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7월 15일, 안종덕의 상소는 공정에 이른다. “지금 폐하는 공정한 것을 좋아하나 조정에는 사리사욕이 넘쳐나고, 관리들 간에는 당(黨)이 갈라졌으며, 벼슬을 얻어 나가려는 자들은 대궐 안의 비호 세력과 결탁하고, 세력에 끼려는 자들은 외세에 의지합니다. 재주도 없이 턱없는 과분한 벼슬을 지내는 것은 모두 세도 있는 집안의 인척들이고, 죄를 지고도 요행수로 면하는 것은 모두 권세 있는 가문의 청탁 결과입니다. 임용해야 할 벼슬자리가 있으면 비천한 자들을 사대부들보다 먼저 앉히며, 이익을 얻을 수 있으면 도적보다 더 심하게
고종이 염근공신을 칙유한 지 두 달 정도 된 1904년 7월 15일에 중추원 의관(議官) 안종덕이 ‘조정이 청렴, 근면, 공정하지도 않고 신의도 없음’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 "5월 21일에 내린 칙서(勅書)를 삼가 보니, 빛나는 586자의 말은 간곡하기 그지없고 엄정하면서도 측은하게 여긴 것이었는데, 자신을 반성하고 자책하며 신하들을 신칙(申飭)한 내용은 마치 해와 달처럼 밝고 쇠나 돌처럼 확고한 것이었습니다. ...대체로 청렴이라는 것은 의리와 예의의 틀이고, 근면이라는 것은 지식과 행동의 용기입니다. 공정이라는 것은 어진
[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숙자 문학박사] 함께 공부하는 도반들과 먼 거리의 스승님을 만나기 위해 더위를 밀치고 길을 나섰다. 대학원을 마치고 각자의 지역과 자리에서 활동 중이라 만나기가 쉽지 않아 꽤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다. 여전히 열정이 가득했고 아직도 배움에 목말라 있었다. 논문을 지도하시고 우리의 배움을 확장시킨 교수님을 중심으로 몇몇이 아직도 그 연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배움이라는 하나의 목적으로 만나 서로를 배려하고 염려하는 마음이 진솔하게 와 닿는다.반가운 얼굴들과 양평에 있는 용문사 절을 방문하였다. 늦은 오후라 사람
1904년 2월에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예상을 뒤엎고 일본은 러시아를 이기고 있었다. 5월 21일에 고종은 관리들과 백성들에게 칙유(勅諭)하였다. "짐(朕)이 생각하건대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는 백성들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다. 관청을 세우고 직무를 나누며, 어진 사람을 선발하고 유능한 사람을 임용하는 것은 오직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 온 나라의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있게 하는 도리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청렴과 근면, 공정과 신의에 있을 뿐이다. 청렴하게 백성들을 다스리면 백성들이 재산을 산처럼
1904년 2월 8일 밤, 일본 해군은 중국 여순항에 있는 러시아의 극동 함대를 기습공격했다. 2월 9일에는 제물포에 정박한 러시아 전함 두 척을 침몰시켰다. 이 날 일본군은 인천을 통해 서울에 들어왔다. 한양 도성 사람들은 도망치고 구중궁궐도 텅 비었으며 조정 대신들도 숨기에 바빴다.2월 10일에 일본은 러시아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했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는 고종을 위협하여 2월 23일에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다. 체결과정을 살펴보자. 1903년 10월부터 하야시는 이를 추진했다. 하야시는 정부 고관들의 협조
서울시 광화문 교보빌딩 앞 도로변 모서리에 있는 비각을 찬찬히 보았다. 비각에는 ‘기념비전’ 현판이 붙어 있고, ‘기념비전’ 현판 글씨 오른편 위에는 ‘헌필(獻筆)’, 왼편에는 ‘광무 6년 임인 9월’이라고 적혀 있다. 광무 6년이면 1902년이다. 비각 정면에는 ‘만세문’이 있고, 그 양옆에는 해치상이다. 비각 오른편에는 ‘서울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高宗 御極 四十年 稱慶紀念碑)’라고 적힌 안내판이 있다.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는 1903년 9월 2일에 세워졌다. 비석 앞면의 전액(篆額)은 황태자 순종의 글씨로 ‘大
1903년 1월의 군함 양무호 구매는 국방비리, 국제 사기 사건이었다. 일본 미쓰이 물산이 구입한 25만 엔보다 두 배나 비싼 55만 엔(지금 시세로 약 440억원)에 샀는데, 이는 국가 예산의 10.2%, 군부 예산의 26.7%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그런데 너무나 어이없는 것은 해군 병사 1명도 없이 군함부터 샀다는 사실이다. 그 단서가 1903년 7월 29일의 ‘고종실록’에 나온다. 이날 군부대신 윤웅렬이 사직 상소를 냈다. 7월 17일에 임명된 지 12일 만이었다. "신이 사직을 청하는 마당에 군무(軍務)에 대해 함부로 논해
[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숙자 문학박사] 세상을 온통 회색빛으로 감추더니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열기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장마 후에 나타난 우리의 주인공 여름은 더욱 그 기세를 펼치고 있다. 며칠째 운동을 하고 있던 나는 이 여름에게 호되게 당하고 있다. 흔히 말하는 더위를 먹은 것 같다. 여름의 열기에 아직은 자신이 있었던 것이고, 약속된 날에 운동이라 남에게 피해를 적어도 주기 싫어하는 나의 성격이 요인이었던 것 같다. 물을 마셔도 또 목이 마르고 물을 찾게 된다. 평소보다 일찍 짐을 챙겨 집에 들
1903년 4월15일, 제물포에 대한제국 최초의 군함이 입항했다. 군함은 입항 전부터 관심이었다. 2월 9일에 '황성신문'은 특종 기사를 실었다. “소문을 들은즉, 정부가 일본인과 계약하고 군함 한 척을 구입한다는데, 그 가격은 50여 만원이라 하고 신품 여부와 톤수는 아직 모른다더라.” 군함은 이미 1903년 1월 25일에 군부대신 신기선이 일본 미쓰이물산과 군함 도입계약을 완료한 상태였다.3월 18일에 황성신문은 “황제 폐하가 군함을 '양무(揚武)'라고 명명했다. 배 이름은 카치다테마루(勝立丸), 총톤수 3435t에 263마력짜
1902년 가을에 콜레라가 전국에 퍼졌다. 원산에서 윤치호는 1902년 9월 1일과 7일 일기에서 이렇게 적었다.“9월 1일(음력 7월 29일) 월요일, 흐림.중국 북부지방에서 일어난 의화단 사건이 남긴 유산 중 하나는 콜레라다. 콜레라는 의주를 통해 조선으로 침투하였다. 진남포는 콜레라에 감염된 것 같다. 그것도 심하게 말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콜레라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고 한다. 원산은 큰 위험지역이다. 사람들은 콜레라를 두려워하는 것 같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장 간단한 위생 규칙을 준수하게 만드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1902년 5월 27일에 고종은 함녕전에서 기로소 당상(耆老所 堂上)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고종실록 1902년 5월 27일 1번째 기사)참석자는 황태자와 영왕, 의정 심순택, 특진관 조병세, 영돈녕 원사 윤용선, 기로소 당상 조병식·이순익·서상우·이용원 등이었다. 연회에는 술과 과일, 음식 등이 나왔고, 악공들이 연주하고 무동(舞童)들이 춤을 추었다. 이어서 고종은 기로소에서 연회를 베풀 것을 명했다. "기로소의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나머지 음식을 가지고 가서 기로소에서 연회를 벌이게 하라." (고종실록 1902년 5월 27
1902년 4월 2일에 황태자가 상소하여 기로소(耆老所)에 들 것을 청했다. "우리 왕조의 기사(耆社)의 예법은 또 경사스러운 의식 중에서도 성대한 것입니다. 이 예법은 우리 왕조 초기에 처음 생겼는데 숙종과 영조 두 훌륭한 임금이 그것을 계승하였는데 이것도 보기 드문 일입니다. (중략) 올해는 바로 폐하께서 51세가 되는 경사로운 해로서 이 해에 영조가 이미 시행한 규례를 그대로 시행하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떳떳한 법이며 국조(國朝)의 전고(典故)에도 근거할 만한 의식 절차가 있으므로 소자의 청을 기다릴 것도 없는 것입니다. (
1901년 12월 25일에 황태자가 정청(庭請)하여 세 번째로 아뢰었다."신자(臣子)의 간절한 마음은 마음속에서 나온 것이어서 윤허 받지 않고서는 그만둘 수 없습니다. (중략) 바라건대 여러 사람들의 청을 특별히 허락하고 예원(禮院)으로 하여금 예법대로 거행하게 한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이러자 고종이 비답하였다. “추위를 무릅쓰고 간절히 청하는 효성도 생각지 않을 수 없으니 존호(尊號)를 올리는 일에 대해서는 마지못해 따른다. 그러나 연회에 대하여 말하면 지금 백성들이 처한 처지에서 헤아리면 짐의 마음이 어찌 편안하겠는가? 내년
1901년 (고종 38년) 12월 11일에 황태자(나중에 순종)가 상소하여 동짓날에 축하문을 올리겠다고 청했다. "내년은 바로 우리 부황 폐하(1852∽1919 재위:1863-1907)의 나이가 51세가 되고 왕위에 오른 지 40년이 되는 경사스러운 해입니다.(중략) 소자가 동짓날에 모든 관리들을 거느리고 축하를 올리도록 허락함으로써 하찮은 성의나마 조금이라도 펼 수 있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이에 고종은 특별히 윤허하였다. "너의 상소를 보고 너의 간절한 마음을 잘 알았다. 대체로 경사(慶事)라고 하는 것은 길(吉)한 일로서,
[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숙자 문학박사] 나의 삶은 늘 태풍을 닮아 있었다. 언제나 거센 바람과 휘몰아치는 파도가 있었고 그 후에 부서진 것들이나 사라져버린 것들은 모두 나의 탓이었다. 나는 태풍을 원했던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나의 탓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으로 인해 나는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다. 내가 관여하지 않아도 모든 일들이 언제나 내 잘못이었다. 나를 비난하고 질책하는 사람의 생각이나 말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용기조차 내게는 없었다. 지나친 말이 나를 주눅들게 했고 비합리적인 행동이 내 삶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늘 폭풍우와
[한국농어촌방송/경남=오규열 일대일로연구원 부원장/중국 북경대학교 국제정치학 박사/전 서울디지털대학교 중국학부 교수 겸 교무처장] 2021년 대한민국 전체 대학의 신입생 충원율은 91.4%로 4만 586명의 정원을 채우지 못했다. 저출산의 여파로 학생이 줄어 앞으로도 신입생 충원율은 계속 낮아질 것이다. 2020년 기준으로 한국에는 4년제 일반대학이 191개 전문대학은 136개가 존재한다. 이 가운데 수도권으로 분류되는 서울과 경기도 그리고 인천시에 35%인 114개 대학이 있고 지방에 65%인 213개 대학이 고등교육을 담당한다.
# 민영환의 어리석음 1901년에도 매관매직의 풍조가 1894년 갑오개혁 이전보다 훨씬 더 심했다. 아무리 종친이나 외척 혹은 임금과 가까운 자라도 감히 한 자리도 은택(恩澤)으로 얻을 수 없었다, 관찰사 자리는 10만 냥 내지 20만 냥이었고, 일등 수령 자리도 5만 냥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았다. 서상욱은 민영환의 외삼촌이다. 민영환은 고종에게 군수 자리를 달라고 오래전에 아뢰었는데, 고종은 “너의 외숙이 아직까지 군수 한자리 하지 못했단 말이냐?”라고 말할 따름이었다. 얼마 후에 민영환이 다시 외삼촌 일을 아뢰자 고종은 고개를
1899년 3월 25일에 주한프랑스공사 드 플랑시가 델카세 프랑스 외무부 장관에게 공문을 보냈다. “지난 1월 이래로 대한제국의 군주는 만일 국가의 이익에 대해 고심하고 있는 군주라면 마땅히 선택할 개혁과 혁신의 길을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의심과 주저함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군주가 임명하는 대신들은 관직을 수행하기가 무섭게 사임하며 이 짧은 기간 동안 여덟 개 부처 책임자들 사이에 일어난 변화를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플랑시는 대한제국의 개혁에 대하여 회의적이다. 고종의 의심과 주저함 잦
[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숙자 문학박사] 앞마당에는 잔디가 융단처럼 펼쳐져 있고 뒷마당 한 모서리에는 온갖 종류의 야채들이 줄을 서서 푸르고 싱싱함을 뽐내고 있다. 야채들을 손수 가꾸어서 밥상 앞에 정갈하게 씻어둔다. 따뜻하게 지어진 잡곡밥과 된장찌개로 맛있는 식사를 하고 냉장고에 넣어둔 시원한 보이차 한 잔을 들고 밖으로 나가 달을 보며 마신다.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전원생활의 풍경이다. 물론 약간의 오차는 있지만 나는 그렇게 봄을 지냈고 여름을 지내고 있다.상추와 로메인도 심었고, 고추, 방울토마토, 오이, 참외, 수박 등 모종을
1897년 10월 12일에 대한제국이 탄생하였다. 고종 황제는 ‘자주독립국’임을 대내외에 선포하였고 광무개혁을 추진하였다. 개혁의 원칙은 구본신참(舊本新參 옛것을 근본으로 하되 새로운 것을 참작한다.)였다. 그런데 매관매직은 여전했다.먼저 일본 도쿄에 주재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외교관이 1898년 1월 11일에 수집한 조선의 정세에 대하여 살펴보자. (한국에는 주재관이 없었다.)“이 나라의 한탄스러운 상황은 무엇보다도 비양심적이고 부패한 관료 계층에 그 원인이 있다. 정부로부터 봉급을 받지 못하거나 기껏해야 보잘 것 없는 곡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