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1498년 7월12일에 시작된 김일손의 공초는 7월13일에도 계속되었다.

7월13일자 연산군일기에는 (1) 사초 사건에 관한 김일손의 공초 내용, (2)사초에 기록된 권람 · 남효온 등의 일에 관한 김일손의 공초 내용, (3)사초에 기록된 노산 대군(단종)의 일에 대한 김일손의 공초 내용, (4) 실록 열람에 대한 왕의 전교가 실려 있다.

먼저 7월13일 1번째 기사부터 살펴보자.

연산군이 어서(御書)를 내려 김일손에게 묻기를,

“1. 『실록』이라는 말이 무엇을 이른 것이냐? 만약 『실록』이라 한다면 마땅히 사실을 써야 하는데, 너의 사초는 모두가 헛된 것이니, 어떻게 『실록』이라 이르겠느냐?

1. 탄(坦)이라는 선사(禪師)가 정분(鄭苯)의 시구(屍柩)를 보호한 일을 썼는데,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느냐?

1. 소릉(昭陵)을 복구하기를 청하고, 난신(亂臣)들을 절개로 죽었다고 쓴 것은 네가 반드시 반심(反心)을 내포한 것이다.

1. 세조께서 중흥하신 그 공덕은 천지보다 더하여 자손들이 서로 계승해서 지금까지 왔는데, 네가 이미 반심을 품었으면서 어찌 우리 조정에 출사했느냐?” 하였다.

윤필상 · 유자광 등이 어서를 받들고 국문하니 김일손은 답변했다.

연산군은 “『실록』이라 한다면 마땅히 사실을 써야 하는데, 너의 사초는 모두가 헛된 것이니, 어떻게 『실록』이라 이르겠느냐?”고 물었다.

사초가 가짜뉴스이고 허위조작 정보라는 것이다.

김일손은 “신의 사초에, 세조 조에 관한 일은 혹은 허반에게도 들었고 혹은 정여창에게도 들었고 혹은 최맹한 · 이종준에게 들었는데, 이 무리들이 모두 믿을 만한 자들이기 때문에 사실이라 생각하고 쓴 것”이라고 답했다.

허반은 세조와 권귀인 · 윤소훈 사이에 일어난 일을 알려준 자이고, 일두 정여창(1450∼1504)은 김종직의 문인으로서 그 역시 사관이었다.

김일손은 1488년에 함양에서 정여창을 만나고 1489년 4월에는 같이 두류산(지리산)을 탐방할 정도로 친했다. 김일손이 1498년 7월에 함양 청계정사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 당했을 때도 김일손은 정여창이 살던 집 근처에서 노후를 보낼 생각으로 청계정사에서 머물렀다.

고(故) 진사 최맹한은 단종복위운동과 관련하여 유배를 살았던 이로 그는 단종 관련 이야기를 김일손에게 전해주었다.(연산군일기 1498년 7월12일자 5번째 기사 참조)

한편 이종준은 김일손과 친했다. 이종준은 김일손이 아끼는 거문고 ‘탁영금’에 학(鶴)을 그려주었다. ( 『탁영선생문집』 p132 참조)

김일손은 이들이 모두 믿을 만한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 생각하고 사초에 적었다.

다음에 연산군은 “1. 탄(坦)이라는 선사(禪師)가 정분(鄭苯)의 시구(屍柩)를 보호한 일을 썼는데,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느냐? 1. 소릉을 복구하기를 청하고, 난신(亂臣)들을 절개로 죽었다고 쓴 것은 네가 반드시 반심(反心)을 내포한 것이다.”라고 질문했다. 난신들을 충신이라고 했으니 반역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었다고 한 것이다.

김일손은 “신이 한 낫 서생으로서 성종의 후한 은혜를 입었사옵고, 또 성상께서 즉위하신 후에는 외람되이 시종(侍從)의 영광을 입었사온데, 어찌 반심이 있사오리까.”라고 말했다.

김일손은 성종(1457∼1494 재위 1469∼1494)의 총애를 입었다. 1490년에 성종은 세조 때 영의정을 한 최항(1409∼1474)이 살던 집을 사들여 요동질정관으로 중국에서 돌아온 김일손에게 하사했다. 김일손이 모친 봉양을 위해 사직을 청하자 모친과 함께 기거토록 한 것이다. 이 집이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 살았던 ‘이화장’이다. 1493년(성종 24년)에 김일손은 예문관응교에 직을 두고 사가 독서하였는데 성종의 어제(御製) ‘비해당((匪懈堂) 차운 시 48영(詠)’에 화답하는 시를 짓고 발문도 지어 올렸다. 또한 성종은 김일손에게 매화벼루를 하사했는데, 이 벼루는 청도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사진=매화벼루 (청도박물관 소장)
사진=매화벼루 (청도박물관 소장)

이어서 김일손은 “소릉의 복구를 청한 것과 난신(亂臣) 등을 사절(死節)로 쓴 것은, 황보인·김종서·정분 등이 섬기는 바에 두 마음을 갖지 않았으니, 제왕이 마땅히 추앙하고 권장할 일이기 때문에 정분을 들어 전조(前朝)의 정몽주에게 비하였고, 또 황보인·김종서를 쓰면서 절개로 죽었다 한 것입니다.”라고 답변했다.

정분(1394~1454)은 1452년(단종 즉위년)에 김종서의 천거로 우의정에 올랐다. 1453년 10월에 수양대군(首陽大君 나중에 세조)이 주도한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아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 인 · 김종서 등이 주살되자 그도 하3도체찰사로 임무 수행 중 충주에서 체포되어 전라도 낙안(樂安)에 안치되었다. 곧 고신(告身)을 추탈당한 뒤 낙안의 관노가 되었다. 이후 대신과 대간의 빈번한 청죄(請罪)가 계속되었지만, 1년 여간 목숨을 보존하다가 1454년에 광양에서 교형을 당했다. 그런데 그의 시신을 수습한 승려 탄이 누구일까?

마치 생육신 김시습이 1456년에 사육신의 시신을 군기시 앞에서 수습하여 노량진에 묻었듯이, 탄이라는 승려도 정분의 시신을 수습하였나보다.

김일손은 정분을 고려 때의 정몽주에 비하여 사초에 적었다. 절개를 높이 산 것이다. 물론 황보인과 김종서도 절개로 죽었다고 기록했다.

나중에 정조 임금은 1791년(정조 15) 2월21일에 장릉에 배식단을 세우고 황보인·김종서·정분을 삼상신(三相臣)으로 추향하였고 (정조실록 1791년 2월21일), 단종에게 충절한 여러 신하의 배향에 대한 교서를 내렸다. (홍재전서 제60권/ 잡저 7)

한편 김일손은 1495년(연산군 1)5월 충청도 도사시절에 단독으로, 1496년 1월 사간원 헌납 시절에는 사간원 연명으로 소릉(문종 비 현덕왕후의능)복구를 청하였다. 그런데 연산군은 이때에는 아무 말도 안하다가 이제 와서 소릉 복구를 청한 것을 반심을 품은 것으로 몰고 있다. 참으로 치사한 군주이다.

이어서 연산군은 “세조(1417∼1468 재위 1455∼1468)께서 중흥하신 그 공덕은 천지보다 더하여 자손들이 서로 계승해서 지금까지 왔는데, 네가 이미 반심을 품었으면서 어찌 우리 조정에 출사했느냐?”고 문초했다.

김일손은 “세조께서 영웅호걸이신 임금으로서 혼란을 잠재우고 중흥(中興)의 업을 이룩하셨고, 성종 대왕께서는 불세출의 영걸한 임금으로 지영(持盈) 수성(守成)을 하셨는데, 전하께서 성종의 업을 계승하셨으니 오늘날 사람들이 모두 조정에 서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충실히 근무하여(恪勤) 직(職)에 죽겠다는 것이 바로 신의 마음이기 때문에 종사(從仕)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김일손은 세조를 중흥의 군주로 추켜세운다. 이어서 세조의 손자 성종 의 수성을 이야기하면서 연산군이 성종의 업을 계승했으니 사람들이 조정에 근무하고자 함을 밝힌다.

세조는 왕권과 국방을 강화하고 국정 운영의 기본원칙이 되는 통일적인 법전 체계를 확립한 점에서 중흥의 업을 이룬 임금으로 평가된다.

사진=세조의 업적 (2018.10.22.- 2019.1.13. ‘세조’ 전시회, 국립고궁박물관 지하 궁중 서화실)

하지만 도덕성과 명분이 결여된 세조의 권력 장악과 즉위과정에 대하여는 비판적 인식이 지배적이다.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세조는 단종 복위를 시도한 자들을 잔혹하게 처형하고 단종을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다. 사육신과 생육신은 절개와 충(忠)의 상징이 되었다.

사진=세조의 왕위찬탈과 단종 복위 사건의 그늘
사진=국립고궁박물관의 ‘세조’ 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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