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1497년(연산군 3년) 2월 이후 대간들의 대신에 대한 비판은 몇 달간 지속되었다. 그런데 7월4일에 사헌부 집의 강경서 등이 대신이 책임만 회피하려고 하니 ‘절에서 죽이나 먹고 있는 승려’라고 비판한 것이다.

사진=창덕궁 희정당 (연산군이 김일손을 친국한 곳이다.)

이러자 7월6일에 좌의정 어세겸, 우의정 한치형, 좌찬성 이극돈, 우찬성 성준, 좌참찬 유지, 우참찬 윤효손, 영중추부사 정문형이 사직을 청했다.

연산군은 어서(御書)를 내려 “지금의 천변은 모두가 나의 부덕한 소치이니, 간관의 논박을 혐의로 여기지 말라”고 하였다.

7월10일에는 장령 조형, 정언 조순이 박형무·황진손·채윤공 등의 관직 제수가 잘못되었음을 논하였다. 특히 고양군수 채윤공은 불학무식한데, 판관(判官)에서 만기가 되기 전에 4품으로 뛰어 올리는 것은 매우 외람된 일이라고 하였다.

7월14일에 고양군수 채윤공은 승정원에 불려가서 《맹자(孟子)》의 ‘백이(伯夷)는 눈으로 악한 빛을 보지 않았다.’는 대목을 강 받았는데, 완(頑)을 돈(頓)이라 읽고 오(汙)를 한(汗)이라, 매(浼)를 면(免)이라,박(薄)을 부(簿)라 읽었으며, 또 구두[句讀]도 잘 떼지 못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고과에서 능력이 거증될 것이니 별 문제없다 하였다.

한편 채윤공 뒤에는 노사신의 비호가 있었다. 노사신은 1495년 11월1일에 모든 관직에서 사퇴했지만, 1496년 11월 이후 사복시 제조를 하고 있었다. 7월17일에 장령 조형과 정언 조순은 노사신이 언로를 차단하려고 한다면서 국문을 요청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들어주지 않았다.

7월18일과 7월20일에도 정언 조순은 노사신을 추국하라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러자 7월21일에 정언 조순(1467∽1529)이 노사신을 가장 극단적으로 증오한 사건이 일어났다. ‘노사신의 고기를 먹고 싶다’고 논박한 것이다.

그러면 조순의 발언을 읽어보자

"지금 신 등에게 ‘대신을 경멸한다.’ 하는데, 신 등이 어찌 대신을 경멸하리까. 사신이 위의 앞에서 대간의 논박을 당했으면 대죄(待罪)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이온데, 도리어 대간더러 ‘고자질을 해서 곧다는 이름을 취득하는 짓이다.’고 하니, 이는 전하께서 대간의 말을 듣지 않으시고 자기 말만을 믿게 하기 위해 감히 가슴속의 음모를 드러낸 것입니다. 춘추(春秋)의 법을 말하면 노사신의 죄는 극형(極刑)에 처해도 도리어 부족하옵니다. 신 등은 그의 살덩이를 씹고 싶습니다. 이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인신(人臣)으로서 누가 군상(君上) 앞에 직언을 할 자가 있겠습니까?"

30세의 정언(정 6품)이 70세의 전직 영의정에게 한 ‘노사신의 살덩이를 씹고 싶다.’는 표현은 엄청난 파장이었다.

연산군은 즉각 분노했다.

"네가 노사신의 살을 씹어 먹고 싶다 말한 것은, 필시 ‘내가 대간(臺諫)이 되었으니 비록 이같이 말할지라도 나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생각에서일 것이다. ... 노사신의 말은 ‘비록 글월을 알지 못하더라도 자질만 좋을 것 같으면 수령을 시킬 수 있다.’는 것인데, 네가 그의 살을 씹어 먹고 싶다고까지 말했으니, 조정은 화목한 것을 귀하게 여기는데, 지금은 조금만 불협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이 같은 말을 하면 되겠느냐.” (연산군일기 25권, 1497년 7월21일 3번째 기사)

7월22일에 연산군은 노사신에게 극언을 한 조순을 국문하라고 명했다.

이러자 승정원에서 조순을 불러들여 발언이 지나쳤다고 꾸짖는 것은 가하지만, 추국하는 것은 어떨는지 모르겠다고 아뢰었다.

연산군은 승정원에서 대간을 퍽 두려워한다고 전교했다.

승정원에서 다시 아뢰었다.

"이는 성덕(盛德)에 누(累)가 되는 일이므로 감히 아뢴 것입니다. 어찌 대간을 두려워하리까."

연산군이 다시 전교했다.

“승정원이나 홍문관이 비록 대간을 비호하려 하지만, 죄 없는 대신을 비방하는 자를 국문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다시 말하지 말라."

이 날 홍문관 전한 이수공 등이 조순을 국문하라고 한 어명을 거둘 것을 간하였고, 7월23일에는 사간 홍식· 홍문관 직제학 홍한 등이 조순에 대한 처벌을 거둘 것을 간하였다.

연산군은 전교하기를, "아무리 대간이라 해도 어찌 ‘대신의 살을 씹어 먹고 싶다.’는 말을 하느냐. 추국한 후에 마땅히 처리하겠다." 하였다. 다시 대간과 홍문관이 조순의 일을 아뢰었으나, 듣지 않고 조순을 파직시켰다. 다행히도 국문은 면한 것이다.

7월24일에 대간들이 조순과 함께 자신들도 파직시켜 달라고 청했다.

“대간이 여러 날을 두고 논박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므로, 조순이 논박하는 즈음에 충분이 격동하여 아지 못하는 사이에 말이 중(中)을 잃은 것이니, 전하께서 마땅히 관용하셔야 할 것이온데 파직에까지 이르게 하십니까.

신 등이 당초에 조순과 같이 상의하여 말을 한 것이므로 피혐할 것을 청했는데 윤허하지 않으시니, 신 등은 청컨대 순과 함께 파직시켜 주소서. 만약 신 등의 피혐하는 것을 듣지 않으려면, 청컨대 조순을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빨리 노사신의 죄를 캐물으소서. 또 채윤공은 백성 다스리기에 적합하지 못하니 체직하소서."

연산군은 "만약 대간이 아니라면 죄가 곤장을 때려 귀양 보내야 하지만, 대간이므로 파직만을 한 것이다. 또 죄를 주고 안 주는 것은 위에 있고 아래에 있지 않은데, 어찌 하여 말이 이같이 번거로우냐." 하고, 듣지 않았다.

7월25일에도 조순을 파직시킨 일에 대하여 대간이 아뢰었다.

"신 등이 노사신· 채윤공 등의 일을 여러 날 논계하였으나, 한 차례도 전하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고 구차하게 직위에 있으니, 이미 공의(公議)가 부끄럽게 여기는 바 되었습니다. 또 똑같은 언사(言事)를 가지고 조순만이 파직을 당하였으니, 신 등도 직위에 눌러 있는 것이 불가하여 누차 사면을 하였사오나 윤허를 받지 못했습니다."

이에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

또한 홍문관 직제학 홍한 등이 차자(箚子)를 올려 조순의 복직하여 언로를 열 것을 청하였지만 역시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

7월26일에도 집의 강경서가 조순의 복직을 논했지만, 연산군은 거부했다.

"재상의 지위는 하루아침에 갑자기 올라간 것이 아니고 조종조(祖宗朝)를 내리 섬기어 높은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 것인데, 어찌 말 한 마디 잘못했다 해서, ‘그 살을 씹어 먹고 싶다.’고까지 할 수 있느냐. 만약 대간이라고 관용만 한다면, 끝내는 대간만이 말을 하게 장차 나랏일은 그릇될 것이다."

7월27일에 대사헌 이집, 사간 홍식이 아뢰기를, "조순은 말이 비록 광망(狂妄)했을망정 바른 말을 하여 그 책임을 다하자는 데에 불과한 것이오니, 청컨대 관용하소서."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 날 연산군은 고양군수 채윤공을 체직시키고 수령 중에 채윤공 같은 자가 있으면 적발하여 체임하게 하라고 각도 감사에게 유시하였다.

7월29일에도 대사헌 이집과 사간 홍식 등이 노사신을 하옥시키고 조순을 복직시키라고 아뢰었으나,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

8월4일에 경연에서 집의 강경서와 특진관 안침이 조순의 복직을 청하였으나, 연산군은 “복직시키는 일은 내가 알아서 하는 일이니 너희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단호히 거절했다. 1)

이로써 연산군 초반 정치세력의 관계가 명확해 졌다. 연산군은 삼사에 경고를 자주 했지만 제어가 안 되었고, 대신은 삼사의 극단적이고 끈질긴 탄핵에 위축되었다.

따라서 무오사화가 진행 중인 1498년 7월14일에 대간이 “홍문관·예문관 관원을 가두고 국문하는 것은 부당하옵니다.”한 것과 연산군이 듣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1) 1499년 7월에도 조순은 파직 상태였다. 정승들이 조순을 서용하도록 아뢰었지만, 연산군은 "조순은 일찍이 ‘노사신의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한 자이니 경솔히 서용할 수 없다.”하였다. (연산군일기 1499년7월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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