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극돈의 상소는 계속된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9일 2번째 기사)“이목(李穆 1471∼1498)이 국상(國喪) 초에 으뜸으로 벽불(闢佛)을 제창하여 소(疏)를 올렸는데, 많이 불경(不敬)하므로 전교하여 이르시기를 ‘27일 이후에 마땅히 묻겠다.’ 하셨는데, 마침 그날에 여러 정승과 육조가 다 빈청(賓廳)에 모였습니다. 좌중에서 사사로이 하는 말들이 ‘미친 아이의 일이라 족히 헤아릴 것이 못 된다.’ 하므로, 신은 ‘그렇지 않다. 대저 비록 여염의 소민이라도 서로 싸우고 꾸짖을 적에 혹시 말이 그 부모들에게 미치면 반드시
순종이 즉위한 4일 후인 7월 24일에 이토는 전격적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한일신협약을 제시하였다. 이에 이완용은 즉시 각의를 열어 일본 측 원안을 그대로 채택하고 순종의 재가를 얻은 뒤 7월 24일 밤에 이토의 사택에서 7개 조항의 신협약을 체결, 조인하였다. 한일신협약(정미 7조약)은 이렇다. “일본국 정부와 한국 정부는 속히 한국의 부강을 도모하고 한국 국민의 행복을 증진시키려는 목적으로 이하의 조관(條款)을 약정한다.제1조한국 정부는 시정(施政) 개선에 관하여 통감(統監)의 지도를 받을 것이다.제2조한
1498년 7월 19일에 이극돈(1435∼1503)이 사초와 관련하여 상소하였다. 이극돈의 상소문을 계속하여 읽어보자.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9일 2번째 기사) “병오년(1486년, 성종 17년)에 신이 윤필상·유지(柳輊)와 함께 시관이 되어 예조에 있는데, 김일손(1464∽1498)이 거자(擧子 과거를 보는 선비)가 되었습니다. 신은 본래 김일손이 문장에는 능하나 심술이 범람하다는 말을 듣고, 대작(代作)이 있을까 두려워 중장(中場)·종장(終場)의 제술을 모두 월대(月臺) 위에 두고 제술하게 했습니다. 고시하는 날이 되어
7월 19일 새벽 5시에 고종은 황태자에게 정사를 대리하도록 명했다. 이러자 황태자는 상소를 올려 대리 청정에 대한 명령을 취소할 것을 아뢰었다. 고종이 사양하지 말라고 하자, 황태자는 재차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고종은 더 이상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했다. 고종의 ‘대리 청정’ 조칙이 내려지자 이완용은 곧바로 ‘황제 대리’ 의식을 거행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의식을 주관하는 궁내부 대신 박영효가 병을 핑계로 대궐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이에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이 스스로 궁내부 대신 임시 서리가 되어 7월 20
1907년 7월 2일에 고종 황제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고종의 운명도 마지막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 기회에 고종을 폐위시키기로 작정했다. 7월 3일에 이토는 고종을 알현했다. 그 자리에서 이토는 일본에 대항하려면 공공연한 방법으로 하라고 말하면서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한 것은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라고 협박했다. 이러자 고종은 밀사를 파견한 적이 없다고 잡아뗐다. 경운궁에서 나오자마자 이토는 이완용과 송병준을 불러 고종을 폐위시키라고 지시하였다. 이날 밤 총리대신 이완용은 고종
1907년 7월 20일에 순종은 헤이그 밀사 이상설, 이위종, 이준 등을 처벌하라고 법부에 조령(詔令)을 내렸다. 8월 8일에 법부대신 조중응이 평리원 재판장의 선고문을 순종에게 보고했다. “이상설은 교형(絞刑)에 처하고, 피고 이위종과 피고 이준은 종신징역에 처하려 합니다. 이들은 체포한 다음에 형을 집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러자 순종은 윤허하였다. 이준은 헤이그에서 순국했으니 이상설과 이위종에 대해 알아보자. 먼저 이상설(1870∽1917)이다. 그는 1908년 2월, 미국으로 건너가서 1년 남짓 체류하며 외교활동을 계속
1907년 7월 14일 저녁 7시, 헤이그 특사 이준(1859∽1907)이 헤이그의 숙소인 바겐 스트라트(Wagen Straat) 124번지의 드융 호텔에서 갑자기 죽었다. 나이 48세였다. 헤이그 특사의 동향을 일일이 파악하고 있었던 헤이그의 일본공사관은 일본 외무성에 ‘한국 황제 밀사 이준 병사(病死) 건(件)’을 보고했고, 일본 외무성은 7월 17일 오후에 이토 통감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문서번호 : 내전(來電) 제149호 발신일 : 1907년 7월 17일 오후 4시 7분 동경 발(發) 발신자 : 진전(珍田) 외무차관 수신
1907년 7월 8일 밤, 각국 기자들 200명이 모인 국제협회에서의 이위종의 연설은 이어진다. “최근 간행된 책자에 따르면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산업은행에서 1천만엔(500만 달러)을 빌려다가 도로 건설, 수리 사업, 교육시설 건축을 위해 사용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대한제국의 실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일본 정부의 약탈적이며 이기적인 수법을 다 아는 사람들에게는 속이 다 들여 보이는 허구일 뿐입니다.1천만 엔을 빌려 온 것은 사실입니
1907년 7월 8일 저녁 이위종은 헤이그 국제협회에서 각국 기자들을 상대로 연설을 계속했다. “우리들은 일본이 부패한 관리들에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고, 만민에게는 정의를 구현하며, 행정 당국에게는 솔직한 조언을 해주리라 믿었습니다. 우리는 일본이 이 기회를 활용해 한국인에게 필요한 개혁을 잘 이끌어 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자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은 놀랍게도 야만적이고 이기적인 본성을 드러냈습니다. 일본이 제일 먼저 요구한 것은 이른바 ‘황무지(荒蕪地) 개척권’이었습니다.
1907년 7월 8일 밤에 약관 23세의 이위종은 언론인 클럽 ‘국제협회’에서 유창한 불어로 ‘대한제국을 위한 호소’ 연설을 하였다. 이 연설 서두에 그는 고종 정권의 부패 · 수탈 · 학정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미국과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 등에서 오랜 살았던 외교관 이위종은 ‘외국이 본 대한제국’에 대하여 무엇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영국의 기업가로 국회의원을 지낸 어니스트 해치는 1901년 무렵에 조선과 일본 그리고 청나라를 방문한 뒤 쓴 『극동의 인상 : 일본 ·코리아 ·중국』에서 조선 관료제의 부정적인 측면을 신랄하게 꼬집었다
1907년 7월 8일 밤에 이위종은 이상설과 함께 ‘국제협회(The Foundation of Internationalism)’에 초대되었다. 국제협회는 스태드가 베르타 폰 주트너 여사(1905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와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는 헤이그 시내에 있는 언론인 클럽이었다. 스태드는 세계 각국의 기자들 200명이 모인 가운데 이위종을 ‘프린스 이(이 왕자)’로 소개하였다. 이위종은 유창한 불어로 일제에게 외교권을 뺏긴 조국의 처지를 ‘대한제국을 위한 호소(A Plea for Korea)’란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연설은 이렇다.
1907년 7월 5일에 이위종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 앞에서 영국 언론인 윌리엄 스태드(Stead)와 기자회견을 가졌다. 스태드는 1898년 제1차 만국 평화회의 때는 신문기자로서 활약하였고, 제2차 만국 평화회의에서는 헤이그에서 발간되는 일간신문 「꾸리에 드 라 꽁페랑스」(Courrier de la Confèrence ‘만국평화회의보’) 편집자였다. 그런데 고종의 또 다른 특사 헐버트는 베를린에서 스태드를 미리 만나 한국의 처지를 호소하여 그의 협력을 얻는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스태드는 6월 30일 자 「꾸리에 드 라 꽁페랑스」
1907년 6월 29일에 헤이그 특사들은 러시아 수석대표이며 만국평화회의 의장인 넬리도프 백작을 방문하여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을사늑약을 체결 당한 사정을 설명하고 만국평화회의에 참가시켜 줄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넬리도프는 회의 참가에 대한 결정권이 형식상 초청국인 네덜란드 정부에 있다고 책임 회피하였다. 넬리도프는 러시아 정부로부터 한국 특사들의 회의장 입장을 거부하라는 훈령을 받은 상태였다. 이러자 헤이그 특사들은 네덜란드 외무성을 방문해 외무대신 후온데스의 면담을 요청했다. 하지만 후온데스는 ‘각국 정부가 이미 을사조약을 승인
# ‘을사오적’ 논쟁을사늑약은 ‘을사오적(박제순·이완용·이지용·이근택·권중현)’ 때문에 체결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을사늑약은 ‘을사오적’에게만 전적인 책임이 있는가? 이완용 등 오적은 1905년 12월 16일의 변명 상소에서 이렇게 해명했다. “조약의 이면을 따지지 않고 그날 밤의 사정도 모르면서 대뜸 신등 5인(人)을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이요, ‘나라를 그르친 역적’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만일 죄를 정부에 돌린다면 8인에게 모두 책임이 있는 것이지 어찌 꼭 5인만이 그 죄를 져야 한단 말입니까?”
1905년 12월 16일에 이완용 등은 상소를 이어갔다. “이때 한규설이 의자에 앉아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우는 모양을 지으니 이토 대사가 ‘어찌 울려고 합니까?’라고 말하였습니다. 한참 있다가 이재극이 돌아와서 고종의 칙령을 전하였습니다. 협상 문제에 관계된다면 지리하고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다. 또 법부대신 이하영은 약관 중에 첨삭할 곳은 일본 대사, 공사와 교섭해서 바르게 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각 대신 중 오직 한규설과 박제순이 가만히 있었고 나머지 대신들은 모두 자구(字句)를 첨삭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1905년 12월 16일, 을사오적의 상소는 계속된다. “우리 8인(人)이 일제히 물러나 나오는데 한규설과 박제순은 폐하의 명을 받들고 도로 들어가서 비밀리에 봉칙(奉勅)하고 잠시 후에 다시 나와 모두 휴게소에 모이니, 일본공사가 어전(御前)회의에서 어떻게 결정되었는가를 물었습니다. 한규설 : 우리 황상 폐하께서는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뜻으로 하교하셨으나, 우리들 8인은 모두 반대하는 뜻으로 복주(覆奏)하였습니다.일본공사 : 귀국(貴國)은 전제국(專制國)이니 황상 폐하의 대권(大權)으로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하교가 있었다면 나는
이완용 등은 1905년 12월 16일의 변명상소에서 ‘조약 체결의 전말’에 대하여 자세히 기술하였다. (고종실록 1905년 12월 16일) 11월 16일에 손탁호텔에서 이토와 대화, 11월 17일 오전 일본 공사관에서 일본공사와 연석회의, 그리고 오후에 중명전에서 고종과 대신들의 회의를 자세히 적었다. 여기에서 고종과 대신들의 회의 내용을 살펴보자. “고종 : 우선 늦추는 것이 좋겠다. 이완용 : 우리 여덟 사람이 막아내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일본대사가 폐하를 뵐 것을 굳이 청하는데 만약 폐하의 마음이 흔들리
1905년 12월 16일에 을사오적 즉 학부대신 이완용, 참정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 군부 대신 이근택이 장문의 변명 상소를 올렸다. 상소문을 읽어보자. “ 신들이 성조(聖朝)에 죄를 짓고 공손히 천토(天討)를 기다린 날도 여러 날이 되었는데, 신들이 버젓이 의정부에 있는 것은 염치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시국(時局)을 보건대 어찌할 수 없어서입니다.”이들은 조약을 체결하면서 반대 한 번 제대로 안 했으면서, 시국을 보건대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다니 참으로 파렴치하다.이어서 이완용 등 을사오적은 상
1905년 11월 17일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서울에 주재하던 외국 공사관은 하나 둘 철수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철수한 곳은 미국공사관이었다. 11월 24일 미국 국무부로부터 철수 통고를 받는 주한미국공사관은 11월 28일에 한국을 떠났다. 알렌 후임으로 1905년 3월 말에 임명된 미국 공사 모건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일본 공사 하야시와 축배를 들었는데 철수 시 고별인사 한마디 없이 떠났다. 주한미국공사관은 1882년에서 개관하여 23년 6개월 만에 철수했다. 미국 부영사 스트레이트는 이 모습을 ‘난파선에서 뛰어내리는 쥐 떼들
민영환이 자결한 다음 날인 12월 1일 특진관 조병세가 약을 먹고 순국했다. 향년 79세였다. 조병세는 가평 시골집에 추방되었으나 11월 30일에 다시 상경하여 12월 1일에 심순택, 이근명과 함께 을사늑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였다. "삼가 비지(批旨)를 받아보니, ‘이렇게 번거롭게 반복하는 것은 서로 면려하고 수성(修省)하는 것만 못하니 힘쓸 것은 자강에 있다.’고 하시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셨습니다. (...) 신들이 집에 물러가 있다 해도 근심에 휩싸여 통탄의 눈물을 흘릴 따름이며 문을 닫고 자결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