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BS역사칼럼-길 위의 역사] (2부 무오사화: 4회) 이극돈, 유자광에게 김일손의 사초에 관한 일을 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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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S역사칼럼-길 위의 역사] (2부 무오사화: 4회) 이극돈, 유자광에게 김일손의 사초에 관한 일을 알리다.
  • 김세곤 칼럼니스트
  • 승인 2018.08.21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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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유자광 등이 연산군을 만난 10일 후인 1498년 7월11일에 연산군은 “김일손의 사초(史草)를 모두 대내(大內 임금이 거처하는 곳)로 들여오라.”고 전교하였다.

사진 1 경남 함양군에 있는 청계서원(淸溪書院). 김일손이 벼슬을 그만두고 정여창과 더불어 강론하며 지내려고 청계정사를 조성한 터에 세워진 서원이다.

실록청 당상 이극돈 · 유순 · 윤효손 · 안침이 함께 아뢰기를, “예로 부터 사초는 임금이 스스로 보지 않습니다. 임금이 만약 사초를 보면 후세에 직필(直筆)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11일자)

7월11일과 7월1일자 『연산군일기』를 연관시켜 보면, 7월1일에 유자광 등이 연산군에게 아뢴 것은 『성종실록』 편찬 관련 김일손의 사초(史草)내용이었다.

1494년 12월24일에 호학군주 성종(1457∼1494)이 37세의 나이로 붕어했다. 4개월 후인 1495년 4월19일에 연산군은 어세겸 · 이극돈 등에게 『성종실록』 편찬을 명했다. 곧바로 춘추관 내에 실록 편찬을 위해 임시 관청인 실록청이 설치되었다.1)

실록청 관원은 영관사 신승선, 감관사 어세겸과 성준, 지관사 이극돈 · 박건 · 유순 · 홍귀달 · 노공필 · 윤효손, 동지관사 조익정 · 안침 등 9명, 편수관(編修官) 표연말 · 윤희손 등 27명, 기주관(記注官) 유순정 · 정광필 등 10명, 기사관(記事官) 남곤 · 성중엄 · 이사공 등 37명이었다.(연산군일기 1499년 2월 22일 참조)

그런데 실록청 당상 이극돈(1435∼1503)은 사초를 열람하면서 자신의 비행이 사관 김일손에 의해 기록된 사실을 알았다. 2) 이극돈의 비행은 세조 때 불경을 잘 외운 덕으로 전라도 관찰사가 된 것과, 전라도 관찰사 시절에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貞熹王后 1418∼1483)가 상(喪)을 당했는데, 이극돈은 장흥의 관기(官妓)와 더불어 술자리를 베풀었다는 사실이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12일, 김일손이 압송 도중 의금부 경력 홍사호에게 한 말)

그런데 이극돈은 자신의 비행이 『성종실록』에 싣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몰리자, 김일손이 사초에 실은 세조 때의 궁금비사(宮禁秘事 외부에 알려서는 안 되는 궁궐의 비밀스런 일)를 유자광에게 알렸다. 소위 사초를 유출한 것이다. 3)

이에 대하여는 1498년 7월29일자 연산군일기 (유자광에 대한 평가 내용과 무오사화의 전말)에 자세히 실려 있다.

“급기야 사국(史局 : 실록청)을 열어 이극돈이 실록청 당상(堂上)이 되었는데, 김일손의 사초(史草)를 보니 자기의 악한 것을 매우 자상히 썼고 또 세조조의 일을 썼으므로, 이로 인하여 자기 원망을 갚으려고 하였다.

하루는 사람을 물리치고 총제관(摠制官) 어세겸에게 말하기를, ‘김일손이 선왕(세조를 말함)을 무훼(誣毁 무고하고 헐뜯음)하였는데, 신하가 이러한 일을 보고 상께 주달하지 않으면 되겠는가. 나는 그 사초를 봉하여 아뢰어서 상의 처분을 듣는 것이 우리에게 후환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니, 어세겸이 깜짝 놀라서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오래 있다가 유자광에게 상의하니, 유자광은 팔을 내두르며 말하기를, ‘이 어찌 머뭇거릴 일입니까.’ 하고, 즉시 노사신·윤필상·한치형을 가서 보고 먼저 세조께 은혜를 받았으니 잊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말하여, 그 마음을 감동시킨 뒤에 그 일을 말하였으니, 대개 노사신·윤필상은 세조의 총신(寵臣)이요, 한치형은 궁액(宮掖 대궐 안에 있는 하인)과 연줄이 닿으므로 반드시 자기를 따를 것으로 요량하여 말한 것인데, 과연 세 사람이 모두 따랐다.

그래서 차비문(差備門 창덕궁 희정당의 협문) 안에 나아가 도승지 신수근을 불러내어 귀에다 대고 한참 동안 말한 뒤에 이어서 아뢴 것이다.

처음에 신수근이 승지가 될 적에 대간과 시종이 ‘외척이 권세를 얻을 조짐이다.’고 해서 강력히 불가함을 아뢰었으므로, 신수근 이 원망을 품고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조정이 문신(文臣)들의 손안의 물건이니, 우리들은 무엇을 하겠느냐.’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뭇 원망이 서로 뭉칠 뿐 아니라, 연산군 역시 시기하고 포학하여 학문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더욱 문사(文士)를 미워하여, 종내는 말하기를, ‘명예만을 노리고 군상을 업신여겨 나로 하여금 자유를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모두 그 무리이다.’ 해서 항상 우울하고 즐거워하지 않아 한 번 본때를 보이려 했지만, 미처 손을 쓰지 못하던 찰나에 자광의 아뢰는 바를 듣고는, 국가에 충성하는 일이라 생각하여 장대(奬待)를 특별히 후하게 하고, 명하여 남빈청(南賓廳)에서 죄수를 국문하게 했다.” 4)

 

1) 임금이 붕어하면 임시조직으로 실록청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재위시의 시정기와 사초(史草)를 기본 자료로 하고, 『승정원일기』 · 『의정부등록(議政府謄錄)』과 각 관서의 기록, 개인의 문집 등 공사(公私) 기록을 널리 수집해 임금이 즉위한 날로부터 사망한 날까지의 사실을 날짜별(편년체)로 기록하여 실록을 편찬했다.

실록청의 조직은 대체로 영의정이 겸임하는 영사(領事), 좌·우의정이 겸하는 감사(監事), 판서 급이 겸하는 지사(知事), 참판급이 겸하는 동지사(同知事), 6승지와 홍문관부제학 및 대사간이 겸하는 수찬관(修撰官)등 당상관과 의정부·육조·승정원·홍문관·예문관·세자시강원·사헌부·사간원·승문원·종부시(宗簿寺)의 당하관이 겸임하는 편수관 · 기주관 · 기사관이 있었다.

2) 이극돈(李克墩 1435∼1503)은 광주 이씨(廣州 李氏)로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의 아들로서, 지금 올림픽 공원 일대인 서울 둔촌동과 그 주변이 이씨 가문 땅이었다. 이극돈의 형제는 5형제인데 모두가 문과에 급제한 당대 최고의 명문 집안이었다. 이극배는 영의정을 지냈고, 이극감은 형조판서, 이극증은 판중추부사, 이극돈은 좌찬성, 이극균은 좌의정을 지냈다. 갑자사화에 희생된 판서 이세좌도 이극감의 아들이었다.

3) 『연려실기술』에도 무오사화의 전말은 이극돈이 유자광에게 김일손의 사초를 알리는 데서 시작하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4) 이극돈의 졸기(연산군일기 1503년 2월 27일)에도 “일찍이 『성종실록』을 수찬(修撰)하면서 김일손이 자기의 악행(惡行)을 쓴 것을 보고 깊이 원망을 품고 있다가 선왕(先王 세조)의 일에 결부해서 유자광을 사주(使嗾)하여 이를 고발하게 했다. 이로 인하여 사류(士類)를 죽이고 귀양 보내기를 매우 혹독하게 했다. 그리하여 그때 사람들이 무오사화에는 이극돈이 수악(首惡)이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사진이나 영상의 불법촬영유포, 이를 빌미로 한 협박, 사이버 공간에서의 성적 괴롭힘 등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여성긴급전화 1366,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02-735-8994)에서 지원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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