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5년 2월28일에 제천현감 권경유는 수륙재를 파하고 유생을 사면하여 주기를 바라는 상소를 하였다 (연산군일기 1495년(연산1년) 2월28일 2번째 기사). 김일손을 만나기 전이었다. 당시는 성균관 유생들이 수륙재 올리는 것을 반대하였다. 연산군이 이들을 죄주려 하자, 대간과 홍문관이 유생을 죄주는 것이 타당치 못함을 논계하였으나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 연산군은 1495년 1월27일에 정희량을 해주로, 이목을 공주로, 이자화를 금산으로 귀양 보내고, 생원 조유형 · 임희재 등 21인의 과거 응시를 정지시켰다.

그러면 제천현감 권경유의 상소를 읽어보자.

"신이 변변하지 못한 자격으로 선릉(宣陵 성종을 말함)에게 지우(知遇)를 얻어 오랫동안 경연(經筵)에서 모시게 되매, 외람되이 난육(卵育 나서 기른다는 뜻)의 은혜를 입었고,

지극히 미미한 보답도 바치지 못하였으니, 거의 심력을 다하여 견마(犬馬)의 나이를 마쳐야 할 처지인데, 국상(國喪)의 화가 갑자기 이때에 미칠 줄을 어찌 알았으리까.

멀리 궁벽한 고을에 있으면서 듣자오니, 전하께서 출천(出天)의 효성으로 한 결 같이 예법을 준수하시어 어질다는 소문이 사방에 넘치고, 온 나라 신민들이 모두 환희에 차서 한길 가에 나와 서로 경축하니, 종사(宗社)와 신민의 복이라 어찌 말로 다 형용하리까.

대행대왕(성종)께서 덕이 천지와 합하시고, 밝으심이 일월과 어울리시어 털끝만한 과오도 없으시니, 온 나라 신민이 우러르기를 일월 같이 하고 추대하기를 천지와 같이 하였는데, 신민이 복이 없어서 문득 모든 신하를 버리고 가시니, 모두 하늘을 부르짖어 통곡하며 부모를 잃은 것처럼 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조종(祖宗)의 업을 받으시고, 지성(至聖)의 뒤를 이으셨으므로, 만약 한 가지 정사라도 마음에 흡족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신민의 설움은 더욱 더할 것입니다. 신이 한 모퉁이 벽지에 치우쳐 있으므로 자상히 들을 수는 없습니다만, 그 사이에 한두 가지 부당한 것이 있습니다.

칠칠일의 재는 선왕(先王)의 예가 아니옵고, 바로 불씨(佛氏)의 교(敎)입니다. 불씨의 그름은 선유(先儒)가 자상히 논하였으니, 전하께서 환히 아실 것이므로 신이 감히 다시 덧붙이지 아니하겠습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진지한 군자(君子)는 복을 구함이 사특하지 않다.[豈弟君子 求福不回]’ 하였고, 한유(韓愈)는 말하기를 ‘불(佛)이란 과연 어떤 사람인가? 그 소행이 군자인가? 소인인가? 군자라면 반드시 도(道)를 지키는 사람에게 함부로 화를 가하지 아니할 것이요, 소인이라도 그 몸이 이미 죽었으니, 그 귀신도 영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대행 대왕께서 예법에 의하여 행동하시고 지나치신 일이라고는 조금도 없으셨으며, 또 복전(福田)의 이익을 구하지 아니하신 것은 온 나라 사람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복전(福田)은 불가(佛家)의 용어이다. 사람이 응당 공양할 자에게 공양 하면 장래에 모든 복의 응보를 받는 것이 마치 밭에 파종하면 추수할 가망이 있는 것과 같으므로 복전(福田)이라 하였다. 《무량수경(無量壽經)》 정영소(淨影疏)에 "세상의 복과 선(善)을 생산하는 것이 밭에서 만물이 생장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복전이라 한다." 하였다.

상소는 이어진다.

“신은 일찍이 듣자오니, 무릇 수륙(水陸)의 법석(法席)에서는 세 번 신판(神板)을 목욕시키며 말하기를 ‘옛 악을 씻어버린다.’ 하고, 늙은 중이 외치면서 신판을 향해 뜰에서 절을 하는 말이 ‘부처에게 사과한다.’ 하는데, 한갓 입으로 차마 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귀로 차마 들을 수 없다 합니다. 대행 대왕께서 무슨 악을 씻을 것이 있으며, 무슨 사과할 일이 있습니까. 과실이 없으신 성(聖)으로서 부처 앞에 굽히신다는 것을 생각할 때, 신은 마음에 쓰라려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신은 전하께서 부처에 혹하지 아니하면서도 삼전(三殿) 때문에 마지못하신 것임을 모르는 것은 아니오나, 전하께서 만약 기를 낮추고 얼굴 빛을 화하게 하여 격언(格言)을 자주 드리시면 머지 아니하여 돌아오실 것이니, 하늘에 계신 성령(聖靈)으로 하여금 부처에 굽히시는 욕을 면해 드리고, 전하의 정사로 하여금 한 결 같이 정(正)에서 나오게 하신다면, 하늘에 계신 성왕께서 반드시 전하의 명성(明聖)하시고 신자(臣子)의 도(道) 잘 지키는 것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삼전은 내전의 세 분 왕후들이다. 덕종 비 소혜왕후(성종 모친, 인수대비 : 1437-1504), 예종 비 안순왕후(? -1498), 성종 비 정현왕후(1462-1530)가 삼전이다. 한편 인수대비는 연산군의 친할머니였고,

성종 비 정현왕후는 연산군의 배다른 동생인 중종의 친모였다.

권경유의 상소는 이어진다.

“전하께서 만약 조종(祖宗) 때부터 해 내려온 일이니 폐할 수 없다 하신다면 신의 의혹은 더욱 심합니다. 공자의 말씀에 ‘만약 도(道)가 아닐진대 어찌 3년을 기다리랴.’ 하였으니, 불공하는 재를 도라 여기십니까? 도가 아니라 여기십니까? 대행대왕께서 대개 옛 법을 따르시어 선왕의 법전을 변경하지 않으셨지만, 축수(祝壽)의 재는 유래가 오래인데도 개혁하여 의심하지 않으셨고, 도승(度僧)의 법도 구전(舊典)에 실려 있지만 역시 제거하게 하셨으니, 선왕의 고전(古典)을 고치기가 어렵다는 것을 모르신바 아니나, 그것이 도가 아니라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고치기를 꺼리지 않으신 것입니다.

또 우리 태종대왕께서 성학(聖學)이 고명하시어 강상(綱常)을 바로 세워, 자천(資薦)하는 법석(法席)을 일제히 혁폐하고 산릉(山陵)에 재찰(齋刹)을 세우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다 열성(列聖)의 물려주신 법전인데, 어찌 이 물려주신 법전에 따르지 아니하시고 인습된 폐단을 고수하십니까.”

조선은 억불숭유(抑佛崇儒)의 나라였다. 그런데 불교의 법도인 수륙재를 지내려 하다니. 권경유의 상소는 차분하면서도 논리적이다.

선릉(성종임금)의 분묘 (사진=김세곤)
선릉(성종임금)의 분묘 (사진=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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