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11월 28일에 시종부 무관장(侍從府 武官長) 민영환 등이 을사늑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였다. "신들이 두 재상의 뒤를 따라 속히 역적들을 처단하고 강제 조약을 돌려보내는 일로 여러번 호소하였지만 아직 유음(兪音)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빨리 처분을 내려 매국 역적들을 처단하고, 강직하고 충성스런 신하를 외부대신으로 임명하여, 성명을 내고 회동하여 담판하게 하소서. 그래야 강제 체결된 조약이 폐지되고 나라가 보존될 것입니다."이러자 고종이 비답하였다. "이미 여러 번 칙유하였
1905년 11월 26일에 궁내부 특진관 조병세 등이 외부대신 박제순 등을 참형에 처하라고 상소하였다. ”아, 노예로 유린당할 참화가 목전에 닥쳐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고 백성들이 도륙당할 것이니, 아! 통분합니다. 외부대신 박제순의 죄를 어떻게 다 규탄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일을 주관하는 대신이 되었으면 설사 폐하가 윤허하며 조인하게 한다 해도 죽기로 간쟁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 신하된 직분을 다해야 옳은데 폐하의 뜻을 받들지 않고 제멋대로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이 어느 시대엔들 없었겠습니까만 이처럼 혹
1905년 11월 21일에 정2품 박기양이 을사늑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고 외부대신 박제순을 해임하라고 상소하였다. 하지만 고종은 외부대신 박제순을 해임하기는 커녕 11월 22일에 의정부 의정대신(議政大臣) 서리(署理) 업무까지 맡겼다. 박제순을 중용한 고종의 처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11월 23일에 원임 의정(原任議政) 조병세가 고종을 소견하였다. 을사늑약 체결 소식을 듣고 79세의 노구를 이끌고 경기도 가평에서 올라온 것이다. 그는 을사오적을 빨리 처단하라고 했다. 이러자 고종은 물러가서 건강이나 관리하라고 말했다.이어서
1905년 11월 21일에 는 1면에 「황성의무(皇城義務)」란 논설을 실었다.“어제 황성신문 기자가 일한신조약(日韓新條約)에 대하여 한황 폐하께서 이토 대사의 강청(强請)을 정대하고 명확하게 척절(斥絶 배척하고 거절)하신 칙어와 다수의 일본 병사가 궁궐에 난입하여 용탑(龍榻 임금이 앉고 눕는 침상)에 지척까지 다가와서 위협과 협박을 보인 행동과 이토대사가 참정대신(한규설)에게 공갈도 하고, 유세도 하는 등의 여러 가지 강압수단과 한참정이 그 조약에 날인을 하지 않은 일과 각 대신이 군부(君父)를 속이고
1905년 11월 20일 월요일 새벽에 이 경성 곳곳에 배포되었다. 신문에는 주필이자 사장인 장지연(1864~1921)이 쓴 사설 ‘오늘이 목 놓아 통곡할 날이요!(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와 ‘오건조약 청체전말 五件條約 請締顚末(5조약 체결 전말)’이 함께 실렸다. 먼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사설을 읽어보자.“지난번 이토 히로부미 후작이 내한 했을 때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 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자임하여 주선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나라의 독립
을사늑약이 체결된 다음 날인 1905년 11월 19일은 일요일이었다. 이날 궁내부 특진관 이근명이 상소를 올렸다. "신은 어제 정부가 조약을 체결한 일에 대해 너무나 놀랍고 의심스러워 줄곧 근심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 일이 얼마나 중대한 문제입니까? 조정에 물어서 협의하여 타당하게 처리하여야 할 것이었으나, 바로 한 밤중에 대궐에서 그 누가 알까 두려워하면서 부랴부랴 회의를 열어 이렇듯 체결하여 일을 크게 그르쳤습니다. 이것은 지금 모든 사람들의 울분을 터뜨렸을 뿐 아니라 실로 천하의 영원한 죄인으로 되었으며 또 국법으로 볼 때
# 을사 5조약 1905년 11월 18일 토요일 오전 1시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대한제국 측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측 하야시 공사가 조인한 늑약은 명칭도 붙이지 못했고, 조인 날짜는 11월 17일로 하였다. 1905년 11월 17일의 「고종실록」에는 을사늑약 체결 기록이 실려 있다. “한일협상 조약(韓日協商條約)이 체결되었다.일본국 정부와 한국 정부는 두 제국을 결합하는 이해공통주의(利害共通主義)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한국이 실지로 부강해졌다고 인정할 때까지 이 목적으로 아래에 열거한 조관(條款)을 약정한다.제1조일본국 정부는
1905년 11월 17일 늦은 밤, 이토는 대신들과의 찬반 문답이 끝나자, 궁내부 대신 이재극을 불러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폐하의 지시를 받아 각 대신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반대한다고 확실히 말한 사람은 오직 참정대신과 탁지부 대신뿐이다. 찬성 6인, 반대 2인으로 가결이 되었으니 주무 대신에게 지시를 내리시어 속히 조인(調印)하도록 주청해 달라.”고 말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가결을 선언하자, 참정대신 한규설은 의자에 앉아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우는 모양을 지었다. 이러자 이토가 제지하며 짜증스럽게 “어찌 울려고 합니까?”라
1905년 11월 17일 오후 8시에 이토 히로부미는 수옥헌(지금의 중명전)에서 회의를 주재하면서 여덟 대신에게 일일이 가부(可否)를 물었다. 먼저 참정대신 한규설과 탁지부 대신 민영기는 반대였다. 외부대신 박제순과 법부대신 이하영이 어정쩡한 발언을 하자 이토는 찬성으로 정리했다.이어서 이토는 학부대신 이완용에게 물었다. 이완용은 어전회의에서 자신이 한 발언을 대강 설명하고나서 말을 이어갔다. “이번 일본의 요구는 대세 상 부득이한 것이다. 종전에 우리 외교의 변화가 심했던 탓으로 일본은 두 차례나 큰 전쟁을 치렀다. 일본은 더 이
1905년 11월 17일 (금) 오후 4시경 시작된 어전회의는 7시가 넘어서 끝났다. 고종은 참정대신(총리) 한규설과 외부대신 박제순을 다시 불러 특별지시를 하였다. 잠시 후 대신들이 모두 휴게소에 모였다. 이때 하야시 일본 공사가 한규설에게 어전(御前) 회의 결과를 물었다. 한규설이 대답하기를, ‘폐하께서는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뜻으로 지시하셨으나, 우리 8인은 모두 반대하는 뜻으로 거듭 말하였습니다.’라고 태연히 대답하였다. 이는 중대한 협상을 앞두고 스스로 협상전략을 상대방에게 완전히 노출시킨 꼴이다. 일본은 회유와 협박까지
1905년 11월 16일 오후 4시에 이토 히로부미는 정부 대신과 원로대신들을 자신의 숙소인 손탁호텔로 불렀다. 어제 고종이 내각과 상의하라고 했으므로 정부 대신들을 직접 설득하기 위해서였다.손탁호텔은 독일 출신 여성 손탁(孫澤, 1854∼1925)이 운영한 호텔이다. 그녀는 1885년 10월 주한 러시아 공사 웨베르를 따라 내한하여 25년간(1885∼1909) 한국에서 생활했다.손탁은 웨베르 공사의 추천으로 궁내부(宮內府)에서 외국인 접대업무를 담당하면서 고종 및 민왕후와 친하였고, 고종은 1895년에 정동에 있는 한옥 한 채(현
고종은 외교권 이양은 매우 중대한 일인만큼 대신들의 의견을 묻고 백성들의 뜻도 살펴야겠다고 하면서 우회적으로 거절하였다. 이에 이토는 정부 대신들의 의견을 묻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전제 군주국가의 국왕이 백성들의 뜻을 살피겠다는 것은 인민을 선동하여 일본에 저항하려는 저의로 볼 수밖에 없다고 항의했다.이토 : 귀국은 전하의 친재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군주전제국이 아닙니까? 그리고 인민의 의향 운운이라 했지만 필시 이는 인민을 선동하여 일본의 제안에 반항을 시도하려는 생각이시라 추측됩니다. 요사이 유생 무리를 선동해서 상소하게
1905년 11월 15일 서울 정동 수옥헌(지금의 덕수궁 중명전), 오후 3시 부터 시작된 고종 황제와 이토 히로부미의 단독 면담은 2시간을 넘기고 있었다.이토가 건네준 협약 초안을 몇 번이나 살펴본 고종은 이토에게 외교 형식이라도 보존해 달라고 매달렸다.고종 : 일본 정부의 충언은 결코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다만 그 형식을 어느 정도 갖추는 데 경의 알선, 진력을 기대한다. 경이 짐의 절실한 희망을 귀 황실과 정부에 전하면 다소 변통을 볼 수 있지 않을까?그러나 이토는 잔인할 정도로 냉혹하게 거절했다.이토 : 본안은 더 이상
1905년 11월 15일 서울 정동 수옥헌(지금의 중명전)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독대한 고종은 이토의 말을 듣고 난 뒤 갑자기 사정 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고종 : 사명의 취지는 짐이 양해한다. 대외관계 위임에 관한 일은 결코 그것을 거부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바라는 것은, 귀국은 그 내용의 실질을 취하고, 우리에게는 그 형식의 명분을 보존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이토 : 형식이란 무슨 뜻인가요? 고종 : 서신 왕래의 일과 같은 것이다. 이토 : 무릇 외교에는 형식과 내용의 구별이 없습니다. 이제 이 책안 (策案)은 확고하여 움직일
이토는 ‘한국은 어떻게 해서 오늘에 생존할 수 있었는지, 또한 한국의 독립은 누구 덕택이었는지’를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이때 고종이 갑자기 끼어들면서 “그 점에 대하여는 짐도 잘 알고 있다. 1885년의 천진조약(天津條約),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과 함께 우리나라의 독립을 명확히 한 것은 완전히 일본의 힘에 의한 것으로서 실로 경(이토)의 다대한 노력에 힘입은 바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고종은 ‘조선이 독립국가가 된 것은 완전히 일본의 힘에 의한 것’이라고 한 발언은 치명적 실수였다. 이는 1904년 8월의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체결된 지 두 달 정도 된 11월 2일에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1841∽1909)는 메이지 천황의 부름을 받았다. 메이지 천황은 이토를 대한제국 특파대사(特派大使)로 임명했다. 이토는 메이지 천황의 친서를 가지고 11월 8일 오후 5시에 부산에 도착했다. 9일 오전에 이토는 대한제국 황실이 마련한 궁정 열차를 타고 경성으로 향했다. 오후 6시 20분 경성역에 도착한 이토는 정동의 손탁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그런데 11월 5일에 송병준이 주도한 일진회는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하는
1905년 10월 2일에 앨리스 일행이 부산에서 일본으로 떠난 후 고종은 민영환을 비롯한 몇몇 대신들과 비공식 모임을 열었다. 이 모임에선 1882년 5월 22일에 체결된 한미수호통상조약 제1관의 ‘거중조정’ 조항 즉 “만약 조약국의 어느 한쪽이 제3국으로부터 침략을 받을 경우 다른 한 국가는 원만한 타결을 가져오도록 주선을 다함으로써 우의를 표시하여야 한다.”는 조항이 집중적으로 논의되었다. 아울러 대한제국이 일본의 압박에서 벗어날 유일한 길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협력을 얻는 것뿐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고종 황제의 친서를 미국
1905년 9월 5일, 미국 사절단 80여 명은 상하이에서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단장인 육군장관 태프트 일행은 미국으로 돌아갔고, 루스벨트 대통령의 외동딸 앨리스 일행은 북경, 대한제국을 거쳐 일본으로 가는 일정을 계속했다.1905년 9월 17일 자 ‘대한매일신보’는 21세의 앨리스 루스벨트에 대해 소개했다.“그녀는 세계 최고국 귀한 공주다. 예사로움을 뛰어넘는 의지와 기개, 소탈하고 명랑한 자질과 깊고 고요한 학문은 일일이 논할 필요도 없이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 향기로운 수레가 머무는 곳과 공주가 청초하게 바라보는 곳에는 산천
1905년 1월 1일에 뤼순을 점령한 일본군은 3월에는 봉천을 점령했다. 러시아의 유일한 희망은 발틱 함대였다. 1904년 10월에 발트해를 출발한 발틱 함대는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7개월 만에 대한해협에 도착했다. 전투준비를 끝낸 일본연합 함대는 1905년 5월 27-28일에 대한해협에서 발틱 함대를 궤멸시켰다. 이순신을 가장 존경한다는 일본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의 압승이었다. 전 세계는 경악했다. 하지만 승자인 일본이나 패자인 러시아도 전쟁을 계속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일본은 전쟁을 수행할 능력과 재정이 고갈되었고, 러시
주한미국공사 알렌 (1858~1932)은 21년간 한국에서 근무한 한말외교사의 산 증인이자 친한파였다. 그는 1884년 갑신정변 때 절명 직전의 민영익을 살려내 고종의 어의(御醫)가 되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병원인 제중원 초대 원장이 되었다. 1887년 7월에 그는 주미전권공사 박정양과 함께 미국 워싱턴DC의 한국 공사관에서 일했다. 1890년에 조선에 돌아온 알렌은 미국공사관 서기관, 총영사, 대리 공사 등을 역임하고 1897년 7월에 전권공사가 되었다. 그는 1905년 3월 29일에 해임되어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1908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