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촌방송/경남=오규열 일대일로연구원 부원장/전 서울디지털대학교 중국학부 교수] 코로나19 백신 수급이 원활치 않다는 문제가 제기되면서 백신의 지적 재산권 면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UPI 뉴스는 2021년 5월 3일 미국 정부와 WTO가 코로나 백신 지적 재산권의 한시적 면제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UPI는 론 클레인 백악관비서실장이 2일(현지시간) 미국 CBS 방송 '페이스 더 네이션'(Face the Nation)에 출연해 "캐서린 타이 미 무역대표부(USTR)가 다음 주 WTO에 가서 어떻게 하면
[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숙자 문학박사] 비가 며칠째 굵은 빗방울로 내리더니 어둠이 짙은 이 밤에도 빗소리가 들린다. 오늘 밤을 채우고 내일까지 내릴 모양이다. 내리는 비는 그동안 심어두었던 농작물에는 은혜로운 것이다. 나뭇잎은 미세먼지나 노란 송화가루로 제 색을 내지 못하고 있다가 오늘 내린 비 덕분에 더욱 영롱한 연두와 초록빛을 발하고 있다. 온통 천지가 초록이다. 간혹 흰 찔레꽃이 초록빛 사이를 비집고 나오기도 하고 화려한 붉은 장미가 얼굴을 내밀고 있기도 하다. 길옆에는 노란색 금계국이 수북하다. 아름다움이 충만한 계절임에 틀
1498년(연산군 4) 7월 18일의 이원의 공초는 이어진다.“신이 봉상시 참봉(參奉)이 되어 김종직의 시호를 의론하기를 ‘김종직은 천자(天資)가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온량(溫良)하고 자애(慈愛)하였고, 일찍이 시례(詩禮)를 배워 자신이 이 도를 책임하여 덕에 의거하고 인(仁)에 의지하고, 충신하고 독경(篤敬)하여 사람 가르침을 게을리하지 아니하고, 사문(斯文)을 일으키는 것으로써 자기 직책을 삼았다. 그 학문을 하는 데는 왕도를 귀히 여기고 패도를 천히 여겼고, 그 일에 임해서는 지극히 간략하여 번거함을 제거하였고, 그 사람을 가르
1898년 11월 10일 만민공동회는 이상재 등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의 석방에 성공했다.고종은 조병식과 민종묵을 해임하고, 유기환을 주일공사로 보냈지만, 만민공동회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익명서를 조작한 조병식 등을 재판에 회부할 것을 결의하고, 장소를 종로로 옮겨 집회를 계속하기로 결정하였다.11월 11일에 서울 시민들과 독립협회·만민공동회 회원들은 종로(운종가)에서 만민공동회를 열었다.고종과 정부 측은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을 석방하면 만민공동회가 해산되리라고 생각했다가, 만민공동회가 여전히 시위를 계속하며 익명서 조작에 간여한
만민공동회 2일째인 1898년 11월 6일에는 서울의 시전상인들이 모두 철시하고 만민공동회에 참가하였고 시민들은 경무청 문 앞에서 철야했다.11월 7일 아침 6시경에 경무청은 이상재 등 17명을 고등재판소로 이송하였다. 이에 따라 시민들은 고등재판소 앞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이날 외부대신 민종묵은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는 것에 양해를 구하기 위해 각국 공사관을 순방하였다. 그런데 영국 총영사와 미국 공사가 군대 동원에 우려를 표명했다.한편 만민공동회는 고등재판소장에게 이상재 등 17명의 재판은 공개재판으로 할 것
1898년 11월 4일 박정양 내각은 독립협회에 공문을 보내어 5일까지 25명의 중추원 의관을 선출하여 명단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독립협회는 11월 5일에 독립관에서 중추원 민선의관 선거를 실시한다고 공고하였다.그런데 11월 4일 밤에 ‘익명서(匿名書)’가 서울 광화문과 시내 곳곳에 게시되었다. ‘익명서’에는 ‘독립협회의 의회설립 목적은 황제를 몰아낸 후, 대통령 박정양 · 부통령 윤치호 · 내부대신 이상재 등을 내세워 공화제 국가를 만들려는 것’이라고 적혀있었다. 이는 의정부 찬정 조병식, 군부대신 서리 유기환, 법부협판
1498년 7월 18일에 이원이 공초하였다.“신은 일찍이 김종직에게 수업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김종직이 동지성균(同知成均)으로 있을 적에 신이 생원(生員)으로 성균관에 머물면서, 목은(牧隱)의 관어대부(觀魚臺賦)를 차운하여 김종직의 과차(科次)로 나아가니 김종직이 저를 칭찬하였습니다. ”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8일 3번째 기사)이원이 차운했다는 목은의 ‘관어대부’는 목은 이색(1328∽1396) 지은 부(賦)이다. 이 부는 에 ‘관어대소부(觀魚臺小賦)’란 제목으로 실려있다. 그런데 김종직도 관어대부(觀魚臺
1898년 10월 30일 의정부 참정 박정양은 29일에 열린 관민공동회에서채택된 헌의 6조를 고종에게 보고했다. (고종실록 1898년 10월 30일 2번째 기사)“이달 29일에 백성들이 종로 거리에 크게 모여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라 일컬으며 나라의 폐단과 백성들의 고통에 대해 의논하여 제거할 것이 있다고 하면서 의정부의 여러 신하들이 함께 모임에 참가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관리와 백성의 협상이 비록 처음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백성들이 이미 나라의 폐단과 백성들의 고통에 대해 의논하여 제거할 것이 있다고 말
고종의 집회 금지 명령에도 아랑곳 않고 독립협회는 철야농성을 계속했다. 그런데 상황은 독립협회에 점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1898년 10월 23일에 고종은 의정부 찬정 박정양을 참정(參政 총리)으로 승진시키고, 중추원 의장에 한규설, 부의장에 윤치호를 임명하였다.(고종실록 1898년 10월 23일 6번째 기사)아울러 고종은 중추원 관제를 중추원 의장·부의장과 협의해서 개정하라는 조칙을 내렸다.이에 독립협회는 이상재 등이 마련한 중추원 개정안을 정부에 제출했는데, 이 안에는 의관 50명 가운데 관선과 민선을 25명씩으로 하고 민선
1498년 7월 18일에 이주(李胄)가 공초하였다."신이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설재(設齋)가 편안하지 아니하다는 것을 논하여 서계(書啓)하기를, ‘성종은 나의 임금(吾君)이온데, 신이 멀지 않아 죽으면 무슨 면목으로 성종을 지하에서 뵈오리까. 바라옵건대 신을 파직하시고 신의 죄를 다스려서 신으로 하여금 성종을 지하에서 뵐 적에 할 말이 있게 해 주시오면 이는 전하의 은사이옵니다.’ 하였습니다.이른바 ‘성종은 나의 임금이다.’라고 한 것은 옛날에도 역시 ‘나의 임금[吾君]’이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오며, ‘할 말이 있다’고
1898년 10월 17일에 고종은 3년간 귀양 보낸 조병식을 의정부 찬정 (贊政)에 임용했다. 독립협회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10월 20일에 고종은 토론은 정치문제 이외에만 허용하고, 집회는 한 장소에서만 하도록 k하고 이차집회(離次集會: 장소를 옮겨서 집회를 여는 것)를 금지하는 조칙을 내렸다.“무릇 협회라는 이름 아래 제멋대로 쫓아다니면서 치안을 방해하는 자는 엄격히 금지시키도록 하라.” (고종실록 1898년 10월 20일 1번째 기사)10월 21일에 고종은 독립협회의 규탄을 받고 물러난 윤용선을 의정부 의정(議政)에 제수하였
1893년 3월 19일에 충청감사 조병식(1823~1907)을 파직한 고종은 선무사 어윤중을 충청도로 보냈다. 4월 1일에 어윤중은 보은군수와 함께 동학교도에게 임금의 윤음을 읽으면서 해산을 명하였다. 아울러 어윤중은 탐학한 관리들을 엄히 처벌하겠다고 약속했다.이에 동학 지도부는 어윤중의 말을 믿고 해산하였다.1893년 11월 7일에 어윤중은 탐오한 죄인 조병식의 처벌을 아뢰었다.“양호(兩湖 호남과 호서) 선무사(宣撫使) 어윤중의 장계(狀啓)에, ‘전 충청 감사 조병식의 탐오하고 포악한 정절(情節)에 대하여 조사하고 성책(成冊)하여
1498년 7월18일, 김일손에 대한 국문은 7일째로 접어들었다. 이 날 유자광은 김종직의 시를 읽은 조위등 6명을 국문하기를 청했다.김종직의 문집에 사가독서(賜假讀書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한 조위 등에게 보냈다는 시(詩)가 있었다. 이 시에는 ‘육군(六君)의 성명이 이미 영(瀛 :홍문관)에 올랐구려[六君名姓己登瀛]’라는 구절이 있었다. 이때 사가독서한 자가 무릇 6인이었기 때문이다.그런데 유자광은 이 시 구절은 ‘필히 동한(東漢)의 당인(黨人)들이 삼군(三君)이라고 한 말과 같은 것’이라
1893년 3월 25일, 고종은 삼정승과 보은 집회 관련 회의를 계속했다.고종 : "지금 오랫동안 태평하여 군사를 양성하지 않고 있다. 지금 들으니 군사가 없다고 한다. 그런가?"우의정 정범조 : "단지 노비들과 사령(使令)들만 있을 뿐이니, 허술하기 짝이 없습니다."고종 : "장차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영의정 심순택 : "어윤중이 도어사(都御史)로 명을 받고 내려갔는데, 잘 타일러서 해결된다면 된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어찌 처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좌의정 조병세 : "처단은 회유한 다음의 일입니다."정범조 : "
1893년 3월 중순에 2만 명의 동학교도들은 충청도 보은에서 모여 척왜양(斥倭洋)과 부패한 수령의 척결을 외쳤다. 이러자 조정에선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3월 19일에 고종은 조병식을 충청도 관찰사에서 파직하고, 후임으로 조병호를 발령냈다. 이어서 고종은 선무사로 어윤중을 파견하였다.3월 25일에 고종은 삼정승과 보은 집회 관련 대책 회의를 하였다.영의정 심순택 : "연이어 올라오는 전라도와 충청도 감사의 보고와, 충청감사 조병식과 병사 이용복의 장계를 보니 허망한 무리들이 날로 더욱 무리를 불러 모아 전라도와 충청도에 깃발을 세우
[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숙자 문학박사] 인생은 설명할 수 있는 논리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비논리가 존재한다.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수없이 일어나고 또 일어나는 일이 바로 우리가 사는 삶인 것 같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제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는데 오늘은 사람도 아닌 사람이 되고 어제는 너만 사랑했는데 지금은 너만 사랑할 수가 없게 된다.이런 요지경에 살다보니 진실은 물속에 가라앉아 버렸고 아부와 아첨이 세상을 독차지하고 있다. 진실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어느새 미움의 대상이 되고 이들의 존재는 어느새 구석으로 밀려나게
1498년 7월 17일에 “김종직의 제자를 모조리 추핵(推覈)하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말한 연산군은 대신들이 우려를 표명하자, "김종직의 제자를 끝까지 추궁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내가 그 사람됨을 알고자 하니, 모조리 써서 아뢰라."고 전교하였다.이에 윤필상 등이 아뢰었다."김종직의 제자는 이미 김일손의 사초에 모두 기록되어 일찍이 대내(大內 내전)로 들어갔습니다."이러자 연산군이 전교하였다."그 사초에 기록된 김종직의 제자 신종호 등 약간 명도 모두 김일손처럼 수업을 하였느냐, 그렇지 않는 자도 있느냐? 또 김일손의 말에 ‘나
[한국농어촌방송/경남=오규열 일대일로연구원 부원장/전 서울디지털대학교 중국학부 교수] 통상 물가가 2% 이상 오르면 인플레이션을 걱정하여 중앙은행은 금리를 인상한다. 금리 인상은 기업의 자금조달에 부담을 주기에 경기를 위축시키기도 하고 주식시장과 주택시장의 거품을 거두어 내기도 한다. 중앙은행은 전체 국민의 안정적인 경제생활을 보장해야 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기에 경기가 위축되지도 않으면서 물가의 폭등을 막을 적정한 금리를 찾아야 하는 숙명적 과제를 안고 있다.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 2006년부터 2007년 사이 미국의 기준
1898년 10월 12일에 독립협회는 고종 미수 암살사건인 김홍륙독다(커피)사건으로 촉발된 노륙법과 연좌법 부활 기도를 저지시켰다. 심순택, 신기선 등 친러 수구파 일곱 대신이 파면되었고, 의정부 찬정(贊政) 박정양이 의정부 의정 서리로, 민영환이 군부 대신으로 임용되었다. (고종실록 1898년 10월 12일 2번째 기사)12일 저녁에 독립협회 회원들과 시민들은 만세를 부르면서 해산했다.각국의 외교관들은 대한제국에서 민중운동에 의해 개혁 정부가 수립된 사실에 놀랐다.주한미국공사 알렌은 ‘하나의 평화적 혁명(a Peaceful Rev
[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숙자 문학박사] 가로수 길을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였던 벚꽃도, 산기슭마다 채웠던 진달래도 동네길 어귀를 노랗게 만들었던 개나리도 이제 제 역할을 마치고 봄에서 멀어지고 있다. 여름의 문턱에서 봄의 전령사들은 이미 자신의 역할에 한없이 충실하게 지내다가 스스럼없이 자신의 자리를 비워주고 있다. 세월의 흐름에 놀라 뒤늦게 핀 벚꽃들은 부지런한 그들의 친구가 주는 상큼함이라는 잎사귀와 마주하며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인다. 우리에게 겨울을 잘 견디고 버텨준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자연은 늘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