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강원도 영월군에 있는 장릉(莊陵)을 답사했다. 높은 언덕 위에 비운의 왕 단종은 외롭게 누워있다. 한(恨) 많은 귀촉도(歸蜀道) 한마리가 슬피 울고 있다. 난간석과 무인석도 없고, 도성에서 100여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왕릉 조성 규정도 적용되지 않았다. 장릉이 원래 영월 호장 엄흥도(嚴興道)가 암장(暗葬)한 자리였기에 그랬으리라.

사진=장릉

1457년에 엄흥도가 단종을 암장하고 사라진 지 59년이 되는 중종 11년(1516년) 11월 22일에 중종은 “노산의 묘소에 관원을 보내 치제한 다음, 분묘를 수축하도록 하라”고 전교했다.

12월 10일에 우승지 신상(申鏛)을 보내 노산군의 묘에 치제했다.

이 날의 중종실록이다.

“우승지 신상을 보내 노산군의 묘에 치제(致祭)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미 수호군(守護軍)을 정했고 또 내신(內臣)을 보내 치제하였으니, 이는 어진 덕으로서 또한 족히 외로운 영혼을 위로할 수 있는 일이나, 유독 후사(後嗣) 세우는 일을 빼놓으니 사림들의 애통이 심했는데, 간사한 의논이 김응기(金應箕)에게서 발단되고 이맥에게서 확대되었던 것이다.

또 논한다. 신상이 와서 복명하고, 김안국과 함께 말하다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며 ‘묘는 영월군 서쪽 5리 길 곁에 있는데 높이가 겨우 두 자쯤 되고, 여러 무덤이 곁에 총총했으나 고을 사람들이 군왕의 묘라 부르므로 비록 어린이들이라도 식별할 수 있었고, 사람들 말이 「당초 돌아갔을 때 온 고을이 황급하였는데, 고을 아전 엄흥도란 사람이 찾아가 곡하고 관을 갖추어 장사했다.」 하며, 고을 사람들이 지금도 슬프게 여긴다.’ 하였다.”

그런데 노산군 묘는 중종 11년(1516년)에 치제한 이후 1541년에 영월군수 박충원(1507∼1581)이 노산군 묘를 찾을 때 까지 25년간이나 방치되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그 단서가 하나 있다. 1539년 윤 7월 5일에 한산군수 이약빙이 노산군과 연산군의 묘소를 복원하고 후사 세우기를 상소했으나, 대신들이 간사한 의논을 꺼냈다하여 이약빙을 죄주라고 청했던 것이다. (중종실록 1539년 윤 7월5일∼7월13일)

1541년에 박충원이 영월군수로 부임했다. 이때에 전임 군수 7명이 연이어 부임 첫날밤에 갑자기 죽어 민심이 흉흉했다.

부임 첫날밤에 박충원은 의관을 정제한 채 동헌에 불을 밝혔는데, 과연 혼령이 나타났다. 박충원은 침착하게 혼령이 단종임을 알아보고 “전하, 이 누추한 곳에 어인 행차이시나이까?”라고 물으니 단종은 자신의 묘에 제사를 지내주면 큰 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튿날 박충원은 관속들을 풀어 엄흥도의 친척을 찾아냈다. 그리고 동을지산으로 가서 가시넝쿨에 쌓인 묘를 찾아내어 봉축하고 제를 지냈다.

제문은 이렇다. “왕실의 맏이요, 어리신 임금이시여, 비색(否塞)한 운수를 당하시어 바깥 고을 청산에 만고의 고혼(孤魂)으로 누워계시나이다. 바라건대 강림하시어 제수를 흠향하소서.”(연려실기술, 단종조 고사본말)

1681년에 이르러 노산군은 노산대군으로 추봉됐고, 1698년(숙종 24년) 11월6일에 숙종은 노산대군을 단종(端宗)으로 추상(追上)하고, 능호(陵號)를 장릉(莊陵)이라 했다. 1)

사진=장릉 제각과 단종비각

한편 장릉을 내려와서 홍살문을 지나니 ‘엄흥도 정려각’이 있다. 이 비각은 엄흥도의 충절을 알리기 위해 영조 2년(1726)에 세운 것이다. 정려비 위 편액에는 ‘조선충신 영월부 호장, 증 자헌대부 공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엄흥도 지문’이라고 새겨져 있다.

사진=엄흥도/ 정려각

 

장릉 입구에는 ‘낙촌비각’이 있다. 이 비각은 박충원의 충신 됨을 후세에 널리 알리기 위해 1973년에 세운 것이다.

사진=낙촌비각

이어서 단종 역사관에 들렀다. 단종에 대한 자료가 여러 가지 전시되어 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단종과 무속신앙’이다. 단종은 영월 태백 정선 지역 등에서 민간 수호신으로 받들어져 있다.

사진=단종 역사관
사진=단종과 무속신앙

실제로 필자가 몇 년 전에 가본 1567미터 태백산 정상에는 ‘단종비각’이 있다. 단종이 태백산 신령으로 추앙을 받고 있는 징표이다. 이렇게 단종은 전설의 세계로 들어가 백성들의 가슴 속에 남았다.

사진=태백산 정상에 있는 단종비각

한편 2007년부터 영월군은 단종문화제 때 단종 국장(國葬) 행사를 재현하고 있다.

1) 묘호(廟號)는 단종(端宗)이라 하니, 예(禮)를 지키고 의(義)를 잡음을 단(端)이라 한다. (숙종실록 1698년 11월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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