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칼럼니스트] 1498년(연산군 4년) 7월1일자 연산군일기를 다시 읽어보자.

파평부원군 윤필상, 선성부원군 노사신, 우의정 한치형, 무령군 유자광이 차비문(差備門)에 나아가서 비사(秘事 밖으로 드러내지 말아야 할 일)를 아뢰기를 청하고, 도승지 신수근으로 출납을 관장하게 하니 사관(史官)도 참예하지를 못했다. 그러자 검열 이사공이 참예하기를 청하니, 신수근은 말하기를 ‘참예하여 들을 필요가 없다.’ 하였다. (후략)

출납을 관장한 도승지 신수근(1450∽1504)은 연산군의 큰 처남이었다. 1) 그런데 신수근이 도승지가 될 적에 대간과 시종들이 외척이 권세를 잡을 조짐이라고 하면서 강력히 불가함을 아뢰었으므로, 신수근이 원망을 품고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대간들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으니, 우리들은 무엇을 하겠느냐.’ 하였다. 2)

사진=창덕궁 희정당 앞마당. 희정당 현판이 보인다.

실제로 도승지 신수근은 7월9일에 홍문관의 상소로 인해 사직을 청했다. (1498년 7월9일자 연산군일기)

도승지 신수근이 아뢰기를, “신이 지금 홍문관의 상소를 본즉, 지금 지진의 변에 대하여 ‘유독 갑자기 승진하고 섞여 진출하여 맞지도 않는 자리에 오래 있는 것이, 어찌 외척(外戚)이 전횡하는 사단이 아니겠습니까.’ 하였으니, 이는 신을 지목하여 말한 것입니다. 청컨대 신의 직책을 파면시켜 주옵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홍문관의 나이 젊은 무리들이 한갓 옛사람들이 한 말만을 보고서 그와 같이 말한 것이다. 전일의 뇌변(雷變)도 역시 재상이 정사를 잘못한 소치라고 하였는데, 어찌 그렇겠느냐. 경(卿)은 부디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한편 도승지 신수근(정3품)은 사관인 검열(정9품) 이사공의 참예를 막았다. 검열 이사공이 참예하기를 청하니, 신수근은 말하기를 ‘참예하여 들을 필요가 없다.’ 하였다. 3)

사진=창덕궁 희정당 안내판

연산군 시대는 성종시대와 판이했다. 호학군주 성종시대에는 사관은 거리낌 없이 국왕·대신의 모든 언동·정사·인물평 및 비밀스런 회동 등에 참예하여 그 일들을 기록할 수 있었다. 4)

그런데 연산군 시대는 도승지가 사관의 출입을 막고 있었고 역사는 거꾸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기야 조선 시대 초부터 사관은 편전 출입이 쉽지 않았다. 이럼에도 사관들은 직필을 위해 기개를 폈다. 대표적인 인물이 태종 때의 사관 (史官) 민인생이다.

1401년(태종1) 4월29일자 태종실록을 살펴보자.

편전(便殿)에서 정사(政事)를 보았다. 사관 민인생이 들어오려고 하므로, 도승지 박석명이 말리면서 말하기를, "어제 홍여강이 섬돌 아래까지 들어왔었는데, 주상께서 말씀하시기를, ‘무일전(無逸殿) 같은 곳이면 사관이 마땅히 들어와야 하지마는, 편전에는 들어오지 말라.’고 하시었다." 하였다.

그러나 민인생은 일찍이 전지(傳旨)가 없었으므로 끝까지 우겨 마침내 뜰로 들어왔다. 그러자 임금이 그를 보고 "어찌하여 사관이 들어왔는가?" 하니, 민인생이 대답하기를, "전일에 문하부(門下府)에서 사관이 좌우에 입시하기를 청하여 윤허하시었습니다. 신이 그 때문에 들어왔습니다." 하였다.

태종은 조금 목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편전에는 들어오지 말라."하였다. 그러자 민인생은 "비록 편전이라 하더라도, 대신이 일을 아뢰는 것과 경연에서 강론하는 것을 신 등이 만일 들어오지 못한다면 어떻게 갖추어 기록하겠습니까?" 라고 말했다.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이곳은 내가 편안히 쉬는 곳이니, 들어오지 않는 것이 가하다." 하고, 또 말하기를, "사필(史筆)은 곧게 써야 한다. 비록 대궐 밖에 있더라도 어찌 내 말을 듣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민인생이 대답하였다. "신이 만일 곧게 쓰지 않는다면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기개인가? 역사의 붓 자루를 쥔 사관이 임금에게 그것도 태종 이방원에게 ‘사관위에는 하늘이 있다’고 하면서 사필(史筆)하려 했으니.

이후에도 사관 민인생은 태종의 사냥터에도 찾아가고 태종이 앉아 있던 편전을 문 밖에서 엿보고, 휘장을 걷고 보는 등 사관으로서의 직무를 다했다. 그러나 민인생은 여러 번 예(禮)를 잃었다하여 탄핵을 받아 변방에 유배 보내졌다. (태종실록 1401년 7월 11일)

이렇듯 민인생은 사관이 제대로 입시하지 못한 조선 초기에 사필을 지키려다 희생된 사람이었지만 그의 희생은 사관 제도 정착의 밑거름이 되었다.

한편 세종 때도 도승지 조사로가 사관이 따라 들어오는 것을 싫어하여, 환관들로 하여금 사관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도록 했다. 사관들 입장에서는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마침 동지춘추(同知春秋) 윤회가 조서로의 하는 짓을 그르게 여겨 세종께 아뢰었다. 세종은 조사로에게 "사관이 따라 들어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세종실록 1423년 7월 25일자)

이후에도 승지가 사관의 입직을 막은 적이 여러 번이었다. 1457년 10월21일에 세조는 단종의 장인 송현수를 교형(絞刑)에 처하고, 영월로 귀양 간 단종에게 사약을 내렸다. 이어서 세조는 10월24일에 송현수의 재산과 처첩을 공신들에게 분배하는 문제를 정리했다.

세조는 경회루 동편방(東偏方)에서 도승지 조석문을 인견했는데, 사관(史官)이 따라갔다. 조석문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홀로 들어갈 때, 사관이 마구 들어가는 것은 불가하다." 하며 이를 중지시켰다.

그런데 조석문이 들어갈 때, 영천부원군 윤사로(1423∼1463)가 조석문에게 말하기를 "송현수의 딸을 받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윤사로는 세종의 딸 정현옹주에게 장가들어 임금에게 총애를 받았으나, 성질이 요사스럽고 식리(殖利)에 능하여, 외방의 농장(農莊)이 있는 곳에 여러 만석(萬石)을 쌓아 놓고, 서울 제택(第宅)의 창고도 굉장하여, 몇 리 밖에서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송현수의 딸까지 탐냈으니 사관은 이 날의 실록(1457년 10월24일자)에서 사평을 썼다. 그런데 윤사로의 사촌 아우가 바로 무오사화의 가해자 윤필상이었다.

 

1) 신수근은 영의정 신승선(1436∽1502)의 아들로, 연산군의 이복동생 진성대군(훗날 중종)의 장인이었다. 그는 1484년(성종 15) 음보(蔭補)로 장령에 기용되고, 1493년에 호조참의를 지냈다. 연산군이 즉위한 후 1495년에 좌부승지, 1496년 우승지, 1497년에 도승지가 되었다.

2) 출처 : 연려실기술 제6권/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 무오년의 사화(史禍)

3) 사관은 예문관 소속으로, 관원은 영사(정1품), 대제학(정2품), 제학(종2품), 직제학(정3품), 응교(정4품)이 각 1명인데 이들은 겸직이었고, 그 밑에 봉교(정7품) 2명, 대교(정8품) 2명, 검열(정9품) 4명, 총 8명이 전임 사관이었다.

4) 사관이 앉아서 지필묵을 가지고 일을 기록하게 된 것도 조선이 건국하여 100년이 다 된 시기인 성종 때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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