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12월 25일에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시킨 고종은 12월 28일에 조령(詔令)을 내려 백성들에게 생업에 안착할 것을 명했다. “오늘부터 의구심을 말끔히 풀고 각자 돌아가 생업에 안착하라. 만일 다시 뜬소문을 퍼뜨리면서 혼미하여 되돌아갈 줄 모르고 열 명, 다섯 명씩 떼를 지어 이전의 버릇을 되풀이할 것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바로 스스로 죄를 초래하는 것이다.” 이윽고 고종은 독립협회 지회도 해산시켰다. 1899년 1월 15일에 고종은 지방관과 진위대로 하여금 독립협회 지회를 엄금하도록 재차 명령하였다.아울러 고
1498년 7월 19일에 이극돈은 상소를 계속했다. “대개 일의 시말(始末)이 이러하온데 7월 14일에, 9일에 열어본 이유를 추문(推問)하므로 신은 진술하려 하였으나 국가의 비사(秘事)를 공청(公廳)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불가하기 때문에, 다만 의금부에서 와서 고(告)한 사유만 납초(納招)하였는데, 지금 신더러 ‘장차 고초를 겪을 것을 알고 그랬다.’고 하교하시니, 감히 모두를 진달하는 것이옵니다. 신이 실지로 노사신·한치형과 함께 아뢰기를 의논하였는데, 또 무엇이 의구(疑懼)스러워서 장차 고초를 겪을 것을 염려하였겠습니까. 또 하
[한국농어촌방송/경남=오규열 일대일로연구원 부원장/전 서울디지털대학교 중국학부 교수] 상해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중국 최대 주류업체인 귀주모태주(貴州茅台酒)의 시가총액이 중국 3위 도시인 선전의 국내총생산(GDP)을 뛰어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귀주모태주는 중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거래되는 주식으로 2020년 중국의 대표적 상업은행인 중국공상은행(中國工商銀行) 시총을 뛰어넘었다. 귀주모태주의 주식 가격은 코로나 발생 이전인 2019년 840위안 내외였으나 코로나가 유행하면서 2020년 계속 올라 2021년에는 2019년에 비해 거의 3
[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숙자 문학박사] 코로나 시대가 주는 불편함이 대단하지만 그렇다고 단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혹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새로운 생각과 발견을 경험한다. 밖으로 돌던 사람이 잔소리 없이도 집으로 돌아오고, 가까운 사람에게 안부를 자주 묻는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과의 약속도 기분 나쁘지 않게 코로나 핑계로 뒤로 미루는 현명함을 주었다. 건강에 늘 자신감이 넘쳐 자만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도 자신의 건강을 살필 줄도 알게 되었다. 광속으로 살던 우리의 시간에 조끔씩 여유가 더해져 옆도 바라보고 뒤
1898년 12월 23일에 고종은 마침내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시켰다. 시위대(侍衛隊) 제2대대 대대장 김명제는 부하 병정들에게 각 3원씩 나누어 주고 술을 마시게 한 다음 만민공동회를 해산토록 명령했다. 술 취한 시위대 병정들은 일제히 만민을 총검으로 위협하면서 행사장으로 들어왔다. 만민들이 흩어지자, 시위대 병정들은 만민들을 총검으로 위협하며 추격하였고, 그 뒤에는 보부상들이 뒤따라오면서 “민회를 밟아라” “회원 연설자를 잡아라” “쳐라” “쫓아라” 등 고함소리를 내며 위협 하여 기세가 살벌하였다. 만민들은 시위
1898년 12월 17일에 수구파 민영기 등이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킬 것을 진언함에 따라, 고종은 영국·독일·러시아·미국의 공사들을 불러 의견을 타진하였다.외국의 공사들은 순검(경찰)을 사용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도록 권고하였다. 황제가 순검의 힘이 약하니 군대로써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킴이 어떠한가를 물었을 때, 그들은 “이는 저희들이 알지 못하는 바이다”라고 말하면서 찬성하지 않았다. 12월 18일에 일본 공사 가토 마스오가 고종을 단독 면담했다. 고종은 가토에게 “군대로 민회를 해산하는 것이 어떠한가”를 물었다.
[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숙자 문학박사] 나는 언제부터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남편을 따라 골동품가게를 가게 되었다. 골동품이라는 이름으로 진열되어 있는 물건들에게 나는 여전히 낯설고 어색하다. 작은 불만을 가지고 따라나서기는 하지만 우연히 그곳에는 만나는 작은 찻잔이나 접시를 발견하기도 한다. 더러는 이가 빠져 사용하기 힘든 경우도 있고 또는 찻잔받침도 없이 혼자인 경우도 있다. 그래도 적당하게 필요한 용도를 찾아서 몇 개를 구입할 때도 있다. 물론 아주 적은 돈으로 구매가 가능하니 심적 부담은 적었다.나의 관심으로 사는 작은
1898년 12월 14일에 만민공동회는 광화문 앞에서 만민들을 폭행하려고 침투한 보부상 간부 4명을 잡아 추궁하였다. 이들은 ① 윤치호·고영근· 이상재의 암살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 ② 서울 시내 주요 보부상 도소 3곳에 보부상 및 몽둥이 꾼 수백 명을 매복시켰다는 것, ③ 보부상의 경비 19만 냥이 고종의 내탕금에서 공급되었다는 것, ④만민공동회를 공격하기 위해 백민회(白民會)가 조직되었는데 자금 2,000원을 탁지부 대신 민영기가 조달했다는 것 등을 자백하였다.12월 16일에 만민공동회는 보부상 간부 4명을 경무사에게 인도하여
1498년 7월 19일에 이극돈이 상소하였다. 상소문을 계속 읽어보자.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9일 2번째 기사) “그 후에 한치형이 그에 대해 처치할 일을 문의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실록》에는 실릴 리는 만무하지만, 그 원본 사초(史草)는 으레 춘추관(春秋館)에 수장되어 만세에 전하는 데(傳之萬世), 이 어찌 작은 일 이겠는가?(此豈小事) 무릇 사초는 함부로 버리지 못하게 되어 있으니, 만약 계달(啓達)하지 아니하면 버릴 수가 없으므로 본청에서 함께 의논한 후에 계달할 것을 이미 의정(議定)했다.’고 하니, 한치형도
[한국농어촌방송/경남=오규열 일대일로연구원 부원장/전 서울디지털대학교 중국학부 교수] 6월 11일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발표될 당대표 선거 결과가 초미의 관심사다. 이유는 35세에 국회의원에 한 번도 당선된 적이 없는 이준석 후보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준석에 대한 높은 지지는 대한민국의 고질적인 세대갈등을 뛰어넘어 새로운 관점에서 대한민국의 역사를 쓸 계기가 되었다는 측면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가장 빠르고 성공적으로 이룬 나라로 유명하다. 그러나 586민주화세대는 윗세대인 산업화세대를
1898년 12월 1일(음력 10월 8일)에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김덕구의 장례를 만민장(萬民葬)으로 거행했다. 김덕구는 11월 21일에 마포에서 보부상과 맨주먹으로 투쟁하다가 죽은 신기료장수(구두 수선공)였다. 만민공동회 회원들은 수만 명이 모여 김덕구의 초빈처인 숭례문 밖 쌍용정에서 입관한 다음, 장례식장인 숭례문 밖 연지(蓮池)로 운구하였다. 장례식은 오후 1시부터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시민들과 외국인들이 구름같이 모여서 만민장 광경을 지켜보았다. 김덕구 만민장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구경한 시민들은 지지세력이 되었고, 황국협
[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숙자 문학박사]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 태양이 한 우주의 중심을 이루고 있듯이 누군가는 모든 사람의 중심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중심에서 벗어나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에게서 이탈하는 사람도 용서하지 못한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늘 그 사람은 중심이 되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그러나 세상에 함께 선 사람들은 무수하게 역할을 바꾸며 살아간다. 내가 중심이었다가 네게 자리를 내어주어 네가 중심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1898년 11월 26일 오후 1시에 고종은 경운궁 돈례문(남문) 군막에 친히 납시었다. 이 자리에는 각부 대신 및 외국 공사·영사와 그 부인들이 좌우에 정렬하였다.오후 2시 30분이 되자 내부대신서리가 만민공동회측 대표를 불렀다. 200명의 대표는 그를 따라 고종이 친림한 탑전으로 들어갔다. 대표들을 면담한 고종은 만민들의 요구 사항을 다 들어주겠다고 친히 하교하였다.이어서 고종은 농상공부대신 권재형을 통하여 칙어를 전달했다. 고종은 칙어에서 ①군신 상하가 신의(信義)를 지키며, ②현명하고 능력있는 이를 전국 안에서 구하고, ③아
1498년 7월 19일에 무오사화를 일으킨 이극돈이 상소하였다. 상소문을 읽어보자.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9일 2번째 기사) “지난날에 신이 한치형과 더불어 의정부에 함께 있었는데, 한치형이 가만히 신에게 말하기를 ‘김일손의 사초는 세조 조의 중대한 사실을 썼다 하는데, 사실인가?’ 하므로, 신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여 소릉(昭陵) 복구에 대한 일을 대답하니, 한치형은 신이 반드시 알지 못하는 것이라 여기고 다시 말하지 않았습니다.” 한치형(1434~1502)은 성종의 모친인 인수대비(1437~1504)의 인척이었다. 14
[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숙자 문학박사]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마음의 거리라고 한다. 젊어서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거리와 시간이 제일 멀다고 느꼈던 적이 있다. 때로는 거센 파도가 일고 폭풍우 같은 그 젊음이 지나고 나니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혹은 마음을 관찰하는 여유가 조금 생겼다. 그러고 보니 네게 가는 길보다 내 속에 있는 마음이 더 멀어 보인다. 그리고 너의 모습은 살펴볼 수가 있는데 내 마음은 볼 수가 없다. 나는 볼 수 없는 마음을 가지고 화를 내기도 하고 타일러 함께 가기도 한다. 볼 수가 없으니 더 견디기 힘들고 버
만민공동회 제18일째인 1898년 11월 22일, 이른 아침부터 더욱 많은 시민들이 종로에 모여들었다. 학생들도 휴학하여 수만 명의 대규모 만민공동회가 개최되었다. 군인들도 일부 고급장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만민공동회를 지지했고, 심지어 경무청의 순검들까지도 만민공동회를 지지하고 정부를 비판하였다.이때 마포에 사는 한 시민이 만민공동회에 달려와서 마포에 둔을 치고 있는 보부상의 행패가 크다고 보고하였다. 분격한 일부 시민들은 빈손으로 마포로 달려갔다. 그런데 무장한 보부상들을 이길 수 없었다. 시민들은 주먹을 휘두르고 보부상들은
[한국농어촌방송/경남=오규열 일대일로연구원 부원장/전 서울디지털대학교 중국학부 교수] 5월 19일부터 3박 5일간 문재인 대통령은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 이번 방문을 통해 한국과 미국은 백신과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등 첨단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기존 군사적 성격이 강했던 한미동맹을 포괄적 경제동맹으로 확장 시켰다는 평가가 중론을 이룬다. 한미정상 간에 합의된 경제동맹은 글로벌 가치사슬의 대변동기에 이루어진 일로 그 의미가 남다르며 향후 한국 경제에 미칠 파급력도 매우 클 것이다
1898년 11월 20일에 보부상들은 의기양양하여 그들의 영수인 과천군수 길영수를 호위하면서 종로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행렬이 종로에 도착하자 길영수는 장군처럼 정좌하였고 보부상들이 물푸레나무 몽둥이를 좌우에 나열하여 위세 당당하였다.이 날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인화문 앞에는 만민공동회가 농성하고, 종로에서는 황국협회의 시위가 벌어져 위기가 고조되었다. 각국 공사관들도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대비하기에 급급하였다.마침내 11월 21일 새벽에 보부상들이 만민공동회 농성장을 습격했다. 종로에서 집회를 연 보부상들은 홍종우가 등단
[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숙자 문학박사] 겨울을 이겨낸 용감한 매화나무는 봄의 화려했던 꽃을 뒤로하고 열매를 많이도 달고 있다. 인간의 거칠고 메마른 손이 열매를 따기 전까지는 몸과 가지에 달린 열매는 한 식구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을 것이다. 한참동안이나 그렇게 지내다가 어느 시간에 이별을 하게 될 것이다. 아마 매화나무는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이며, 추운 겨울을 견뎌낸 것처럼 또 말없이 제 가족의 이별도 묵묵히 받아들일 것이다. 매화나무는 괜찮은 척하고 살아갈 것이다.매화나무가 그렇듯 우리의 삶도 괜찮은 척하며 견디고 있는 것이다
1498년 7월 18일에 유자광(1439~1512)이 실록청(實錄廳)에서 초한 사초(史草)에 누락이 있는가 의심하여 다시 수검(搜檢)할 것을 연산군에게 청했다. 이러자 「성종실록」 편찬 시 감관사(監館事)로 참여한 성준은 "이는 우리들이 모르는 바이다. 무릇 사람들이 입계(入啓)하는 일에 있어서 이와 같이 독차지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말하였다.대사헌 강귀손도 또한 불가하다 말하니, 유자광이 드디어 정지하였다.이윽고 강귀손이 남곤으로 하여금 좌중에서 말하게 하였다.“지금 국옥(鞫獄)에는 위관(委官)이 있고 의금부도 있지만 일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