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1498년 7월13일에 김일손은 권람·남효온 등의 일에 관하여 공초하기를,

“노산(魯山)의 숙의(淑儀) 권씨의 노비와 전산(田産)을 권람(權擥)이 다 차지했다.’고 한 것은, 권씨는 바로 권람의 족종(族種)인데도 종 한 사람, 밭 한 이랑조차 나누어 주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신은 그 사람됨을 경박히 여겨서 쓴 것이옵니다.” 1)

단종의 후궁 권씨는 1457년 6월 21일에 백성 김정수의 고변으로 역적이 된 권완의 딸이다. 2)

백성 김정수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그런 정보를 얻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는데도 세조는 일개 백성의 말만 믿고 단종의 장인 송현수와 권완을 의금부에 즉시 하옥시키고 7월5일에 권완을 능지처사했다. 이러자 숙의 권씨도 노비가 되었다가 1464년 4월18일에 방면되었다. 3)

권람(1416~1465)은 한명회와 함께 수양대군의 책사로서 1453년 계유정난 때 김종서·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세조집권의 토대를 마련했다. 세조가 즉위하자 이조참판에 발탁되고, 1456년 2월에는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3월에 역신(逆臣)들이 가졌던 연안·전주·충주·양주의 토지를 하사받았다. 1457년 2월 난신(亂臣)들의 노비를 하사받았고, 3월에는 김문기·성승 등의 토지를 하사받았다. 권람은 높은 지위와 많은 재산을 모았으며, 남산 아래에 화려한 집을 소유하였다.

이어서 김일손은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이 졸(卒)하다.’고 쓴 것은, 신이 남효온과 더불어 본래 교분이 없사온데, 다만 신의 스승 김종직(金宗直)이 일찍이 남효온의 재주와 행검을 칭찬하였으므로 들은 바에 따라서 쓴 것이옵니다.”라고 공초했다.

김일손은 남효온과 교분이 두터웠다. 그런데 그는 본래 교분이 없다고 진술했다. 『탁영선생연보』에 의하면 1478년 4월15일에 25세의 성균관 유생 남효온은 소릉(단종의 모친 현덕왕후의 능) 복위 상소를 올렸다. 김일손은 그해 9월에 서울로 돌아가 성균관에 들어갔다. (『탁영선생연보』 p 688)

이윽고 김일손은 18세인 1481년 7월에 남효온과 함께 용문산을 유람하였고, 8월에는 남효온과 함께 원주의 원호를 방문해 사육신의 말을 듣고 「자규사(子規詞)」를 주고받았다. 1482년에 김일손은 남효온 · 홍유손과 함께 수락산에서 지내는 김시습을 만났다. 생육신 김시습은 1456년 6월에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하여 노량진에 묘를 세운 이이다.

김일손은 1486년에 과거에 급제한 이후 1487년 8월 추강 남효온과 함께 파평 남곡의 성담수를 방문하여 10일간 지냈다. 1488년 8월에는 남효온 · 홍유손 등과 함께 청도 운문산을 유람하였고, 9월에 운계정사를 완공했다.

남효온은 1489년 겨울에 경상도 의령에서 박팽년 ·성삼문 · 이개 ·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의 절개를 기록한 『육신전』을 지었다. 1490년 4월에 김일손은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六臣傳)」 초안을 사관(史館)과 『승정원일기』에 의거해 다시 고쳐 짓고 집안에 깊숙이 갈마 두었다. 4)

(『탁영선생문집』 p 691)

사진 1 서울 노량진 사육신 공원의 신도비각
사진 2 신도비에 적힌 「육신전」 기록. 신도비 중간에 ‘남추강효온 병자 육신열전’이란 글귀가 있다.

9월에 남효온은 김일손과 함께 삼각산 중흥사에 있는 김시습을 방문하였다. 중흥사는 과거공부를 하던 김시습이 세조즉위 소식을 듣고 똥통에 빠진 뒤 책을 불사르고 떠난 곳이다. 5)

그런데 안타깝게도 1492년 10월에 남효온이 별세했다. 김일손은 부음을 듣고 달려가서 곡을 하였다.

이렇게 김일손은 남효온과 교분이 두터운데도 왜 교분이 없다고 진술한 것일까? 이는 6년 전에 죽은 남효온이 피해가 입을 것을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후전곡을 연주한 이총이 남효온의 사위이니 이총에게 불똥이 안 튀도록 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으리라.

안타깝게도 남효온은 1498년 무오사화에는 잘 넘어갔지만 1504년 갑자사화 때는 1478년에 소릉복위를 상소하였다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했다.

한편 7월13일에야 김일손의 스승 김종직(1431∼1492)의 이름이 실록에 처음 등장한다. 김종직은 아버지 김숙자의 도통을 이어받은 도학의 연원이다. 그런데 그는 1459년 벼슬하기 전인 1457년 10월에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었는데, 이 글을 김일손이 사초에 실어 사건이 확대되었다.

사진 3 김종직 선생 생가 안내판 (경남 밀양시)
사진 4 추원재 안내판
사진 5 김종직 동상 (추원재 입구)
사진 6 추원재

이윽고 김일손은 “진사(進士) 권작(權綽)의 일은 이종준(李宗準)에게 듣고 졸(卒)이라 쓰고, 드디어 기사(記事)를 한 것”이라고 진술했다.

권작은 김일손과 친한 이종준의 장인이다. 권작은 아마도 단종을 위하여 절개를 지켰나 보다.

이어서 김일손은 “문묘(文廟)의 축사(祝史)는 차마 못할 일이 많다는 등의 말은, 신이 헌납(獻納)이 되었을 적에, 동료와 더불어 함께 의논하되, 자고로 종묘(宗廟)에는 독주(獨主 홀로 있는 신주)가 없다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상소하여 소릉(昭陵)의 복구를 청하고 드디어 사초 쓴 것”이라고 말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13일 2번째 기사)

종묘에 문종의 신위만 있고 단종의 모친 현덕왕후의 신위는 없으므로

사간원 연명으로 소릉 복위를 청한 것은 연산군 1년(1495년) 12월30일이었다. 헌납 김일손은 대사간 김극유, 사간 이의무, 정언 한훈 · 이주와 연명으로 소릉의 복위를 헌의(獻議)하였다.

연산군은 이 헌의를 예조에 내려 보냈다. 예조는 “예로부터 종묘에 배위 없는 독주(獨主)가 없는데도 문종은 종묘에서 홀로 제향을 받으니 의리에 온당치 못합니다. 그러나 소릉을 조종에서 폐위시킨 지 이미 오래되어 경솔하게 복위하기가 어려우니 거행할 수 없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연산군일기 1495년 12월 30일)

 

1) 나중에 이목도 역시 공술하기를, “노산군의 숙의 권씨는 바로 권람의 친족입니다. 그 논밭과 집과 노비를 권람이 다 차지하고 주지 않아서 숙의를 굶주리게 한 까닭으로 신이 일찍부터 권람을 하찮게 보았습니다.” 하였다.( 『연려실기술』에 적혀 있다.)

2) 숙의 권씨는 1454년 1월8일 경복궁 사정전에서 세 명의 단종 비 후보로 뽑혔고, 송현수의 딸이 왕비로 책봉되자 그녀는 숙의(종2품)로 책봉되었다. (지두환, 단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8, p 294)

3) 권완의 딸 권중비(權仲非)를 방면하였다. 대개 노산군의 후궁이었기 때문에 일찍이 공신(功臣)에게 내려 주어 계집종[婢]으로 삼았는데, 이 때에 이르러 방면하였다. (세조실록 1464년 4월18일)

4) 남효온은 『육신전』의 마지막 부분에서 아래와 같이 사찬(史贊)을 지었다.

태사씨(太史氏)는 말하노라.

누군들 신하가 되지 않겠는가마는 육신(六臣)의 신하됨이여! 누군들 죽지 않을까마는 장하다 육신의 죽음이여! 살아서는 임금 사랑의 신하 도리를 다했고, 죽어서는 임금에게 충성하여 신하된 절개를 세웠으니, 충분(忠憤)은 백일(白日)을 꿰뚫고 의기(義氣)는 추상(秋霜)보다 늠름하다. 백세(百世)의 신하 된 자로 하여금 한 마음으로 임금 섬기는 의리를 알아 절의(節義)를 천금처럼 여기고 목숨을 터럭처럼 여김으로써 인(仁)을 이루고 의(義)를 취하게 하였다.

5) ‘세 사람은 밤새 담소하고 백운대에 등정하고 닷새간 같이 보냈다. 그 때 담론이 모두 없어지고 전해지지 않는다.’ 김일손의 조카 김대유가 꾸민 『탁영선생연보』에 나온다. (이종범, 사림열전 2 순례자의 노래, 아침이슬, 2008, p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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