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무량사(無量寺)의 김시습 초상을 보고 나서 천왕문을 나왔다. 오른 편에는 김시습 부도(浮圖)가 있다. 1493년 봄에 김시습은 유언하기를, “화장하지 말고 절 옆에 임시로 매장하라.” 하였다. 그런데 3년 뒤에 무덤을 파보았더니 얼굴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 같았다고 한다. 승려들은 그가 틀림없이 부처가 되었다고 여겨 다비(茶毗 화장)를 행하였다. 그때 사리 한 점이 나와 사리를 봉안하는 부도탑을 1495년에 세웠다. 김시습 부도는 오른편에는 부도가 있고, 왼편에는 매월당 시비(詩碑)가 있다. 먼저 ‘부도 안내판’부터 읽는다.
부여 무량사에 있는 김시습의 자화상은 검은 모자를 쓰고 수염을 기른 모습이다. 《영남야언(嶺南野言)》에는 “화상은 여러 해가 지나도록 절간에 두었다가 홍산현감 곽시(郭翅)가 그 유적을 찾아서 절 옆에 사당을 지어 그 화상을 모시고 제사 지냈는데, 그 제문에 이르기를, “백이(伯夷)의 마음이요, 태백(泰伯)의 행적이라.”하였다.그런데 김시습의 자화상은 부여 무량사뿐만 아니라 여러 군데에 걸려 있었다. 1668년에 서울 수락산에 들어와 은거한 박세당(1629∽1703)은 1686년에 김시습 영당(지금의 노강서원)을 세우고 무량사에 있던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에 있는 무량사(無量寺)를 답사했다. 무량사는 김시습(1435∽1493)이 1493년(성종 24)에 58세에 생을 마친 곳이다. 극락전과 명부전을 보고 나서 김시습 초상이 모셔진 영정각에 이르렀다. 먼저 ‘김시습 초상’ 안내판부터 보았다. 김시습 초상 (보물 제1497호) 김시습 초상은 조선 전기 문인이었던 김시습을 그린 것이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옅은 살구색과 짙은 갈색을 사용해서 대비되게 표현하였고, 수염은 섬세하게 검은색으로 그려 당시 초상화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약간 찌푸린 눈매와 꼭 다문
1493년(성종 24) 봄에 김시습(1435∽1493)은 무량사 선방 청한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나이 58세였다. 「무량사에서 병으로 눕다(無量寺 臥病)」 시가 있다. 아마 평생 마지막 시였을지 모른다. 봄비 줄기차게 흩뿌리는 이삼월인데 春雨浪浪三二月 급작스런 병을 견디며 선방에서 일어나 앉는다 扶持暴病起禪房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을 물으려 해도 向生欲問西來意 다른 스님들이 행여 알까 두렵네 却恐他僧作擧揚 폭병(暴病)은 뜻하지 않은 병이라는 의미이다. 김시습은 간혹 아프긴 했지만 오랜 방랑으로 몸은 다져져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1491년 3월에 관동으로 돌아간 김시습은 1492년 가을에 서해안 명산을 돌아다녔다. 아마 단종의 초혼각이 있는 계룡산 동학사에서도 며칠 머물렀으리라. 이후 그는 무량사(無量寺)로 향하였다. 무량사는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산(570m) 기슭에 자리잡은 사찰이다. 김시습은 무량사에서 지희(智熙)선사를 만났다. 김시습과 지희는 옛 친구였다. 남효온이 지은 ‘표훈사(表訓寺 금강산 만폭동 萬瀑洞에 있는 절) 주지 지희(智熙) 스님께 드리다’ 시가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 DB, 추강집 제2권 /시(詩) ○오언고시 五言古詩)
1490년(성종 21) 9월에 김일손(1464∽1498)은 남효온(1454∽1492)과 함께 북한산 중흥사에서 머물고 있는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을 찾아갔다. 세 사람은 백운대에 오르고 담소하면서 5일 동안 함께 지냈다.10월에 김일손은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었고, 11월에는 진하사(進賀使)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에 갔다. 1489년 겨울 요동질정관(遼東質正官)으로 북경에 간 이후 두 번째 북경행이었다. 서장관(書狀官)은 정사와 부사를 보좌하며 사행의 기록과 보고를 담당하는 직임인데, 하급 관원에 대한 규찰을 담당하는 행
우리나라 전통 발효식품인 김치의 전문 인력 양성을 위한 김치 종합 교육의 장이 열립니다.세계김치연구소(소장 장해춘)는 광주김치타운에 김치의 최고 전문가를 양성하는 ‘제1기 김치 리더스 아카데미’를 신설하고, 오는 5월 말까지 수강생을 모집한다고 13일 밝혔습니다. 김치 리더스 아카데미는 김치명인 도전자와 김치산업계 리더를 대상으로 6월 9일부터 9월 22일까지 약 15주간 진행되며, 이번 교육은 △김치 역사·문화 및 정체성 △김치의 식품과학과 발효 △김치 품질분석법 △식품 안전 HACCP 위생교육 △김치 원·부재료 선별 및 전처리
1487년(성종 18) 9월에 김일손(1464∽1498)은 노모 봉양을 위해 진주 목학(晉州牧學) 교수를 청하여 나갔다. 나이 24세였다. 1488년 3월엔 진주목사 경태소등 21인과 촉석루에서 수계하고 서문을 지었다. 이어서 함양남계에 가서 일두 정여창(1450∽1504)을 만났다. 이즈음에 김일손은 함안에 사는 생육신 조려(趙旅 1420~1489)를 찾았다. 조려는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에서 태어났는데 1453년(단종 1)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그런데 1455년에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그는
1486년 10월에 김일손(1464∽1498)은 과거에 합격하였다. 그의 나이 24세였다. 김일손은 1482년에 준손, 기손 두 형과 함께 정시(庭試)에 나갔으나 일부러 병을 핑계대고 시험을 보지 않았다. 이때 두 형은 과거에 합격했다. 1483년에 김일손은 부친상을 당했고 1485년까지 상복을 입었다. 1486년 7월에 김일손은 초시, 8월에 복시에 합격했다. 9월에 식년 정시(式年 庭試) 초시에 수석 합격한 후에, 10월 복시에 책문 대중흥책에 제1등으로 합격하고, 전시 친현원간잠에 갑과 제2등으로 급제하였다. 그런데 김일손이
백호 임제의 『원생몽유록』의 마지막 부분이다. 조금 뒤에 범 같은 한 사나이가 뛰어 들어왔다. 신장이 몹시 크고 용맹이 절륜(絶倫)하며, 얼굴은 대춧빛 같고 눈은 샛별 같으며, 문산 (文山)의 의리와 중자(仲子)의 청렴을 지녀 위용이 늠름하므로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심을 불러일으켰다.문산(文山)은 송나라의 충신 문천상(文天祥 1236~1282)의 호이다. 그는 1276년에 송나라의 수도 임안(臨安)이 함락되자 단종(端宗 재위 1276~1277)을 받들고 근왕군(勤王軍) 1만 명을 이끌고 분전(奮戰)하였다. 하지만 그는 원나라 장군 장
임제의 『원생몽유록』은 계속된다. 네 번째 앉은 사람 이공(李公 이개)이 읊었다. 이내 몸은 본래부터 높고 큰 담력 가졌으니 微臣自有膽輪囷어찌 차마 목숨 훔치며 무도한 세상 볼 것인가 那忍偸生見喪淪죽으면서 남긴 시 한 수는 그 뜻 또한 좋으니 將死一詩言也善두 마음 가진 사람을 부끄럽게 할 수 있다네 可能慙愧二心人이개는 군기감(지금의 서울시청 앞) 형장으로 향하면서 시 한 수를 남겼다. 삶을 우(禹)의 구정(九鼎)처럼 중히 여겨야 할 경우는 삶 또한 중요하지만 禹鼎重時生亦大죽음도 기러기 털처럼 가벼이 보아야 할 경우는 죽음도 영화로세
백호 임제(林悌)의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을 계속 읽어보자.술이 몇 잔 돌았을 때 임금(단종)이 술잔을 잡고 목메어 흐느끼며 여섯 사람을 돌아보고 말했다. “경들은 어찌 각각 자신의 뜻을 말하여 원통함을 서술하지 않는가.” 여섯 사람은 “성상께서 먼저 노래를 지으시면 신들이 이어서 이루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임금이 초연(愀然)히 옷깃을 바로잡고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며 노래했다. 강 물결 오열하며 끝없이 흐르니 江波咽咽兮流無窮나의 한 길고 긺이 강물과 같구나 我恨長長兮與之同살아서는 제후의 나라 차지했더니 生有千乘죽어서는 외
백호 임제(林悌)의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은 『백호집』에 실려 있고, 남효온의 『추강집』에도 실려있다. “세상에 원자허(元子虛 원호를 말함)라는 사람이 있으니, 강개(慷慨)한 선비이다. 기개와 도량이 넓고 커서 시대에 용납되지 못했기 때문에 슬픔을 품고 가난을 견디어야 했다. 아침에 나가서 밭을 갈고 저물 때 돌아와서 옛사람의 글을 읽었다. 일찍이 역사서를 보다가 역대의 위태로워 망할 지경에 처하거나 국운이 옮겨 가거나 운세가 떠나가는 곳에 이르면, 일찍이 책을 덮고 눈물 흘리며 마치 자신이 그 시대에 처하여 망해 가는 것을 보
1481년에 김일손은 남효온과 함께 원주의 원호(元昊)를 배알하였다. 원호는 자는 자허(子虛), 호는 관란(觀瀾)·무항(霧巷)으로 생육신 중 한 사람이다. 그는 1423년(세종 5)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청관·현직(淸官顯職)을 지냈으며, 문종 때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황보 인·김종서 등 대신을 죽이고 정권을 잡게 되자, 병을 핑계로 고향인 원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1457년(세조 3)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자, 영월 서쪽에 집을 지어 이름을 관란재(觀瀾齋)라 하였다. 그는 아침저녁으로 영월
다시 길을 떠난다. 이번에는 생육신(生六臣) 순례이다. 1455년 윤 6월 11일에 세조가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했다. 1457년 6월에는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갔다. 4개월 후에 단종은 죽임을 당했다. 이러자 김시습(金時習)·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조려(趙旅)·성담수(成聃壽)·남효온(南孝溫)은 평생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았다. 1490년 가을에 김시습(1435∽1493)이 삼각산(지금의 북한산) 중흥사에 나타났다. 1483년에 김시습이 수락산에서 서울을 떠난 지 7년 만이었다. 이때 남효온(
무오사화(戊午士禍)의 희생자 사관(史官) 김일손(1464∼1498)의 호는 탁영(濯纓)이다. (1498년 7월에 일어난 무오사화는 조선 시대 4대 사화 중 최초의 사화이다. 무오사화는 사초(史草)로 인하여 화를 입었기 때문에 史禍(사화)라고도 불린다.) ‘탁영(濯纓)’은 ‘갓끈을 씻는다.’는 의미인데 이 단어는 굴원(BC 343∼ 278)이 지은 책 『초사(楚辭)』의 「어부사(漁父辭)」에 나온다. 굴원은 초나라 회왕을 도와 정치를 했으나, 간신의 참소로 호남성의 상수로 추방당했다. 쫓겨난 그는 상수 연못가를 거닐었는데 한 어부를 만
1512년(중종 7년) 6월 15일에 유순정·성희안 등이 여진족들의 난동 대책을 의계(議啓)하면서 유자광이 죽었다는 사실을 아뢰었다. “유자광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는 국가에 공로가 있는데 지금 그 자손들이 다른 곳에 나뉘어 귀양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유자광이 죽었으니, 청컨대 익대공신(翊戴功臣 예종 즉위년에 유자광이 남이의 모반 사건을 고발하여 받은 공신)의 작호를 도로 주어 자손들로 하여금 예장(禮葬)하게 함이 어떠합니까?” 이러자 중종은 “유자광은 공신의 예로 장사지내는 것이 가하다."고 전교하였다. (중종실록 1512년 6월
1508년 1월 15일에 일기청(日記廳:폐위된 임금의 일기를 편찬하는 임시 관청) 당상 성세명 등이 아뢰었다. "무오년(1498년) 사국(史局)의 일을 누설한 사람을 유자광에게 물으니, ‘이극돈의 말이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일은 사국(史局)에 관계되므로 처음에는 일기청에 내렸으나, 처벌 문제는 신들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니 조정 대신의 의견을 모아 죄를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중종은 ‘그리하라.’고 전교하였다.(중종실록 1508년 1월 15일 3번째 기사)1월 17일에 삼공(三公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이 이극돈에
1508년 4월 17일에 의금부가 아뢰었다.“유자광은 처음에 대간의 말에 의하여 내쫓았지마는, 석방하여 고향으로 돌려 보내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 자손도 모두 석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에 중종은 대신들과 의논하라 하였다.(중종실록 1508년 4월 17일 2번째 기사) 4월 21일에 대간이 유자광을 석방하지 말 것을 청했다. 하지만 중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중종실록 1508년 4월 21일 1번째 기사)이날 대간과 홍문관이 다시 아뢰었으나 중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중종실록 1508년 4월 21일 3번째 기사)4월 22일에도 대
1507년 6월 18일에 중종은 김종직 등의 적몰 가산을 돌려주도록 전교하였다. "지난 무오년에 죄를 입은 김종직·김일손·권오복·권경우·이목·허반·강겸 등의 적몰된 가산을 돌려주고, 그 때 추관(推官) 윤필상·노사신·한치형·유자광 등에게 상으로 주었던 가사(家舍)·토지·노비·반당(伴倘) 등 하사했던 물건들을 도로 거두어들이라."(중종실록 1507년 6월 18일 3번째 기사)7월 15일에 이조 정랑 김세필이 평해(平海 경북 울진군)에서 돌아와 유자광을 추국한 초사를 그대로 써서 아뢰었다. "지난 갑인년 11월에 어미의 상(喪)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