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지역운동으로 ‘상록수 박종호’로 불리기도

처음 출마해 현직 조합장과 유력후보 물리치고 당선
조합장 임기 중 지역 분뇨처리장 완성하는 게 목표
축산업 6차산업 접목 위해 다양한 정책 개발할 것

박종호 함양산청축협 조합장은 선거에 처음 나와서 현직조합장과 쟁쟁한 경쟁자를 물리치고 당선됐다.

[한국농어촌방송/경남=황인태 대기자] 박종호 함양산청축협 조합장은 이번에 선거에 처음 출마해 현직 조합장과 유력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당선됐다. 선거는 평생 처음 해 보았다. 그런데도 현직을 비롯한 쟁쟁한 후보를 이겼다.

박 조합장은 이에 대해 자신이 평생 지역에서 봉사하며 살아온 바를 조합원들이 평가해 준 것으로 생각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박 조합장은 고향에 귀향한 이후 농민운동과 지역운동을 활발히 하며 살았다. 언론에서는 이런 박 조합장에 대해 심훈의 농촌계몽소설인 상록수를 비유해 ‘상록수 박종호’라고 불러 주기도 했다.

박 조합장은 현재 축협은 함양·산청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급격한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우루구아이 라운드, 한미 FTA, 환경문제에 대한 강화 등으로 축산업 자체가 근본적인 도전을 받고 있는 형편이라는 것.

이에따라 박 조합장은 축협 조합장으로 활동하는 임기 중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축산제품의 소비증가를 가져오도록 하는 일이라고 했다. 현재 소고기 소비는 매년 6~7%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는 유력 식자재이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소고기 소비가 늘어나고 있지만 축협 조합원들이 생산하는 한우 소비는 매년 줄어들고 있다. 한때 60%를 넘던 한우 점유율은 현재 40%를 밑돌고 있다. 이런 추세를 반전시켜야 하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게 박 조합장의 고민이다.

외국 소고기 수입업자들은 물량 공세로 소비자들을 공략하고 있다. 한우도 박리다매가 정답이라는 게 오랫동안 한우를 키워온 박 조합장의 진단이다. 그러나 조합원들을 설득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봤다. 그래도 박 조합장은 임기 중 함양 한우 브랜드를 만드는 것에서부터 함양 소고기 소비 확대를 위해 최선을 노력을 해 나갈 것이다. 박 조합장 혼자만의 힘으로 되지는 않겠지만 지금까지 농민운동을 해 왔던 역량을 총동원 할 것이다.

박 조합장의 임기 중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과제는 축산분뇨처리장 건설 문제이다. 산청은 처리장이 있다. 그러나 함양은 아직 처리장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분뇨처리장 문제는 자금문제가 아니라 주민들을 설득하는 게 과제다. 다행히 조합의 분뇨처리장 운영노하우는 전국 최고수준이다. 이를 잘 홍보해 주민들을 설득하면 자신의 임기 중 처리장을 완료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박 조합장은 무엇보다 조합원들에게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갖도록 해 주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국내외 여건이 좋지 않다보니 조합원들이 기가 많이 죽어있다는 게 박 조합장의 진단. 그래서 박 조합장은 임기 중 우리도 잘 할 수 있다는 비전을 제시해 줄 생각이다. 박 조합장은 우리 축산이 살기 위해서는 결국 6차 산업으로 가야 한다고 보고 있다. 축산도 관광과 접목해야만 수익률이 높아진다는 것. 양떼 목장들이 체험과 접목해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과 치즈체험이 활성화 되고 있는 사례 등을 보면 가능성이 있다는 게 박 조합장의 진단이다. 이런 것들을 위해 박 조합장은 임기 중 조합원들과 소통을 늘려가겠다고 했다.

박종호 조합장은 1960년 함양군 휴천면에서 태어났다. 외가가 있는 산청 생초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후 중고등학교는 다시 함양으로 왔다. 그런데 박 조합장은 그러나 고등학교를 다 마치지 못했다고 한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고등학교 다닐 때 엉뚱한 행동을 많이 해 중간에 퇴교했다. 사춘기 때는 부모님 애를 많이 먹였다고 했다. 사회생활을 할 때도 엉뚱한 행동은 그치지 않았다. 1987년 부산의 모 대학 앞에서 복사 집을 운영하던 때이다. 그해 여름 태풍 셀마가 와서 함양, 산청 등이 사상최대의 피해를 보았다. 그 소식을 접하자 박 조합장은 사재를 털어 수재 복구 동참 호소문을 만들어 대학가를 돌며 뿌렸다. 그러자 대학생들이 호응해 부산의 동아대 학생 500~600명이 함양에 와서 봉사활동을 했다. 당시는 대학생들의 움직임에 사정당국이 민감하게 움직일 때였다. 잘 못했다가는 사정기관에 잡혀가 고문당한다며 주변에서 모두들 말렸다. 그럼에도 박 조합장은 고향의 어려움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 같은 박 조합장의 행동은 평생을 이어졌다. 이제 자신이 업으로 삼고 있는 축산업의 농협 조합장이 됐다.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펼 수 있는 수단을 갖게 된 것이다. 박 조합장은 평생 살아온 농민과 이웃을 위한 여정이 축협 조합장에서 마지막 불꽃을 피울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박종호 조합장과의 인터뷰이다.

▲조합의 이름을 보니 함양축협과 산청축협이 합병된 것 같다.

-그렇다. 2012년도에 합병을 했다.

▲산청군과 함양군은 경쟁 심리도 강할 텐데 어떻게 합병이 됐나.

-그때 양돈농가들이 어려움이 많았다. 그렇다 보니 농가들의 부실채권이 늘어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합의 규모가 커져야 했다. 그래서 중앙회가 권고를 했고 이를 받아들여 합병을 하게 됐다. 산청축협은 진주축협 등과도 합병을 검토했지만 최종적으로 함양조합을 선택했다.

▲조합장은 이번이 초선인가.

-그렇다. 선거에 처음 나왔다.

▲경쟁자가 몇 명이었나.

-현직 조합장을 포함해 3명이었다.

▲그럼 현직 조합장을 상대로 해서 이긴 건가.

-그렇다.

▲득표율이 어떻게 되나.

-제가 41%정도 되고 나머지가 29%였다. 약 12%포인트 차이가 났다.

▲현직을 포함해 3명이 경쟁해 41%의 득표를 한 거면 상당한데. 이유가 뭔가.

-그동안 제가 살아온 것들이 평가된 것 같다.

▲주로 어떻게 살아왔나.

-조합에 근무하지는 않았다. 주로 농민운동과 사회운동을 많이 했다. 농민들의 어려운 점이나 축산업이 나가야 할 방향들에 대해 운동도 많이 하고 신문에 칼럼도 많이 썼다. 그래서 주변에서 심훈의 농촌계몽소설 상록수에 나오는 주인공을 빗대 ‘상록수 박종호’라는 호칭으로도 불린다. 제가 사는 모습이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을 닮았다고 언론에서 그런 이름을 붙여준 것 같다. 이번 선거에서도 제 삶의 그런 모습들을 평가받은 것 같다.

▲선거 때 쟁점이 뭐였나.

-쟁점 보다는 인물에 대한 평가가 중요했던 것 같다.

▲그럼 박 조합장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어떠했나.

-빈말하는 사람 아니다.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다. 이런 평을 들었다.

▲실제로도 그런가.

-저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그래서 쉽게 말하지도 않지만 말 한 것은 꼭 지킨다. 제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면서 살아오지는 않았다. 늘 함께 잘 사는 농촌을 생각하며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선거를 해 보니 어떻던가. 생각하고는 많이 달랐을 텐데.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많이 도와줬다. 어쨌든 선거이니까 저도 발품을 많이 팔았다. 이번 선거가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는데도 크게 도움이 될 것 같다.

▲조합장으로 임기 중에 해결해야 할 함양 산청축협의 과제는 뭔가.

-가장 시급한 부분이 축산환경을 개선하는 일이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잘 못 알아듣겠다.

-쉽게 말하면 축산분뇨처리장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

▲함양에는 분뇨처리장이 없나.

-없다. 산청에는 있다. 산청 분뇨처리장은 잘 운영되고 있다. 그래서 산청에서는 분뇨처리가 80%이상 이루어지고 있다. 이에 반해 함양은 처리비중이 60%도 안 된다. 그래서 함양에 분뇨처리장을 만드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임기 중에는 분뇨처리장을 꼭 완성할 생각이다. 정부도 지원하는 사업이기 때문에 예산은 큰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혐오시설이기 때문에 주민 반대가 심하다. 그래서 주민들을 어떻게 설득하는지가 관건이다.

▲주민들 설득할 복안은 있나.

-사실 우리조합의 분뇨처리장 운영 노하우는 전국 최고수준이다. 지난 3월 22일 전국 축협 액비처리공장으로서 우리 조합이 전국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만큼 우리 조합의 분뇨처리공장 운영수준이 높다는 의미이다. 이런 사실들을 주민들에게 잘 알려서 설득하려고 한다.

▲처리장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약 50억 원 정도 들어갈 것으로 보고 있다. 자금은 큰 문제는 아니다. 에너지 화 사업을 같이 할 건가 등을 검토해 봐야 하는데 에너지기술은 아직 완전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분뇨처리장 외에 현안은 어떤 것이 있나.

-다들 알다시피 축산물 소비를 확대해야 한다. 그중에서도 소고기 소비를 확대해야 한다.

▲소고기 소비 실상이 어떻게 되나.

-매년 소고기 소비시장이 6~7%씩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한우는 시장 점유율이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다. 지금 소고기 시장에서 한우가 차지하는 비중이 40% 이하로 내려왔다. 그대로 두면 어디까지 내려갈지 모른다.

▲이유가 무엇인가.

-수입 소고기들이 마케팅을 잘한다. 우리 입맛에 맞는 소고기를 개발하고 대규모 판매장 등을 통해 소비자들을 파고들고 있다. 농협이나 축협도 매장도 있긴 하지만 외국소고기 수입업자들의 매장에 비교가 안 된다.

▲그럼, 박 조합장의 복안은 무언가.

-우리도 일단 박리다매로 가야한다. 그런데 이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그래도 제 임기 중에 어떻게든 함양 소고기 판매를 늘릴 수 있는 정책을 마련할 것이다.

▲또 다른 현안은.

-조합원들에게 비전을 제시해 주는 일이다. 우리는 희망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비전을 제시해서 조합원들이 노력할 수 있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박 조합장이 구상하고 있는 희망의 복안은 있나.

-크게 보면 축산업도 이제 6차 산업으로 가야한다. 생산과 가공 그리고 관광까지 포함된 체험 등으로 가야한다. 그래야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다. 양을 키우는 목장은 양 목장을 개방해 체험을 한다. 또 목장에서 치즈공방을 운영하는 곳도 있다. 돼지도 소시지 체험 등을 개발하면 된다. 이처럼 이제 축산도 6차 산업이 가야할 방향이다. 이런 것들에 대해 조합원들과 더 소통하고 공감대를 형성할 것이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 보자. 언제 어디서 태어났나.

-1960년 함양군 휴천면 금발리라는 동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함양농고를 졸업하시고 농사를 짓고 계셨다.

▲공부는 어디서 했나.

-저는 태어나기는 휴천 금발리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처갓집이 있는 생초에서 농사를 지었다. 할아버지의 철학이 자식들이 관직에 나가는 것을 금지하셨기 때문에 농사를 짓기 위해 처가동네로 이사를 갔던 것이다. 그래서 초등학교를 생초초등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제가 학교 다닐 때에 좀 엉뚱한 짓을 많이 해서 고등학교를 다 다니지 못했다. 엉뚱한 짓은 사회생활을 할 때도 계속됐다.

▲조합장의 엉뚱한 짓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하나만 들어 달라.

-87년 때이다. 그때 태풍 셀마가 와서 함양, 산청 등의 수재피해가 많이 났다. 그때는 부산의 모 대학 앞에서 복사 집을 운영하고 있을 때이다. 그런데 고향에 수재가 났다는 소식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100만 원을 들여서 호소문을 만들어 각 대학

앞에서 나눠줬다. 그랬더니 동아대 학생 500~600명이 함양 휴천에 와서 수재복구 봉사활동을 했다. 87년이면 정치적으로 어려울 때이다. 대학생들의 움직임에 사정기관들이 민감할 때이다. 주변에서 학생들을 동원하면 개인적으로 어려움에 처할 수도 있다며 말리는 사람도 많았다.

▲당시 100만원이면 적지 않은 금액인데.

-그때 제 재산이 600만원인가 그랬다. 개인에게는 큰돈 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은 저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늘 그런 방식으로 살았다. 혼자 잘살기 보다는 함께 잘살아야 된다는 게 제 소신이었다. 그 이후에도 그런 일들을 많이 했다. 지역과 농민이 잘사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했다.

▲지역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어떤 게 있나.

-제가 자리 잡은 함양군 유림면은 별 특별한 관광자원이 없다. 그래서 역사스토리텔링을 만들어 봐야 겠다, 고 생각했다. 그렇게 노력하는 가운데 고려 때 대학자 목은 이색선생이 유림면에 은둔했던 기록을 찾아냈다. 그렇게 해서 목은 선생이 낚시를 했던 낚시터, 목은 선생 가묘 등을 잇는 목은선생 탐방 길을 만들었다.

▲함양산청축협과는 어떻게 인연이 됐나.

-30년 전에 산청생초로 귀농을 했다. 초등학교를 다닌 생초로 귀농을 해서 염소 몇 마리와 소 두 마리를 키우기 시작했다. 그게 축산과의 첫 인연이다.

▲그럼 그렇게 해서 축산 인이 된 건가.

-아니다. 산청에서는 축산인이라고 불리기 민망할 정도로 소규모였다. 그래도 축산인이라고 불릴 만 하게 된 것은 함양으로 이주하고 나서부터이다. 함양 유림에서 본격적으로 축산을 하기 시작했다.

▲왜 산청에서 하지 않고 유림으로 왔나.

-2004년 루사 태풍으로 제 농장이 모두 물에 잠겨버렸다. 그런데 축사를 새로 지으려니 산청은 축사허가가 나지 않았다. 제 논이 대부분 강가에 있어서 그랬다. 그래서 생초에서 가까운 유림으로 왔다. 당시 사용하던 축사를 인수해서 소를 키우기 시작했다.

▲농민운동을 주로 했다고 했는데 어떤 운동을 했나.

-산청 있을 때 낙우회, 농업경영인 모임, 축산단체 활동 등을 많이 했다. 일을 하지 않고 이런 단체들의 활동을 하느라 아내 고생을 많이 시켰다. 소는 키우지 않고 바깥으로만 돈다는 잔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래도 나 혼자 잘사는 것 보다는 전체 축산인이 잘 살아야 된다는 생각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이제 축협이라는 활동무대를 얻었으니 본격적으로 농민이 잘사는 사회를 만들어 봐야겠다.

-그렇게 할 것이다. 함양, 산청 조합원들이 아직 실질적인 통합을 이루지 못한 부분도 있다. 그런 실질적인 통합을 위해서도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정리할 사업과 새로 해야 할 사업들을 잘 구분해서 조합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게 할 것이다.

▲언제까지 조합장을 할 건가.

-3선까지 할 생각은 없다. 원래 나 아니면 안 된다는 그런 생각은 없는 사람이다. 주어진 기간 동안 최선을 다해보고 미련 없이 떠나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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