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현감 권경유를 만나고 경상도 청도군으로 귀향한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은 고향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1495년 5월경에 김일손은 충청도 도사로 발령받았다. 이 때 그는 ‘시국에 관한 이익과 병폐 26개조’를 상소하였다. 1495년 5월28일자 ‘연산군일기’에 나온다.

그러면 여기에서 1464년부터 1495년까지 김일손의 행적부터 살펴보자. 김일손은 경상도 청도군에서 부친 김맹, 모친 용인이씨의 3남으로 태어났다. 1478년에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17세인 1480년 9월에 밀양에 가서 김종직 문하에 들어가 공부했다. 그는 1486년 10월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11월에 승문원 권지부정자에 제수되었고 12월에 정자 겸 춘추관 기사관이 되었다. 1487년 10월에는 노모 봉양을 위해 진주 목학의 교수로 부임했다가, 1489년 11월에 요동 질정관으로 중국 북경에 다녀왔다.

1490년 3월에 김일손은 승정원 주서 겸 예문관 검열에 제수되었고, 8월에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11월에는 진하사 서장관으로 연경에 가서 1491년 3월 중국에서 귀국하였다.

1491년 8월에 김일손은 병조좌랑·이조좌랑이 되었는데 10월에는 충청도사에 보임되었고, 1492년에는 홍문관 부교리에 직을 두고 호당에서 사가독서 했고, 1493년 1월에는 홍문관 교리로 승진했으며, 7월에는 예문과 응교로 직을 두고 사가독서 했다. 1494년 9월에는 이조정랑 겸 춘추관 시독관에 제수되었는데 12월24일에 성종이 승하하였다. 김일손은 1495년 2월에 사직하고 낙향했다가 5월에 충청도 도사로 근무하였다.

이제 김일손의 ‘시국에 관한 이익과 병폐 26조목’ 상소문을 읽어보자

(연산군일기 1495년(연산 1년) 5월 28일 5번 째 기사)

충청도 도사(忠淸道 都事) 김일손(金馹孫)이 상소하기를,

"신이 금년 2월 5일에 의정부 사인사(議政府 舍人司)에서 전지를 받들어 신에게 이문(移文)한 것을 삼가 받자오니, ‘내가 덕이 없이 큰 자리를 이어받아서 애통한 상중(喪中)에 어찌할 바를 모르니, 가언(嘉言 아름답고 좋은 말)과 선정(善政)을 어찌 듣겠으며, 민간의 이익과 폐단되는 것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대소 신민(大小臣民)들로 하여금 내가 처음 즉위한 뒤에 여러 신하에게 묻는 뜻에 맞추어 각기 시국에 마땅한 것을 진술하여 실봉(實封)으로 올리라.’ 하셨으니, 신이 받들어 읽으매 눈물이 흘러서 말할 바를 알지 못하옵고, 곧 관내(管內) 54개 고을에 반포하였는데, 여태까지 한 사람도 봉장(封章)을 올리는 자가 없으니, 신은 실로 마음이 아픕니다.

온 나라 사람들이 조종(祖宗) 백 년 동안의 두터운 덕택 가운데서 살아왔고, 거듭 대행대왕(大行大王 성종) 26년 동안 교양하고 성취시킨 은혜를 입었는데, 하루아침에 전하의 애통하신 전지를 받고도 새 정치에 도움 될 한 마디 말도 하는 이가 없으니, 신이 실로 마음이 아픕니다.”

연산군이 전지를 보내 시국에 관하여 구언하라 해도 아무도 말하는 이가 없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신이 생각건대, 말하지 않는 자의 마음에는 반드시 ‘임금이 성스럽고 신하가 어질고 예(禮)와 법이 갖추어졌으므로 천한 사람의 말은 아뢸 필요가 없다.’ 하고, 또 반드시 ‘새 정치의 처음에 태학생(성균관 유생)을 물리쳤으니(필자 주 : 연산군이 수륙재를 반대한 성균관 유생들을 죄준 일), 충성스러운 말은 한갓 제 몸에 화가 돌아올 뿐이다.’ 하고, 또 반드시 즉위한 처음에 구언(求言)하는 것은 예사(例事)일 뿐이니, 말을 아뢰어도 반드시 쓰이지 않을 것이다.’ 할 것이니, 낮은 자는 죄를 받을까 겁내고, 높은 자는 이름을 얻으려 한다는 혐의를 피하는 것이 침묵하는 까닭입니다. 이와 같은 자는 제 몸을 위하여서는 옳으나, 품은 뜻이 있으면 반드시 모두 아뢰어 임금을 아끼고 나라에 충성하는 도리는 아닙니다.

김일손은 신하들이 침묵하는 이유를 상세히 밝히고 있다. 침묵은 금인가?

상소는 이어진다.

“신이 선조(先祖 성종임금)에 벼슬하여 녹을 먹은 지가 10년이요, 벼슬이 5품 자리에 있어, 나라의 은혜는 이미 두터운데 하는 것 없이 지내 와서, 선왕께 한 말씀으로도 보답한 것이 없었는데, 이제 또 저의 몸만 삼가여 전하의 높은 뜻을 외롭게 한다면 신의 죄가 더욱 심할 것이거니와 평생에 배운 바를 어디에 쓰오리까.

신은 어리석은 자라도 천 가지 생각 중에 쓸 만한 것이 하나는 있다는 생각에서 상소문을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애통 박절한 심정으로 애통 박절한 전지를 받들매 마음이 격동되어서 모르는 사이에 말이 절로 법식에 벗어나오니, 전하께서 잘 살펴주시옵소서”

김일손은 상소를 올리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신이 듣기로는, 가언(嘉言 아름답고 좋은 말)은 마음을 바르게 하고(正心) 몸을 닦아서 (修身)하늘의 경계를 두려워하는 것만 한 것이 없고, 선정(善政)은 집안을 바로 잡아서 나라를 다스리는 것만 한 것이 없다 하오니, 경연(經筵)에 일찍이 나가시는 것이 근본입니다.

민간의 이익과 병폐는 본디 아뢸 것이 많이 있으나, 조정의 이익과 병폐 또한 아뢸 것이 있사오니, 신이 낱낱이 진술하기를 아끼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가언·선정을 듣고자 하시어, 듣고 나서 뜻에 두지 않으신다면 듣는 보람이 없을 것이요, 민간의 이익과 병폐를 알고자 하시어, 알고 나서도 시행하지 않으신다면 아시는 보람이 없을 것이오니, 듣고서는 실천하고 알고서는 실행한다면 요(堯)·순(舜) 임금이 되기도 어렵지 않습니다.

요·순을 성인이라 하는 까닭은 자기를 버리고 남을 쫓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기 사사로운 뜻을 고집하여 아랫사람들에게 임(臨)하신다면, 가언·선정이 날마다 아뢰어지고 민간의 이익과 병폐가 날마다 들리더라도, 이것이 모두 나는 벌레 소리와 지나가는 까마귀 소리가 되어 부질없이 전하의 총명을 어지럽게 할 뿐입니다.

중국 요순임금이 자신을 버리고 남을 쫓았다는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나만 옳고, 당신은 틀렸다’는 아집은 성현의 길이 아니다.

 

탁영(김일손의 호) 종택의 안내판 (사진=김세곤)
탁영(김일손의 호) 종택의 안내판 (사진=김세곤)
탁영종택 (사진=김세곤)
탁영종택 (사진=김세곤)
탁영종택 정문(사진=김세곤)
탁영종택 정문(사진=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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