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7월12일에 의금부 경력 홍사호 등은 김일손이 공초한 것을 연산군에게 서계(書啓)하였다.

“사초에 ‘중 학조(學祖)가 능히 술법으로 궁액(宮掖 대궐 안에 있는 하인)을 움직인다.’ 한 것은, 대개 해인사(海印寺)는 본시 차정(差定 임명)된 주지(住持)인데 학조가 내지(內旨)를 칭탁하고 그 권속으로써 노상 지음(持音)을 삼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또 ‘대가(大家)와 교통한다.’ 한 것은, 학조가 광평대군(廣平大君)·영응대군(永膺大君)의 전민(田民)을 많이 얻었기 때문이고, 또 이른바, ‘영응대군 부인 송씨가 군장사(窘長寺)에 올라가 법(法)을 듣다가 시비(侍婢)가 잠이 깊이 들면 학조와 사통을 했다.’는 것은 박경(朴耕)에게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12일 6번째 기사)

김일손은 사초에 승려 학조(學祖)에 관하여 기록하였다. 그 내용은 ‘궁액을 움직인다, 대가(大家)와 교통한다, 영응대군 부인 송씨와 사통(私通)했다’ 이었다.

먼저 승려 학조(學祖)가 누구인지부터 알아보자. 그의 생몰년은 알 수 없으나 부친은 김계권, 숙부는 김계행(金係行 1431~1517)이다.  그는 승려 신미(信眉)·학열(學悅)등과 함께 선승(禪僧)으로서 세조(1417∽1468 재위 1455∽1468)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는데 사찰 중창과 불경 언해에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세조는 조선의 다른 왕과 달리 적극적으로 불교를 옹호하고 사찰 짓는 것을 지원했다. 세조는 1457년(세조 3) 9월에 의경세자가 죽자 명복을 빌기 위해 친히 불경을 베끼고 『법화경』 등 여러 불경을 활자로 간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험을 살려 세조는 1461년에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주요 경전에 대한 한글 번역본(언해본)을 발행했다. 1)

아울러 세조는 1465년 서울시 종로구 탑골공원에 원각사를 지었고 1467년 사월초파일에 10층 석탑이 완공되자 연등회(燃燈會)를 베풀고 낙성하였다.

사진=세조의 불교 후원 (국립고궁박물관 ‘세조’ 전시회 사진)

이런 세조의 불교 사랑에 부응하여 학조는 1464년(세조 10)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에서 세조를  모시고 신미 · 학열 스님 등과 함께 대법회(大法會)를 열었고, 1467년에 세조의 명으로 금강산 유점사(楡岾寺)를 중창(重創)하였다. (세조실록 1467년 2월 17일)

1468년에 세조가 승하하자 그는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광릉(光陵)에 묻혔다.

사진=광릉 종합 안내도 (왼편이 세조의 능)
사진=광릉 (세조의 능)

예종은 모친인 세조 비 정희왕후의 뜻에 따라 1469년(예종 1) 9월7일에 세조의 능침 아래에 봉선사(奉先寺)를 중창하였는데 이때 학조가  낙산사(洛山寺)로부터 와서 부엌 10여 간을 고쳐 세웠는데, 제조(提調)·낭관(郞官)은 감히 한 마디 말도 끼어들지 못하였다. 9월8일에 예종은 광릉에 가서 제사를 지내고 봉선사에 거동하여 쌀 1백 석(石)을 내렸다. (예종실록 1469년 9월8일)

사진=광릉과 봉선사 (국립고궁박물관 ‘세조’ 전시회 사진)
사진=봉선사  입구
사진=봉선사 중창비

불교가 탄압받은 조선시대 초기에  학조는 ‘웅문거필(雄文巨筆)의 문호(文豪)’라는 칭송을 받았고 위세가 대단했다. 심지어 성종이 학조가 병이 중하므로 내의를 보내어 진찰하게 하였다. (성종실록 1483년 12월 29일) 2)   

하지만 승려 학조는 유생으로부터 구타를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고 (성종실록 1482년 5월 19일) 여러 명의 여자와 성 스캔들에 휘말렸으며(성종실록 1479년 4월 13일), 󰡔조선왕조실록󰡕은 학조를 ‘교만하고 방자하여 위세를 부리는 자’ 혹은 ‘요승(妖僧)’으로 평가하였다.

그러면 김일손의 공초내용을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김일손은 사초에 ‘중 학조(學祖)가 능히 술법으로 궁액(宮掖 대궐 안에 있는 하인)을 움직인다.’ 한 것은, 학조는 본시 해인사(海印寺)에 차정(差定 임명)된 주지(住持)인데 학조가 내지(內旨 임금이나 왕비의 은밀한 전지 傳旨)를 칭탁하고 노상 주지 아래의 승려들을 그 권속으로 삼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공초했다.

학조는 1488년(성종 19) 인수대비(성종의 모친)의 명으로 해인사를 중수하고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장경판전을 중창하였다. 그런데 그는  인수대비의 은밀한 전지를 청탁하고 위세를 부리면서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렸다.

심지어 학조는 정부 인사에도 간여하려 했다. 1493년(성종24년) 10월 24일에 학조의 숙부 김계행이 성균관 사성으로 임명되었다. 이날의 실록에 사신이 논평하기를, "이 정사(政事)에 김계행을 성균관 사성으로 삼았는데, 김계행은 학행(學行)이 있었다. 형(兄)의 아들인 중[僧] 김학조(金學祖)가 일찍이 광묘(光廟 세조)에게 사랑을 받았는데, 김계행에게 말하기를, ‘아저씨가 만약 벼슬을 얻고자 하시면 마땅히 이를 도모하겠습니다.’라고 하자, 김계행이 노여워하여 매를 쳤으니, 이때 의논이 이를 아름답게 여겼다." 하였다. (성종실록 1493년 10월 24일 5번 째 기사)

둘째, 김일손은 ‘대가(大家)와 교통(交通)한다.’고 한 것은, 학조가 광평대군·영응대군의 전민(田民 전답과 농민)을 많이 얻었기 때문이라고 공초했다.

광평대군(廣平大君 1425년 ~ 1444년)는 세종의 5남인데 1444년 19세에 창진(瘡疹)으로 죽었다. 그러자 그의 부인 신씨는 곧바로 비구니가 되었고, 법명은 혜원(慧園)이었다. 비구니가 된 신씨는 특정 사찰로 들어가는 대신 광평대군방에서 기거했는데, 인근에 있던 군장사(窘長寺)를 다니며 불공을 올렸다. 또한 광평대군 묘 부근에 있던 견성암을 크게 중창했다. 신씨는 광평대군방에 속한 재산의 절반에 달하는 70여 결의 토지를 보시해 작은 암자를 대규모 사찰로 중건한 것이다. 신씨의 대규모 불사는 조정에서 큰 논란이 되었다. 조정 신료들은 신씨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성종은 묵살했다.

신씨가 견성암에 막대한 재산을 희사한 것은 승려들이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김수온의 ‘견성암법회기’에는 “광평대군 부인이 재산을 출연하여 1000여 명의 승려들이 밤에는 참선을 하고 낮에는 경전 독송을 하였으니, 광평대군 영가(靈駕)가 극락정토에서 왕생하기를 발원하기 위함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 후 성종의 능 선릉(宣陵)이 광평대군 묘역에 들어서게 되면서 광평 대 군의 묘는 이장되었다. 견성사도 1498년(연산군 3)에 능역 밖으로 옮기면서 절 이름이 ‘봉은사’로 개칭되었다. 3)

한편 영응대군 (永膺大君 1434년∽1467)은 세종의 8남이자 막내이다.  세종은 영응대군을 특별히 총애하였고 1450년에 그의 저택인 동별궁(東別宮)에서 승하하였다. 그런데 1467년에 영응대군이 죽자 그의 부인 송씨는 절을 짓고 승려 학조와 가까이 했다.

1) 간경도감은  1461년(세조 7) 6월 왕명으로 설치했고 1471년(성종 2) 12월에 폐지되었다. 간경도감의 주요사업은 불경을 국역하고 교감해서 간행하는 일이었는데, 불서 구입이나 불교행사와 법회를 관장하기도 했다. 간경사업은 불경을 한글로 쉽게 번역·보급하였으며, 그 결과 중요한 국어학 자료를 남겼다.

2) 1483년 12월 29일의 성종실록을 읽어보자.     

중[僧] 학조(學祖)가 금산군(金山郡) 직지사(直指寺)에 있으면서 병이 중하므로 특별히 내의(內醫)를 보내어 병을 진찰하게 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학조는 세조조(世祖朝)에 신미(信眉)·학열(學悅)과 더불어 삼화상(三和尙)이라고 일컬어 세조가 매우 존경하였는데, 신미와 학열은 모두 죽고 학조는 직지사에 물러가 살았다. 널리 산업(産業)을 경영하여 백성에게 폐단을 끼침이 작지 아니하였으며, 때때로 서울에 이르면 임금의 친척과 호가(豪家)들이 그가 왔다는 것을 듣고서 문안하고 물품을 선사하는 것이 길에 연달아 이었다." 하였다.

3) 이 투데이, [한국여성인물사전] 219. 광평대군 부인 신씨(申氏), 봉은사 탄생시킨 숨은 주역, 2017.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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