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강원도 영월 장릉(莊陵 단종 묘)을 내려와 홍살문을 지나니 장판옥이 있다. 3칸 건물이다. 여기엔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 32인의 위패와 조사위(朝士位) 186인, 환관위(宦官位) 44인, 여인위(女人位) 6명 등 모두 268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장판옥 앞에는 배식단(配食壇)이다. 이곳은 268명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제사를 지내는 제단인데 영월군은 매년 한식(寒食)에 단종 제례(강원도 무형문화재 제22호)를 지낸다.

사진=장판옥과 배식단 전경
사진=장판옥 건물 전경

1791년(정조 15) 2월21일에 정조는 장릉에 배식단을 세우고 추향할 사람을 정했고 (정조실록 1791년 2월21일 1,2번째 기사), 단종에게 충절 한 여러 신하의 배향에 대한 교서를 내렸다. (홍재전서 제60권/ 잡저 7)

육신(六臣)의 일은 감히 소상히 밝히지는 못하겠으나, 세조께서 내리신 교서에서 “후세의 충신이다.”하였고, 또 영양위(寧陽尉 단종의 매형 정종의 봉호) 집의 일을 논하면서, “난신(亂臣)으로 논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니, 장하도다, 그 훈모(訓謨)여. 일성(日星)처럼 환히 빛나 권도(權道)를 달관하고 경법(經法)을 부지한 성인의 깊은 뜻을 우러를 수 있으니, 이것을 선양하고 발휘할 자야말로 어찌 후인인 내가 아니겠는가.

정조는 교서의 첫머리에서 세조가 사육신을 ‘후세의 충신’이라고 한 것부터 언급한다.

지난번 연로(輦路)에 민절사(愍節祠, 노량진 사육신 사당, 지금의 의절사) 앞을 지나다가 끝없이 감회가 일어나서 예관을 보내어 유제(侑祭)하였다.

이어 금성대군 등 여러 사람을 영월의 창절사(彰節祠)에 추가 배향하고 싶어서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명산에 비장하여 둔 사책(史冊)들을 받들어 상고하도록 한바, 사관이 복명하던 날 강원도 관찰사가 자규루(子規樓) 옛터의 형지(形止)를 찾았다고 계문(啓聞)하였다.

공교롭게도 일이 일시에 이루어져서 마치 오늘날을 기다렸던 것처럼 되었으니, 이치에는 거짓이 있지 않구나. 아, 기이하고도 이상하도다.

(중략) 지난 숙종 무인년(1698, 숙종24) 장릉을 복위할 적에 조정 신하들이 육신의 사당이 정자각(丁字閣)에 너무 가깝다고 말하므로, 두보(杜甫) 시(詩)의, “무후의 사당은 영원히 가까이 있도다.[武侯祠屋長隣近]”라는 구절을 인용하며 헐지 말라고 명하였으나, 거센 반대 논의로 인하여 마침내 옮기고 말았다. 이것이 어찌 모자라는 처사이자 잘못된 전례(典禮)가 아니었겠는가. (중략) 매년 한식(寒食)에 제향을 하되, 고을 원으로 하여금 집 한 칸을 세워 위판을 간직하여서 일체로 제사 지내는 이 뜻을 부치도록 하노라. (후략)

정조는 배식단을 정단(正壇)과 별단(別壇)으로 구분하고, 정단에는 충신 32명을 모시고, 별단에는 236명을 모셨다.

먼저 정단에 배식된 32명의 명단이다. 안평대군(세종의 셋째 아들), 금성대군(세종의 여섯 째 아들), 화의군, 한남군, 영풍군, 이양 등 6종영과 송현수(단종 비 정수왕후의 아버지), 권자신(단종의 외삼촌), 정종(단종의 매형), 권완(단종 후궁 숙의 권씨의 아버지) 등 네 외척, 게유정난으로 죽은 황보인 · 김종서 · 정분 삼상신(三相臣), 민신 · 조극관 · 김문기 삼중신(三重臣), 성승(성삼문의 아버지) · 박쟁 양운검(兩雲劒), 박중림 (박팽년의 아버지), 성삼문 · 박팽년 ·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사육신, 그리고 하백(하위지의 아들), 허후, 허조, 박계우, 순흥부사 이보흠, 정효전, 영월부 호장 엄흥도였다. 1)

사진=장판옥에 있는 충신위 위패(32명)

정조는 32명 충신의 신위(神位)에 다음과 같이 고했다.

예로는 함께 제향되어야 하고 禮䙡與享

의로는 묘정(廟庭)에 배향되어야 하니 義取配庭

서른 명 남짓한 사람이 餘三十人

해와 별처럼 밝게 빛나도다. 炳烺日星

갈사가 먼 것을 꺼려서 嫌遠葛祠

가까이 있는 모옥으로 나아가니 就近茅屋

서로 돌아보며 흠향함이 相將顧歆

매년 한식 때일세 每年寒食

임금과 신하를 일체로 제향하여 一體君臣

위에는 각이고 아래는 단이니 上閣下壇

천추만세에 이르도록 萬歲千秋

길이 옥란을 보호하소서. 長護玉欄

한편 정조실록을 보면 당초 31명이었는데 대신들과의 논의과정에서 엄흥도가 추가되었다.

“아, 죽음을 각오하고 의리를 떨쳐서 장사를 지내는 일에 힘을 다한 사람은 오직 엄 호장 한 사람인데, 어찌 순절한 사람의 반열에 끼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혼자만 배향에서 누락시킬 수 있겠는가. 엄흥도는 31인의 다음 순서에 두도록 하라.”

특이한 점은 김시습 · 남효온 등 생육신은 배식단 명단에 빠져 있는 점이다. 정조는 “고(故) 처사 김시습, 태학생 남효온의 맑은 기풍과 굳은 지조는 백세를 격려할 만한데도 이 사당의 제향 대상에서 빠졌으니 이는 미처 생각지 못한 아주 큰 결례이다. 이 두 신하를 똑같이 창절사에 배향할 것을 예조에 알리라.”고 지시했다. 2)

1) 이들은 1453년 계유정난, 1455년 세조의 왕위찬탈 옹1456년 단종복위 사건, 1457년 금성대군의 거사와 관련된 인물들이다.

한남군(漢南君)은 세종의 넷째 왕자이고 영풍군(永豐君)은 세종의 여덟째 왕자인데, 모두 혜빈 양씨(늘 단종에게 젖을 먹였다) 소생이다.

2) 1685년에 단종 묘 근처에 성삼문 등 육신을 기리는 육신사(六臣祠)가 세워졌다. 숙종은 1703년에 육신사에 ‘창절(彰節)’을 사액하였다. 창절사에는 1791년(정조15)에는 김시습과 남효온, 1828년에는 박심문, 1833년에는 엄흥도가 추가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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