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장
이화장 안내판

[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1498년 7월14일에 윤필상등은 권오복을 국문할 것을 청했다.

윤필상 등은 권오복이 김일손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만 듣건대 그대들이 개현(改絃)하기에 급하여 만사를 일신하려고 하다가 뭇 비방을 샀다니, 통곡하고 유체(流涕)함이 마치 낙양(洛陽)의 소년과도 같은데 도리어 강후(絳侯)와 관영(灌嬰)들에게 단척(短斥)한 바 되었다.’는 등의 말이 있었다하여 권오복을 잡아다 국문할 것을 청한 것이다.(연산군일기 1498년 7월14일 7번째 기사)

권오복의 편지는 김일손을 잡으러 경상도로 간 의금부 경력 홍사호 등이 김일손의 집을 수색하여 찾아낸 편지(의금부 경력 홍사호등이 가택 수색한 김일손의 집이 고향인 경상도 청도인지, 아니면 김일손이 잡혀간 함양인지는 불분명하다)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12일 3번째 기사)

권오복의 편지를 읽어보자.

“두 번이나 편지를 받아 헌납(獻納)하기에 빈 날이 없는 가 살폈으니, 벗의 기쁨을 가히 알겠도다. 다만 듣건대 그대들이 개현(改絃)을 하기에 급하여 만 가지 일을 모두 일신하게 하다가 뭇 비방을 샀으니, 통곡하고 유체(流涕)함이 저 낙양 소년과도 같은데, 도리어 강후(絳侯)와 관영(灌嬰) 등에게 단척 되는 것이 아닌가.

몸이 먼 지역에 있으나 일찍이 그대들을 위하여 위태롭게 여기지 않은 적이 없노라. 또 듣자니 ‘상재(祥齋)를 간(諫)하다가 허락을 얻지 못하고 호부(戶部)로 체임(遞任)되었다.’하는데, 과연 그런가? 이 해도 거의 다 갔으니, 이별의 그리움이 더욱 괴롭구려!”

이 편지는 1496년 초에 권오복이 함창현감(지금의 경북 상주시 함창읍) 시절에 쓴 것(1495년 6월29일 연산군일기에는 ‘홍문관 부교리 권오복이 병든 어머니가 있으므로 돌아가 봉양하기를 청하니, 가까운 고을의 수령(守令)에 제수하였다’고 적혀 있다)이다.

이승만 박사 동상. 이승만 박사 동상 아래에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이 새겨져 있다.
이승만 박사 동상. 이승만 박사 동상 아래에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이 새겨져 있다.

편지에는 ‘김일손이 헌납 벼슬을 하다가 호조좌랑으로 체임되었다’는 글이 있는데, 김일손은 1495년 10월에 사간원 헌납에 임명되어 1월까지 일했고, 2월에 모친의 병환으로 사직서를 내고 경상도 청도로 내려갔다. (탁영선생 문집, 탁영선생 연보, p 694)

권오복은 김일손이 개현(改絃 악기의 줄을 바로 잡는다는 뜻, 즉 개혁) 하려다 배척되었음을 아쉬워하고 있다. 즉 김일손을 중국 한나라 때 낙양 소년 가의(賈誼 BC 200 ~168)의 처지와 같다고 본 것이다.

가의는 18세에 수재라는 평판이 높았고, 22세 때에 박사관(博士官)에 임명되었으며 태중대부(太中大夫)에 발탁되었다. 그는 한나라의 제도와 역법을 개정할 것을 천자에게 진언하였지만 강후(絳侯: 주발(周勃)을 말함)와 관영(灌嬰)등의 수구파 대신들의 반대를 받아 개혁이 좌절되었다. 사마천의 『사기』에 나온다(관영은 중국 한나라 고조 6년(기원전 201) 영음후(潁陰侯)에 봉해졌고 주발과 함께 대신과 승상(丞相)을 하였다).

동상 아래에 적힌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동상 아래에 적힌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그러면 여기에서 성종(1457∽1494, 재위 1470∽1494)이 돌아가신 이후 김일손의 행적부터 살펴보자.

1494년 12월24일에 성종임금이 승하하자 김일손은 울부짖었다.

“하늘이여 우리 동국이 요순의 치세를 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까?

복이 없는 창생을 버리시면 누구에게 복을 내리시려는 것입니까?

너무 하오이다.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나이까(이종범, 사림열전 2, 아침이슬, 2008, p 334.)”

1495년(연산군 1년) 3월에 김일손은 사직과 동시에 하사받은 집을 반환하고 청도로 귀향했다. 성종은 영의정을 한 최항(1409∼1474)이 살던 낙산 아래의 집을 사들여서, 1490년 3월에 요동질정관으로 중국에 갔다고 돌아온 김일손에게 주었다(김일손은 1489년 11월에 요동질정관으로 임명되어 중국에 갔다가 1490년 2월에 북경에서 돌아왔다. (탁영선생문집 p 690-691)). 김일손이 모친 봉양을 위해 사직을 청하자 모친과 함께 기거토록 한 성종의 배려였다.

한편 김일손은 바위 샘 위에 1칸 자리 정자를 짓고 ‘이화정(梨花亭)’이라 이름 지었다. 봄이면 주위가 하얀 배꽃으로 물들 정도로 배나무가 많았기에 그렇게 지은 것이다.

천안역 앞의 조병옥· 유관순 · 이동영 사진
천안역 앞의 조병옥· 유관순 · 이동영 사진

김일손은 ‘집 모퉁이에 핀 배꽃(屋角梨花)’ 시를 지었다.

이 시는 성종이 지은 ‘비해당(匪懈堂) 48영 차운 시’에 답한 시이다. 성종은 ‘비해당 48영 차운 시’를 홍귀달, 채수, 유호인, 김일손에게 차운 시를 올리도록 했다. 원래 ‘비해당 48영시’는 세종대왕의 3남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이 자신의 별장인 비해당의 풍물 48가지를 읊은 시이다. 안평대군은 1450년 가을에 ‘48영 시회’를 열었는데 이 모임에는 당대 문사인 최항 · 신숙주 · 성삼문 · 이개 · 김수온 · 서거정 · 강희맹 등이 참여했다. 안타깝게도 안평대군은 1453년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 (나중에 세조 임금)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러면 김일손이 지은 시(김일손이 1493년 8월에 호당에서 사가독서 할 때 지었다)를 감상해보자.

집 모퉁이에 핀 배꽃 (屋角梨花)

눈 맞은 나무 봄기운 이니 더욱 화창하고

노란 빛 쪼그린 여린 새잎에 꽃 피네

흰 소매는 서리를 깔보니

수심 젖은 흰나비 곱게 치장한 미혹한 달 젊은 미인 질투하네.

가벼이 바람 불어 꽃향기 가득 이르고

쓸쓸히 비 내려 눈물 자욱 비껴 있네.

비록 맑고 깨끗함이 색칠하지 못했어도

화려함 뽐내는 붉은 복사꽃 보다 낫네.

이왕이면 성종의 시도 함께 감상하자.

다정이 봄날이 알맞게 맑고 화창하니

집 모퉁이의 배나무가 백설 같은 꽃을 피웠네.

안 뜰에 맑고 밝은 달을 감춰둔 듯

정자 난간에서 곱디고운 달빛에 취하네.

짙은 향기는 순로(전설속의 향초)의 향기가 뼈 속에 스미는 듯

맑은 그림자가 바람에 쏠리니 월말(越襪)이 비낀 듯하네.

옥 같은 천연의 꽃모습은 조물주의 교묘한 솜씨인데

두견새의 맑은 소리 봄의 좋은 시절 기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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