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도승지 임사홍의 말에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1478년 4월27일에 홍문관 부제학 유진과 예문관 봉교 표연말 등이 연명으로 상소했다. (성종실록 1478년 4월 27일 1번 째 기사)

(사진=선릉 비 앞면)

상소 요지는 이렇다.

"임사홍은 대간이 금주(禁酒)를 행하기를 청하여 임금이 허락하였는데 술을 금할 필요가 없다고 하고, 사치향락을 절제하도록 했는데도 그의 아들인 부마 임광재의 집은 대궐만큼 큽니다. 그는 음험(陰險)하고 방자하여 술수(術數)를 쓰며, 밖으로는 엄하고 굳센 듯하지만 안으로는 간사하고 아첨하여 옛 소인(小人)의 태도를 모두 겸하였습니다.

또한 임사홍의 아버지 임원준의 간사하고 탐욕스럽고 부패함은 한때의 으뜸이고 더러운 행적은 선조(先朝)에서부터 드러났습니다. 이들은 안팎으로 얽혀 권세가 빛나고 성하자, 바른 행실이 없는 무리가 바람을 따라가듯 따르니, 유식한 선비로서 한탄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습니다. 이에 신 등은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다음날인 4월28일에 임사홍이 예문관과 홍문관의 연명 상소에 대해 변명하고 대죄(待罪)를 청함에 성종은 대죄하지 말라고 하였다. (성종실록 1478년 4월28일 1번 째 기사)

이어서 성종은 창덕궁 선정전에 나아가서 대간과 홍문관·예문관의 관원들을 인견(引見)하고 임사홍의 일을 논의했다.

대사헌 유지는 "신 등이 임사홍의 말한 바를 보건대, 나라를 망하게 하는 말로서 총명을 막고 덮으며 대간을 저해하고 억제하였으니, 신 등은 놀라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겠으며, 그 듣고 본 것이 늦음을 한스러워 합니다."라고 말했다.

성종은 "임사홍의 말은 비록 이와 같았으나 그 뜻은 그렇지 아니하다. 그의 말은 대간을 저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

이어서 홍문관 부제학 유진이 "신 등이 일찍이 임사홍을 보고 소인(小人)이라고 의심하였는데, 이제 그 말을 보니 더욱 그 간사함을 징험하겠습니다." 라고 아뢰었고, 대사간 안관후도 "임사홍의 말한 바가 모두 음험하고 간사하니, 그 죄를 다스리지 아니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성종이 힐문하였다.

"법사(法司)에서 만약 흙비와 화재를 큰 재변으로 삼는다면 이보다 먼저 피전(避殿 : 나라에 재이(災異)가 있을 때 임금이 근신하는 뜻으로 궁전을 떠나 행궁(行宮)이나 별서(別墅)에 옮겨 거처하던 일)과 감선(減膳 :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 근신하는 뜻에서 임금의 밥상에 음식 가지 수를 줄이던 일)을 행하도록 계청(啓請)하지 아니하였는가?”

이러자 대사헌 유지가 "이 때에 비록 재변이 있었으나, 피전과 감선하는 데에는 이르지 아니하였습니다." 라고 변명했다,

성종은 성난 목소리로 "경등이 피전·감선에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임사홍이 ‘분명하게 나타난 재이가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과 무엇이 다른가?" 라고 물었다.

그러자 대사헌 유지는 "임사홍의 간사함은 이 두어 마디 말에서 징험할 수 있으며, 그 아비 임원준도 참으로 탐오(貪汚)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러자 성종은 "경등도 어질다고 할 수 없다. 만일 임사홍이 소인이고 임원준이 탐오한 것을 알았으면, 어찌하여 두려워서 몸을 움츠리고 말하지 아니하다가 홍문관·예문관에서 말하기를 기다린 뒤에야 논박(論駁)하는가?"라고 대사헌에게 물었다.

홍문관 응교 채수가 말했다.

"이는 다름이 아닙니다. 전일에 비록 임사홍이 소인(小人)인 것을 알았으나, 일찍이 행하는 일에 나타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감히 소인이라고 지목하지 못하였는데, 이제 말한 바가 모두 옛 간신(奸臣)의 말이므로 듣는 자가 놀라지 아니하는 이가 없으니, 청컨대 모름지기 버리소서."

성종은 홍문관과 예문관에서 만일 임사홍이 소인인 것을 알았으면, 어찌하여 일찍 아뢰지 아니하고 오늘날에 와서 말하느냐고 다시 성내어 말했다.

채수가 다시 말했다.

"임원준은 본래 간사하고 탐탁(貪濁 탐욕과 오탁)하다고 일컬었으나 아뢸 길이 없었는데, 이제 임사홍을 논하면서 허물이 임원준에게 돌아가서 ‘이는 임사홍만 간사한 것이 아니라 가정의 교훈이 바르지 못한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한 때문에 이에 미친 것입니다."

이윽고 유지 · 채수 · 유진이 모두 임사홍을 국문(鞫問)하라고 아뢰었다. 성종은 "그대들의 말을 다 믿을 수가 있겠는가? 그대들이 평일(平日)에 모두 임사홍이 소인임을 알았는가?"고 물었다.

좌우에게 모두 말하기를, "신 등이 예전부터 소인임을 알았습니다." 하였으나, 오직 유지와 안관후는, "신들은 같이 일을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사람됨을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성종은 일침을 놓았다. "그대들이 전일에 이미 임사홍이 소인인 것을 알았으면 일찍 아뢰지 아니하고, 지금에야 이 일 때문에 말하니, 진실로 임금의 덕을 보양(輔養)하는 실상이 없다."

표연말은 "임사홍의 소인된 마음이 아뢴 바의 말에 나타났으므로 신 등이 논하여 버리기를 청하였으나 성상께서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는데, 설사 평시에 탄핵하였다면 전하께서 어찌 믿겠습니까? 이것이 신등이 일찍 아뢰지 못한 까닭입니다."라고 말했다.

성종은 "내가 이미 알았으므로 장차 처리할 것이니, 경들은 물러가라."고 하였다.

하지만 신하들은 즉시 조치하라고 논청(論請)을 그치지 아니하였다.

성종은 “임사홍이 비록 대간을 견책하라는 말을 분명히 말하지 아니하였으나, 그 말한 바가 지나치다. 내가 장차 국문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승지에게 이르기를, "이조(吏曹)로 하여금 급히 제목(除目 관리를 제수한 뒤 만드는 목록)을 내리게 하라." 하였다.

그러자 허침이 그 아비 임원준은 어떻게 처리하시려는지 물었다.

성종은 "임원준은 추고(推考)할 수 없다." 고 하였다.

채수는 청컨대 임원준의 경연의 직임을 파하소서. 만일 임원준을 파면하지 아니한다면, 신 등을 파직시키라고 말했다.

이에 성종은 "마땅히 그대들의 말과 같이 하겠다." 하면서 손순효 등에게 말하기를, "홍문관·예문관에서 임사홍이 소인임을 알면서 일찍이 말하지 아니하고 오늘에 이르러서야 말하니, 이는 임금의 덕을 보양(輔養)하는 실상이 없으므로 국문하게 하라." 하였다.

(성종실록 1478년 4월 28일 3번째 기사)

이런 논의가 있은 후 좌참찬 임원준이 탄핵당하는 부당성을 지적하고 사직을 청했다. 성종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성종실록 1478년 4월28일 4번째 기사)

이날 성종은 임사홍의 고신(告身 임명장)을 거두고 홍문관·예문관의 관원들을 파면하라고 이조에 명하였다.

"홍문관·예문관의 관원이, 임사홍은 소인(小人)이며 임원준은 간사하고 탐욕 · 오탁(汚濁)한 것을 알면서 도승지와 좌참찬을 제수할 때에 세력을 두려워하여 논계(論啓)하지 아니하였으니, 자못 임금의 덕을 보양(輔養)하는 뜻이 없으므로 그 벼슬을 파면하라.

임사홍은, ‘대간의 말하는 일이 지나치고 번거로우니, 마땅히 견책(譴責)의 뜻을 보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였다, 무릇 그 말한 바가 언로(言路)에 방해됨이 있었으니, 그의 고신을 거두라."

(성종실록 4월 28일 1478년 6번째 기사)

이리하여 임사홍은 도승지에 임명된 지 20일 만에 해임되었다.

(사진=선릉 비 뒷면)

 

(사진=선릉 비 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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