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1495년 7월22일에 대간은 합사(合司)하여 노사신의 죄를 여러 번 아뢰었으나 연산군은 오히려 대간을 공박했다.  

"경들이 중의(衆意)를 수합해 보라고 청하였지만, 의논하는 자가 마음속으로는 그르게 여기지 아니하면서도 대간의 입을 두려워하여 옳지 않다고 한다면, 경들이 이것을 빙자하여 더욱더 강력하게 말할 것이 아니냐. 이러니 듣지 않는 것이다.(중략)

대간은 이기려고만 힘써서, 비록 남이 한 말이 옳을지라도 자기 의사와 맞지 않으면 논박하기 때문에, 대신의 의논도 다 자유롭지 않다. 이로 미루어 보면 비록 그 의논이 공의에서 나왔을지라도, 내 생각으로는 공의가 되지 못할 것 같다.”(연산군일기 1495년 7월 22일 1번째 기사)

이 날 노사신은 또 사직을 청했지만 연산군은 윤허하지 않았다.

7월23일에 대사헌 최응현·대사간 이감 등이 노사신을 처단하라고 수차례 아뢰었으나 연산군은 거부하였다. 이에 대간들은 사직하겠다고 물러가니, 연산군은 복직을 명하였다. (연산군일기 1495년 7월 23일 1번째 기사)

7월24일에도 대간은 자신들을 빨리 파직하라고 하였으나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

이 날 홍문관도  상차(上箚)하였다.

"대간을 가두면 선비가 장차 혀를 묶고 입을 다물 것이니 국가의 복이 아닌데, 노사신은 말하기를 ‘위엄 있는 결단(威斷)이다.’라며 전하를 치하하기에 겨를이 없으니, 이는 치(治)를 난(亂)으로 바꾸어서 제 야욕을 펴고자 하는 것이니 간사함이 심합니다.

지금 노사신의 말이 ‘나이 이미 70이요, 지위 역시 극에 달했는데 무슨 소망이 있겠느냐.’ 하였는데, 이는 특히 ‘반드시 이기려고만 한다.’는 말을 꾸며서 전하를 기만한 것이니, 그 교활함이 심합니다. 이는 거짓으로서 임금을 미혹하게 하고 나라를 망칠 것뿐인데, 전하는 그 공손함을 기뻐하시고 죄주어 내쫓지 않으시니, 신 등은 실망됨을 이기지 못합니다. 바라옵건대 결단하소서.’ 하였다. (연산군일기 1495년 7월24일 1번 째 기사)  

사진=창덕궁 돈화문
사진=창덕궁 인정문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문)

7월25일에도 대간들은 노사신을 조정에서 내쫓기를 거듭 아뢰었다  

"노사신이 대간을 잡아 가두는 것을 위엄 있는 결단(威斷)이라 하여 기뻐서 치하하였으니 이는 곧 저 이사(李斯)가 독책(督責)을 권장한 술책인데, 이와 같은 간신을 어떻게 조정에 둘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미 노사신을 옳다고 보시고, 또 조정의 공의도 수합하지 아니하시니 빨리 신등을 파직시켜 주소서."

이사(李斯 ?- BC 208)는 중국 최초로 통일국가를 이룩한 진(秦)나라 (BC 221∼207) 시황제(始皇帝) 때의 승상이었다. 그는 진시황제를 보좌하여 천하 통일에 기여했고, 통일 후에는 군현제, 법가사상 등을 실시하여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한편 그는 분서갱유 사건 등을 주도하여 악명이 높았고, 대의를 지켜야 할 때 개인의 이익을 좇아 결국 자신을 망치고 진나라를 패망의 길로 몰았다. 1)

한편 연산군은 대간들의 상소를 듣지 아니하였다. 대간들은 다시 아뢰기를, "노사신의 간사한 정상은 대간·시종(侍從)·원상(院相)·승지가 모두 배척하는데도 전하께서 유독 결단을 내리시지 않으시니, 신 등은 통분하고 애석함을 이기지 못합니다." 하였다.

이러자 연산군은 "일 처리는 안하고 영의정을 죄주고자 하니, 경들의 마음은 편안한가?" 라고 힐문했다.

대간이 다시 아뢰기를, "나라를 그릇되게 하는 간신을 제거하게 되면, 어찌 신 등만의 마음만 편안하리까. 온 나라 인심이 역시 다 만족하여 전하의 밝으심을 칭송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날 홍문관에서도 신의 직을 갈아 주라고 하였으나, 듣지 아니하였다.

대간이 다시 아뢰기를, "신 등이 나라를 그릇되게 하는 간신을 배척하기를 청하여도 허락하지 않으시고, 신 등의 직을 갈아 주시기를 청하여도 허락하지 않으시므로, 이 때문에 신 등이 여러 날을 합문(閤門)에 엎드렸으나, 전하의 윤허하지 않는다는 전교를 들었을 뿐이며 한갓 일만 폐하게 되니, 신 등이 어찌 감히 직에 있으리까." 하였다. (연산군일기 1495년 7월 25일 1번째 기사)  

사진=옥당(홍문관의 별칭이다.)

7월27일에도 대사간 이감이 서계하기를, "사간원으로 말하면 간쟁(諫諍)하는 일을 제외하면 서경(署經)하는 한 가지 일뿐이나, 사헌부는 조정의 기강이 존재하는 곳이라 국가의 안락과 근심이 달렸으니, 하루라도 출근하지 않으면 기강이 해이하며 백성의 원망이 적지 아니할 것입니다. 백성의 원망이 날로 일어나면 나라의 근본이 크게 흔들리고 기강이 날로 해이해지면 국가가 장차 위태로울 것입니다. 이러한 위기를 오직 대간·홍문관·예문관에서만 말할 뿐, 육조(六曹)나 의정부에서는 한 마디 말이 없으니, 이는 노사신을 두려워하여 말하지 않는 것이므로, 이야말로 진(秦)나라 조고(趙高 ?∽BC 207)가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해도[指鹿爲馬 지록위마] 사람들이 감히 아니라고 못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신은 통곡하는 바입니다. 전일에 전하께서 하교하시기를 ‘노사신이 말한 것은 맞는 말이라 불가할 것이 없고, 대간이 말한 것도 옳다고만 할 수 없으니, 물러가서 생각해 보라.’ 하셨는데, 이는 전하께서 인정에 끌리시어 결단을 못하시는 것입니다. 대간이 명령에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죄줄 만 하다면, 노사신은 간사하고 아첨하여 전하를 그르쳤으니 역시 죄줄 만합니다. 대간이나 노사신을 한꺼번에 죄주신다면 조정으로 보아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였다.

지록위마(指鹿爲馬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다)! 이는 진나라 조고가 황제를 농락하고 권세를 부린데서 나온 고사이다.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BC 221∼207) 진시황은 영원히 살기를 바랐지만 BC 209년 순행 도중 중병에 걸렸다. 그는 천수가 다했음을 직감했던지 환관(宦官) 조고(趙高)에게 명하여 큰아들 부소(扶蘇)에게 보내는 편지를 만들게 하였다. 편지에는 ‘군사를 몽념(蒙恬)에게 맡기고 함양(咸陽)에서 나의 관을 맞아 장사를 지내도록 하라.’고 쓰도록 했다. 이는 큰아들 부소에게 황위를 물려준다는 유서였다. 그런데 편지가 부소에게 전해지기도 전에 진시황이 승하하였다.

편지와 옥새는 모두 환관 조고가 지니고 있었다. 진시황의 죽음을 아는 사람은 다만 시황제의 막내아들 호해(胡亥)와 승상 이사(李斯)와 조고, 그리고 심복 환관 오륙 명뿐이었다. 조고는 먼저 호해를 설득한 다음, 승상 이사까지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세 사람은 비밀리에 담합하여 호해를 황위 계승자로 세우고, 부소와 몽념 장군에게 자결하라는 내용의 유서를 조작했다. 부소는 자결했고, 몽념은 자결을 거부하다 반역죄로 사형 당했다.

환관 조고는 황제 호해의 무능을 이용하여 모든 권력을 쥐었으며, 급기야 승상 이사까지  모반죄를 뒤집어씌워 제거해 버리고 자신이 승상이 되었다.그런데 조고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황제의 자리를 노렸다. 한 가지 걱정은 여러 신하들이 따라 줄까 이었다. 그래서 조고는 신하들을 시험하기 위해 사슴을 호해 황제에게 바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말입니다.”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승상이 잘못 본 것이오. 사슴을 말이라 하는구려.”

조고가 대신들을 둘러보며 묻자 어떤 사람은 말이라고 하며 조고의 뜻에 영합했다. 어떤 사람은 사슴이라고 대답했는데, 조고는 사슴이라고 말한 자들을 암암리에 모두 처형했다. 이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진이세본기(秦二世本紀)」』에 나온다. 2)

사진=진시황의 병마용갱(중국 서안에 있다)

대간들은 의정부와 육조가 노사신이 두려워 말을 못하는 것은 지록위마나 다를 바 없다고 아뢰었지만, 연산군은 대간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러자 대간이 모두 사직했다. 연산군은 복직을 명하였다. 대간이 부름을 받고 나아가 대궐 뜰에 서서 아뢰기를, "큰 간신(大奸)이 국정을 맡고 있으나 능히 내쫓지 못하니, 신들의 죄가 중한데 무슨 낯으로 복직하겠습니까?" 하였다. (연산군일기 1495년 7월27일  1번 째 기사)  

1) 진시황 사후에 반란이 일어나 B.C 207년에 진나라는 멸망하고 한나라가 건국하였다. 차이나(China)라는 중국의 영문 이름은 진에서 유래하였다.

2) 얼마 후 이사와 조고는 사이가 나빠졌고, 조고가 이사를 처형했다. 그 후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얼마 가지 않아 반란군들이 수도에까지 들어왔다. 조고는 허수아비 황제 호해를 죽이고 호해의 아들 자영을 제위에 앉혔다. 그는 다시 자영까지도 죽이려 했으나 음모가 발각되어 암살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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