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 11월 27일에 고종 황제는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에서 정환덕이라는 역술가를 만났다. 그는 경상도 영양 사람으로 40세가 되도록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자 어려서부터 공부했던 역술로 출세하고자 서울로 올라왔다. 정환덕이 역술에 통달한 사람이라고 널리 알려지자 경운궁 전화과장(電話課長) 이재찬이 고종에게 그를 추천했다. 당시 정환덕은 나이가 40밖에 안 되었는데 머리가 백발이었다. 고종은 첫 질문으로 ‘어쩌다가 40세에 벌써 백발이 됐는지’를 물었다. 이어서 고종은 정말 알고 싶은 것을 질문했다.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50
1904년 12월 31일에 신기선이 올린 세 번째 사직 상소는 계속된다. “백성들의 원한이 극도에 이르렀으나 하소연할 데가 없게 되었고, 그것이 처음 변란인 임술년(1862)의 소요를 초래하였고 두 번째 변란으로 갑오년(1894)의 난리를 초래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나라에서는 비로소 개혁을 도모하며 유신(維新)을 표방하였습니다.그러나 오랫동안 이루어진 버릇이 고쳐지지 않았고 인심은 날이 갈수록 엷어지고 있습니다. 대소 관리들은 전날보다 몇 곱절 더 제 이익만 채우며 공적인 것을 모두 잊고 폐하를 속이며 법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1904년 11월 25일에 신기선은 다시 사직 상소를 올렸다. "신은 재주도 없으면서 외람되게 있지 말아야 할 자리를 차지하고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일을 일답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줄곧 녹봉만 축냈습니다. (...) 많은 재앙이 겹치고 심상치 않은 변고를 당한 때에 크게 개혁하고 크게 분발하지 않고서는 불길에 휩싸이고 물속에 빠진 것을 구출해서 소생시켜 낼 수 없는데, 지극히 어리석고 용렬하여 이미 일을 망쳐놓은 신이 구차하게 벼슬을 하고 있으니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미 지은 죄는 피할 수 없습니다. 그간 상사(喪事)를 만나
1904년 9월 2일, 신기선의 사직 상소는 계속된다. “신이 반복하여 생각해 보건대, 뇌물을 근절하지 못하는 것은 대궐이 엄숙하고 깨끗하지 못한 때문이며, 대궐이 엄숙하고 깨끗하지 못한 것은 경연(經筵)을 오랫동안 폐지하고 정사를 직접 처결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신이 말한 경연에 대한 논의는 곧 옛사람들이 성인의 학문에 힘쓰는 것을 말합니다. 면성학(勉聖學) 세 글자는 수천 년 동안 틀에 박힌 말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싫도록 들은 것입니다. (...) 폐하께서는 갑오경장 후부터는 경연을 영영 폐지하여 버린
1904년 9월 2일, 신기선의 사직 상소는 계속된다. “아! 나라를 망하게 만드는 정사가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뇌물처럼 가장 혹독한 것은 없습니다. 대저 뇌물은 무엇에 쓰이는 것입니까? 내탕고(內帑庫)에 보태어 나라의 비용을 넉넉히 만들자는 것이 아닙니까? 아! 어찌 이다지도 생각의 모자람이 심합니까? 뇌물로 벼슬을 얻은 자들은 모두 하찮은 무리들로서 나라와 백성이 무엇인지 모르니 정사가 무엇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부임하여 백성들을 다스리며 부지런히 하는 일이란 오로지 공전(公錢)을 도적질하고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해서 뇌물로
1904년 7월 15일에 안종덕은 고종 정권이 ‘청렴, 근면하지 않고 공정하지도 않으며 신뢰도 잃었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로부터 한 달이 지난 8월 22일에 고문정치가 시작되었다. 고종은 재정 고문에 일본인 메카다, 외교 고문에 미국인 스티븐스를 임명했다. 이로써 일본은 대한제국의 재정권과 외교권을 침식하기에 이르렀다. 8월 28일에 철도원(鐵道院) 총재 신기선이 의정부 참정(參政 총리)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5일 후인 9월 2일에 신기선이 사직 상소를 올렸다."(전략) 현재 온몸과 터럭들까지 다 병들어 단 한 점의 살점도 성한
1904년 2월 23일에 외부대신 임시서리 이지용과 주한 일본 공사 하야시 곤노스께 간에 6개 조의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가 체결되었다. 한일의정서 제1조에는 “한일 양국 사이의 항구적이고 변함없는 친교를 유지하고 동양(東洋)의 평화를 확고히 이룩하기 위하여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 정부를 확고히 믿고 시정(施政) 개선에 관한 충고를 받아들인다.”고 규정하였다. 5월 말에 일본 각의는 ‘대한 방침(對韓方針)’과 ‘대한 시설강령’등을 잇따라 채택하였다. 여기에는 (1) 한국 내 일본군의 영향력 확대, (2) 재정권 장악, (3) 외
1904년 2월 8일에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2월 23일에 한일의정서를 체결한 일본은 4월에는 전보사와 우체총사를 접수하고 군기 누설 예방 명목으로 전보 검열을 실시했다. 5월 초순에 러일전쟁에서 승전하고 있는 일본은 고종을 압박하기 위해 궁궐 숙청을 단행했다. 내관들을 다수 파면하고 황제 알현은 대신과 협판에 한정시키는 등 고종을 근왕 세력들로부터 완전히 고립시키고자 했다.또한 전라도·경상도·강원도 연해 어업권에 이어 전쟁 중인 일본군에 신선한 생선을 공급한다는 명목으로 평안도 · 황해도 · 충청도 3도 연해 어업권 등 각종 이권
안종덕의 상소는 이어진다.“외교의 경우에는 신의가 더욱 중요합니다. 항간의 보통 사람들도 신의가 없이는 교제를 하지 못하는데 더구나 나라와 나라 간에 교제를 하는 경우야 더욱 그렇습니다. 지금 세계가 어지러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우리 대한제국은 피폐하여 무력과 재력을 가지고선 겨루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오직 지켜야 할 것은 신의뿐인데 신의란 스스로 세우는 것입니다.돌아보건대, 우리는 삼천리 강토와 500년 왕업을 가지고 가만히 앉아 독립 자주권을 잃고 있으며, 세력을 믿고 달래며 위협하는 자들의 말을 고분고분 듣고 있습니다
중추원 의관 안종덕의 상소는 신의(信義)로 이어진다. “지금 폐하께서는 신의를 좋아하지만 주변의 신하들은 속이는 것이 버릇이 되었고 중앙과 지방에서는 유언비어가 떼지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애통조서(哀痛詔書)를 여러 번 내렸으나 온 나라가 감격하는 효과가 없고, 엄격한 칙서(勅書)를 자주 내렸으나 탐관오리들이 조심하는 기미가 없습니다. 이것이 무엇 때문이겠습니까?신은 폐하의 신의가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신의가 없으면 사람의 도리가 서지 못하고 신의가 없으면 하늘의 도리가 시행되지 않습니다. 신의가 없으면
1904년 7월 15일, 안종덕의 상소는 공정에 이른다. “지금 폐하는 공정한 것을 좋아하나 조정에는 사리사욕이 넘쳐나고, 관리들 간에는 당(黨)이 갈라졌으며, 벼슬을 얻어 나가려는 자들은 대궐 안의 비호 세력과 결탁하고, 세력에 끼려는 자들은 외세에 의지합니다. 재주도 없이 턱없는 과분한 벼슬을 지내는 것은 모두 세도 있는 집안의 인척들이고, 죄를 지고도 요행수로 면하는 것은 모두 권세 있는 가문의 청탁 결과입니다. 임용해야 할 벼슬자리가 있으면 비천한 자들을 사대부들보다 먼저 앉히며, 이익을 얻을 수 있으면 도적보다 더 심하게
고종이 염근공신을 칙유한 지 두 달 정도 된 1904년 7월 15일에 중추원 의관(議官) 안종덕이 ‘조정이 청렴, 근면, 공정하지도 않고 신의도 없음’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 "5월 21일에 내린 칙서(勅書)를 삼가 보니, 빛나는 586자의 말은 간곡하기 그지없고 엄정하면서도 측은하게 여긴 것이었는데, 자신을 반성하고 자책하며 신하들을 신칙(申飭)한 내용은 마치 해와 달처럼 밝고 쇠나 돌처럼 확고한 것이었습니다. ...대체로 청렴이라는 것은 의리와 예의의 틀이고, 근면이라는 것은 지식과 행동의 용기입니다. 공정이라는 것은 어진
1904년 2월에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예상을 뒤엎고 일본은 러시아를 이기고 있었다. 5월 21일에 고종은 관리들과 백성들에게 칙유(勅諭)하였다. "짐(朕)이 생각하건대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는 백성들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다. 관청을 세우고 직무를 나누며, 어진 사람을 선발하고 유능한 사람을 임용하는 것은 오직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 온 나라의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있게 하는 도리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청렴과 근면, 공정과 신의에 있을 뿐이다. 청렴하게 백성들을 다스리면 백성들이 재산을 산처럼
1904년 2월 8일 밤, 일본 해군은 중국 여순항에 있는 러시아의 극동 함대를 기습공격했다. 2월 9일에는 제물포에 정박한 러시아 전함 두 척을 침몰시켰다. 이 날 일본군은 인천을 통해 서울에 들어왔다. 한양 도성 사람들은 도망치고 구중궁궐도 텅 비었으며 조정 대신들도 숨기에 바빴다.2월 10일에 일본은 러시아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했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는 고종을 위협하여 2월 23일에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다. 체결과정을 살펴보자. 1903년 10월부터 하야시는 이를 추진했다. 하야시는 정부 고관들의 협조
서울시 광화문 교보빌딩 앞 도로변 모서리에 있는 비각을 찬찬히 보았다. 비각에는 ‘기념비전’ 현판이 붙어 있고, ‘기념비전’ 현판 글씨 오른편 위에는 ‘헌필(獻筆)’, 왼편에는 ‘광무 6년 임인 9월’이라고 적혀 있다. 광무 6년이면 1902년이다. 비각 정면에는 ‘만세문’이 있고, 그 양옆에는 해치상이다. 비각 오른편에는 ‘서울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高宗 御極 四十年 稱慶紀念碑)’라고 적힌 안내판이 있다.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는 1903년 9월 2일에 세워졌다. 비석 앞면의 전액(篆額)은 황태자 순종의 글씨로 ‘大
1903년 1월의 군함 양무호 구매는 국방비리, 국제 사기 사건이었다. 일본 미쓰이 물산이 구입한 25만 엔보다 두 배나 비싼 55만 엔(지금 시세로 약 440억원)에 샀는데, 이는 국가 예산의 10.2%, 군부 예산의 26.7%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그런데 너무나 어이없는 것은 해군 병사 1명도 없이 군함부터 샀다는 사실이다. 그 단서가 1903년 7월 29일의 ‘고종실록’에 나온다. 이날 군부대신 윤웅렬이 사직 상소를 냈다. 7월 17일에 임명된 지 12일 만이었다. "신이 사직을 청하는 마당에 군무(軍務)에 대해 함부로 논해
1903년 4월15일, 제물포에 대한제국 최초의 군함이 입항했다. 군함은 입항 전부터 관심이었다. 2월 9일에 '황성신문'은 특종 기사를 실었다. “소문을 들은즉, 정부가 일본인과 계약하고 군함 한 척을 구입한다는데, 그 가격은 50여 만원이라 하고 신품 여부와 톤수는 아직 모른다더라.” 군함은 이미 1903년 1월 25일에 군부대신 신기선이 일본 미쓰이물산과 군함 도입계약을 완료한 상태였다.3월 18일에 황성신문은 “황제 폐하가 군함을 '양무(揚武)'라고 명명했다. 배 이름은 카치다테마루(勝立丸), 총톤수 3435t에 263마력짜
1902년 가을에 콜레라가 전국에 퍼졌다. 원산에서 윤치호는 1902년 9월 1일과 7일 일기에서 이렇게 적었다.“9월 1일(음력 7월 29일) 월요일, 흐림.중국 북부지방에서 일어난 의화단 사건이 남긴 유산 중 하나는 콜레라다. 콜레라는 의주를 통해 조선으로 침투하였다. 진남포는 콜레라에 감염된 것 같다. 그것도 심하게 말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콜레라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고 한다. 원산은 큰 위험지역이다. 사람들은 콜레라를 두려워하는 것 같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장 간단한 위생 규칙을 준수하게 만드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1902년 5월 27일에 고종은 함녕전에서 기로소 당상(耆老所 堂上)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고종실록 1902년 5월 27일 1번째 기사)참석자는 황태자와 영왕, 의정 심순택, 특진관 조병세, 영돈녕 원사 윤용선, 기로소 당상 조병식·이순익·서상우·이용원 등이었다. 연회에는 술과 과일, 음식 등이 나왔고, 악공들이 연주하고 무동(舞童)들이 춤을 추었다. 이어서 고종은 기로소에서 연회를 베풀 것을 명했다. "기로소의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나머지 음식을 가지고 가서 기로소에서 연회를 벌이게 하라." (고종실록 1902년 5월 27
1902년 4월 2일에 황태자가 상소하여 기로소(耆老所)에 들 것을 청했다. "우리 왕조의 기사(耆社)의 예법은 또 경사스러운 의식 중에서도 성대한 것입니다. 이 예법은 우리 왕조 초기에 처음 생겼는데 숙종과 영조 두 훌륭한 임금이 그것을 계승하였는데 이것도 보기 드문 일입니다. (중략) 올해는 바로 폐하께서 51세가 되는 경사로운 해로서 이 해에 영조가 이미 시행한 규례를 그대로 시행하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떳떳한 법이며 국조(國朝)의 전고(典故)에도 근거할 만한 의식 절차가 있으므로 소자의 청을 기다릴 것도 없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