들은 아끼면서 삼천리의 큰 영토와 2,000만 백성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까?... 저
10월 10일에 독립협회의 윤치호 등은 경운궁 앞에서 농성을 계속하면서 신기선, 이재순 · 민영기 등 일곱 대신의 파면 운동을 전개하였다.이 날 반역음모죄인 김홍륙·공홍식·김종화 등은 모두 교수형(絞首刑)에, 김영기·엄순석·김연흥·김흥길·강흥근·김재택·조한규·김재순 등은 태형(笞刑) 50대에, 김홍륙의 아내 김소사는 태형 100대에 유배 3년에 처해졌다. (고종실록 1898년 10월 10일 1번째 기사)그런데 고종은 법부대신 신기선과 판사 이인우를 파면시켰다.“조령(詔令)을 내렸다.‘지난번에 법부대신에 대해서 감봉(減俸) 처분을 내
김종직의 「화도연명술주시」는 다섯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6구, 8구, 8구, 6구, 2구로 이루어졌다. 시는 중국의 역사와 고사(故事)가 많고 우의(寓意) 또한 상당하여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첫째 단락 6구가 서사(序詞)라면 둘째 단락부터는 본사(本詞)에 해당한다. 우선 두 번째 단락 8구를 읽어보자.당시에 사마씨는 남으로 건너갔으니 當時馬南渡중원에는 무덤만 남았을 뿐이었네 神州餘丘墳천심은 아직 떠나지 않았기에 天心尙未厭마치 새벽이 두 번 온 듯했는데 有若日再晨처중이 맨처음 난을 일으키었고 處仲首作孼 원주) 왕돈(王敦)이다
1898년 9월 25일에 독립협회는 반역사건을 규탄하고 사건의 철저한 조사를 촉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죄인에 대한 고문과 이미 폐지된 노륙법과 연좌법의 부활 반대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9월 26일에 독립협회는 법부대신 겸 중추원 의장 신기선에게 공한을 보내 의장과 서명한 의관의 사직을 요구하였다. 9월 27일에 신기선은 갑오개혁 이후 역적을 다루는 데 교수형만 적용시키니 역변(逆變)이 그치지 않아 노륙법을 부활시키지 않을 수 없고, 또 대신의 진퇴는 협회가 말할 바가 못 된다고 답신하였다.10월 2일에 독립협회는 중추원 앞에서
김홍륙 독다사건(毒茶事件)이 일어난 지 1주일이 지난 1898년 9월 18일에 현학표 등은 역적을 엄중히 다스리도록 연좌(連坐)와 노륙(孥戮)법을 부활하라고 상소하였다. 9월 19일에 장례원 주사 황의철도 역적들을 거리에서 공개 처형하라고 상소했다.이러자 고종은 "새로 정한 법률을 고치고 옛날의 법률을 따르자는 말을 어쩌면 그리도 쉽게 하는가?”라고 비답하였다.연좌제(緣坐制)는 죄인뿐만 아니라 그 아내와 아들 그리고 친족까지도 연대적으로 처벌하는 제도이고, 노륙법은 죄인의 아내와 아들도 참형을 적용시키는 법으로 이 법들은 이미 갑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