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1년 6월경에 남효온은 절주(節酒)하라는 김시습의 편지에 대한 답신을 썼다.동봉산인(東峰山人 김시습의 호)에게 답하는 편지지난번에 선생께서 더할 수 없는 호의를 베푸시어 산중에서 저를 전송하며 멀리 호계(虎溪)를 건너오셨으니 은혜와 영광이 몹시 깊었습니다.호계(虎溪)는 중국 여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 앞에 있는 시냇가이다. 진(晉)나라 혜원법사(慧遠法師)가 이곳에 있으면서 손님을 보낼 때 이 시내를 건너지 않았는데 여기를 지나기만 하면 문득 호랑이가 울었다.하루는 그가 도연명(陶淵明), 육수정(陸修靜)과 함께 이야기하다가
1481년 2월에 술을 경계하는 글을 지은 남효온은 김시습과 술에 관한 서신을 몇 차례 주고 받았다. 김시습의 『매월당집』에는 편지 3통이, 남효온의 『추강집』에도 편지 한 통이 수록되어 있다.그러면 『추강집』 ‘제4권’에 수록된 편지를 읽어보자. 먼저 동봉산인(東峰山人) 김시습이 남효온에게 보낸 편지이다.그저께 선생(남효온을 말함)을 모시고 천석(泉石) 위에서 노닐며 종일토록 서성이다가 청계(淸溪)에서 서로 헤어졌습니다. 맑은 흥취가 다하지 않았건만 작별이 갑작스러웠으니 얼마나 야속했는지 모릅니다.봉별(奉別)한 이후로 지금 며칠이
[한국농어촌방송=이희승 기자] 고등어는 국민 생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종실록’, ‘자산어보’ 등에 고등어가 언급되는 것을 보면, 조선시대 혹은 더 이전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등어를 먹어왔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조리법도 구이, 회, 조림 등 다양하며 간고등어는 경북 안동의 대표 상품이 될 만큼 한국인과 친숙합니다.국내 고등어 연간 소비량은 지난해 기준 총 8만 6000t입니다. 참고등어와 대서양고등어의 평균 무게를 따졌을 때 1년에 약 4500만~5400만 마리가 한국에서 소비됩니다. 우리나라 인구를 대략 5000만 명으
남효온은 김시습과 친하게 지낸 홍유손, 그리고 성균관에서 만난 김일손과 함께 수락산을 가끔 찾았다. 김시습·남효온·홍유손·김일손은 만나면 술 마시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담소(談笑)했다.한번은 김시습이 남효온에게 “나는 선왕(先王)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으니 벼슬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지만, 선생은 이와 다르니 세도(世道)를 위하여 한번 나아감이 옳을 것”이라고 말했다.이에 남효온은 소릉(단종의 모친 묘소)이 복위된 뒤에 응시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에 김시습은 또다시 말하지 않았다.한편 남효온은 엄청 술을 좋아했다. 애주
남효온은 수락산에 사는 김시습을 자주 찾았다. 남효온이 쓴 시가 있다.수락산으로 청은(淸隱 김시습의 호)을 찾아가다 길을 잃었다. 30리쯤 갔을 때에 계곡의 근원이 비로소 다하고 길에 드리워진 복숭아 열매가 있었다. 가지를 휘어잡아 열매를 따서 먹으니 주린 배가 불렀다.1수온종일 험한 길 걸어 개울 하나 건너니 竟日崎嶇渡一溪저녁 바람이 기이한 새 울음 불어 보내네 晩風吹進怪禽啼산길 다한 바위 모퉁이의 복숭아꽃 나무 山窮石角桃花樹가을 열매 주렁주렁 나그네 향해 드리웠네 秋實離離向客低2수맹수들 막 지나가 발자국 마르지 않았는데 虎豹新過
김시습(1435-1493)과 남효온(1454-1492)은 언제 처음 만났을까? 이는 분명하지 않다. 김시습이 19세 연하인 남효온에게 ‘추강’으로 존칭을 쓰는 것을 보면, 남효온이 진사 시험에 합격한 1480년(성종 11년) 이후에 만난 듯하다.1480년이면 김시습이 서울 수락산(水落山)에서 10여 년 정도 기거하고 있던 때였다. 김시습은 경주 금오산에서 머물다 1471년(성종 2년) 봄에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1472년 가을부터 수락산 노원 지역, 지금의 노원구 상계동에서 터를 잡은 듯하다. 그는 이곳에서 직접 흙을 만져 농사
1485년 봄에 김시습은 강원도 진부령(珍富嶺)을 넘어 동해 바닷가로 향하였다. 동해로 가는 길에 독산(禿山 : 민등산이라는 뜻)을 거쳤는데, 거기에는 승려 도안(道安)이 1484년에 지은 독산원(禿山院)이 있었다. 김시습은 도안의 공덕을 찬양하여 기(記)를 써주었다. 이 글은 ‘매월당집’에 남아 있는 유일한 기문(記文)이다.“관동은 모두가 산이요, 동해에 임하여 지세가 울퉁불퉁 험한 까닭에 길 가는 것이 힘들고 고생스럽다. 독산원은 오대산의 남쪽 성오평(省塢坪)의 경계에 있으면서, 서쪽으로 진부(珍富)를 눌러 쑥과 명아주가 하늘에
매월당 김시습의 ‘동봉육가’ 제4수부터 제6수를 계속 읽어 보자.제4수어머니, 맹자 어머니 같으셨던 어머니나를 기르며 고생하고 집을 세 번 옮기셨지요.일찍이 공자를 배우게 하셔서경학으로 요순시대를 회복하라 기대하셨지요.有孃有孃孟氏孃 유양유양맹씨양哀哀鞠育三遷坊 애애국육삼천방使我早學文宣王 사아조학문손왕冀將經術回虞唐 기장경술회우당어찌 알았으랴 유생이란 이름이 나를 그르치어십 년을 외지로 분주하게 나다닐 줄을아아 네 번째 노래! 우울하고 답답한 이 노래골짜기에 우는 까마귀는 제 어미를 먹이건만.烏知儒名反相誤 오지유명반상오十年奔走關山
[한국농어촌방송=조수아 인턴기자] 보수원로의 대표인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철학박사)가 지난 4일 밤 별세했습니다. 향년 94세. 유족들은 숙환으로 신촌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 중이던 김 교수는 지난 4일 오후 10시 30분쯤 유명을 달리했다고 5일 전했습니다. 고인은 생전에 약속한 바에 따라 시신을 연세대 의과대학에, 서대문구 자택은 누나 고(故)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의 모교인 이화여대에 기부할 예정입니다. 장례는 자택에서 가족장으로 치러지고 발인은 7일입니다. 고인은 정치와 사회 전반을 풍자하는 신랄한 칼럼으로 큰 인기를
1485년에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동해 바닷가에 머물렀다. 이즈음에 그는 ‘동봉육가(東峰六歌)’를 지었다. 모순에 찬 자신의 모습을 회고한 자전적 시 ‘육가’는 본래 그가 존경했던 당나라 시인 두보(712∽770)와 송나라의 절의파 문인 문천상(1236∼1282)의 시 형식을 이용한 것이다.그러면 ‘동봉육가’를 읽어 보자.1.나그네여, 동봉이란 이름의 나그네여헝클어진 흰머리에 초라한 모습스무살도 못 되어서 글과 칼을 배웠지만시큼한 선비 꼴은 되고 싶지 않았다네.有客有客號東峯 유객유객호동봉鬖䯯白髮多龍鍾 삼발백발다용종年
1478년 4월 15일에 성종은 성균관 유생 남효온이 올린 상소를 승정원에 보냈다. 도승지 임사홍이 아뢰었다."소릉(昭陵 단종 모친의 늘)을 복위하라는 것은 신하 된 자로서 거론할 수 없는 것인데 지금 남효온이 마음대로 거론하였으니 옳지 못합니다."이러자 성종이 전교하였다."소릉을 이제 다시 논의함은 부당하다.“이어서 임사홍이 아뢰었다."이 상소는 이심원의 상소와 같습니다. 이심원이 경연(慶延)과 강응정을 천거하였는데 남효온도 경연을 추천하였습니다. 신이 삼가 듣건대, 남효온의 무리에 강응정·정여창·박연 등과 같은 이가 있습니다.
1478년(성종 9년) 4월 15일, 남효온 상소의 마지막 부분은 소릉 복위 였다. (성종실록 1478년 4월 15일 3번째 기사)“여덟째로, 소릉(昭陵)의 능호를 복위하는 것입니다. (소릉은 문종 비(妃)이자 단종의 모친 현덕왕후(顯德王后 1418∽1441) 권씨의 능이다.현덕왕후는 단종을 1441년 7월 23일에 낳은 후 하루 만에 산후통으로 23세에 운명하였다.)신이 삼가 살피건대, 세조 대왕은 하늘이 준 용지(勇智)로써 일월(日月)같은 밝음을 가지시고 하늘과 사람의 도움을 얻어서, 큰 어려움을 깨끗하게 타개하여 집을 나라로
1478년(성종 9년) 4월 15일에 성균관 유생 남효온이 올린 상소는 계속된다. (성종실록 1478년 4월 15일 3번째 기사)“일곱째 풍속을 바루는 것입니다. 사도(司徒 교육자)의 벼슬이 폐지되고부터 풍속이 날마다 야박하여지고, 시서(詩書)의 교육이 해이해지면서부터 옛 풍속을 회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헌의(獻議)하는 자가 모두 말하기를, ‘풍속이 날마다 야박해지는 것은 시세(時勢)가 그러한 것이다. 세상의 도가 점점 떨어지고 인심이 경박하여 풍속이 옛날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늙은 자가 다시 젊어질 수 없는 것과 같다.’
1478년(성종 9년) 4월 15일에 혼인, 수령의 선발, 내수사의 폐지 등을 건의한 24세의 성균관 유생 남효온의 상소는 계속된다. (성종실록 1478년 4월 15일 3번째 기사)“다섯째, 무당과 부처를 물리쳐야 합니다. 신이 듣건대, 무당은 삼풍(三風: 무(巫)·음(淫)·난(亂)의 세가지 나쁜 풍속)가운데 그 하나이며, 부처는 본래 서역(西域)의 교(敎)인데, 옛 제왕은 모두 외면하고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습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보탬이 없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음사(淫祀)를 섬기면 복이 없
이심원이 상소한 일주일 후인 1478년(성종 9년) 4월 15일에 또 한 통의 상소가 올라왔다. 성균관 유생 남효온(1454∽1492)의 상소였다.“신은 초야(草野)의 백성으로서 성대(聖代)를 만나 태평의 덕화(德化)를 입으니, 개나 말이 그 주인을 사랑하는 정성으로써 강개(慷慨)하여 배운 바를 말하고자 한 지 몇 해가 되었습니다.이달 초하루에 하늘에서 흙비가 내리자 하교(下敎)하였으니, 아아! 상림(桑林)의 육책(六責)과 주(周)나라 선왕(宣王)이 자신을 반성하고 덕행을 가다듬은 것이 이에서 더할 수 없습니다. 마음 쓰심이 이와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세 달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지방선거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급격한 경제적, 사회적 변화가 나타나면서 윤석열 정부가 지향하고 있는 농업정책의 세부적인 내용들이 아직 명확하게 발표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그러다 보니 문재인 정부에서 추진하던 정책들을 다시 윤석열 정부에서 추진해야 하는 정책과제로 제시하는 칼럼이나 기사가 나타나는 등 신정부 농정 방향에 대한 의문과 논란이 확산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논란이 지속된다면, 정치적 성향의 여부를 떠나서, 시대의 변화를 잘못 인식했었던 문재인 정부의 농정이
1478년(성종 9년) 4월 8일, 주계부정(朱溪副正) 이심원(1454∼1504)이 올린 ‘세조의 훈구 공신은 물러나야 한다’는 상소는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는 훈구 공신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4월 9일에 성종은 창덕궁 선정전에서 이심원을 만났다. 성종 : "상소 중에서 ‘세조 조의 훈신(勳臣)을 쓰지 말라.’고 한 것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겠다. 네가 무슨 마음을 가지고 말하였는가?"이심원 : "대저 창업하는 임금은 뜻이 성공하는 데에 있으므로 비록 한 가지의 재예(才藝)를 가진 자라도 모두 거두어 쓰나, 수성(守成)하는 임금
[한국농어촌방송=홍채린 기자] SK이노베이션의 파이낸셜 스토리 핵심인 '그린 트랜스포메이션'에 대해 "궁극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전략"이라는 글로벌 석학의 평가가 나왔습니다. 4일 SK이노베이션에 따르면, 美 애리조나 주립대학교 썬더버드 경영대학원의 카난 라마스와미 교수는 "SK이노베이션의 그린 트랜스포메이션은 혁신하려는 SK의 의도가 잘 드러난 전략"이라며 “미래에 대한 명확한 모습을 완성하고 실행 계획도 타당하다”고 분석했습니다. 라마스와미 교수는 신재생에너지를 포함한 에너지 산업, 지속가능 경영, 기업 거버넌스 및 인수합
1478년(성종 9년) 4월 1일에 흙비[土雨]가 내렸다. 성종은 “하늘이 꾸짖어 훈계하는 것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인데, 경 등은 어찌하여 한마디 말도 없는가?”라며 도승지 이하 승정원 직원들을 꾸짖었다. 이윽고 성종은 의정부에 전지(傳旨)하였다. "하늘과 사람의 이치가 같아 현상(現象)과 본체(本體)는 서로 떨어질 수 없으니, 상서로움과 재변이 감응하는 것은 오직 사람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사리분별에 어두운 내가 임금 자리에 있으면서 밤낮으로 공경하고 부지런하며, 임무를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그런데 지난 달에는 지
1493년 부여 무량사(無量寺)에서 생을 마친 김시습의 시문(詩文)은 거의 흩어져 남아 있지 않았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세인(李世仁)이 유고 간행을 중종에게 건의하였고, 이자(李耔) · 박상(朴祥), 윤춘년(尹春年) 등이 시문을 수집하여 간행하였다.1511년(중종 6) 3월에 이세인이 성종조 문사들의 유고 간행을 아뢰니 중종이 따랐다. (중종실록 1511년 3월 14일)석강에 나아갔다. 참찬관 이세인이 아뢰었다. "지금 글을 숭상하고 학문을 일으키는 때에 있어서, 여러 가지 일들을 갖추어 거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종조에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