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부칼럼-협동조합은 바른마음이다.

[한국농어촌방송=최양부 바른협동조합실천운동본부 이사장] 1844년 로치데일 협동조합이 탄생하기 전까지 영국에서는 이미 80여 년간에 걸친 협동조합 운동의 실험이 계속되었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실패의 지식’을 축적해 왔다.

그리고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협동조합의 실천적인 방안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고뇌의 산물이 로치데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로치데일 협동조합이 성공하게 된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면 ‘왜 로치데일인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로치데일 시 (사진=위키백과)

로치데일은 영국의 신흥 공업 도시를 대표하는 맨체스터의 영향을 받은 수공업으로 하는 플란넬 제조업의 중심도시였다. 19세기 초가 되면서 전력 방직기의 등장으로 수공업적 방직업은 경쟁력을 잃고 로치데일은 쇠퇴일로에 있었다.

역사가들이 ‘기아의 40년대’라고 부르는 1840년대의 로치데일에는 빈곤과 굶주림, 실업 등의 혹독한 시련이 몰아쳤다 로치데일의 노동자들은 이런 경제 환경변화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었고 그들의 삶은 비참 그 자체였다.

오언주의의 사상적 영향을 강하게 받은 로치데일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바꾸어 보기 위해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운동을 했다. 로치데일은 사회변혁을 바라는 개혁적 노동운동과 급진정치의 중심이 되었다.

로치데일의 오언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권익획득을 위한 차티스트 운동 등 노동운동과 사회개혁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819년에는 로치데일에서 개혁 회의가 열렸으며 1만3000여 명의 사람들이 참석했다고 한다.

1808년과 1829년에는 노동자들의 격렬한 파업이 일어났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진주한 군인들이 1846년까지 로치데일에 상주했다고 한다. 로치데일은 노동자 중심의 급진개혁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이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로치데일 협동조합의 설립에 참여하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또 한 가지 로치데일과 관련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로치데일이 1800년대에 이미 협동조합 운동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이다. 1830년에 60여 명의 수직 방직공들이 참여하여 ‘로치데일 공제협동조합 (Rochdale Friendly Co-operative Society)’을 만들었으며 1833∼35년간 토드레인 거리에서 이미 매장을 운영했다.

로치데일 협동조합을 설립한 지도자들은 이미 협동조합에 대해 알고 있었고 실패를 경험해온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은 누구보다도 성공한 협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고심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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