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코너에서 연재하는 이야기는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문종 3년상 중 정난 일으킨 수양, 단종 국혼 밀어부쳐 권력 장악

한시라도 국모의 자리를 비워둘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민심 수습과 단종을 키운 혜빈 양씨 권력의 제거가 숨은 의도

단종의 윤허와는 상관없이 수양대군은 왕비 간택 서둘러 진행
친구 송현수의 딸을 왕비, 김사우와 권완의 딸은 숙의로 책봉

세조는 송현수와 권완을 사육신과 함께 반역죄로 엮어서 제거
친정 멸문지화 입은 정순왕후와 숙의 권씨는 고통 속 한 평생

지난해 단종문화제 정순왕후 선발대회_정순왕후는 수양대군의 절친한 친구인 송현수의 딸로 왕비가 되는 영광을 안았으나, 단종이 폐위되고, 아버지 송현수가 반역죄로 몰려 비운의 왕비로 전락하고 만다.
지난해 단종문화제 정순왕후 선발대회_정순왕후는 수양대군의 절친한 친구인 송현수의 딸로 왕비가 되는 영광을 안았으나, 단종이 폐위되고, 아버지 송현수가 반역죄로 몰려 비운의 왕비로 전락하고 만다.

[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원찬 작가] 

1. 문종의 3년상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단종의 국혼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은 지 한 달 뒤부터였다. 문종의 3년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국혼을 할 수가 없는데도 수양대군은 국혼을 서둘렀다. 한시라도 국모의 자리를 비워둘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여기에는 수양대군의 또 다른 속셈이 들어 있었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계유정난으로 민심이 흉흉해서 그것을 다스려야만 했다.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다는 모습을 백성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자기가 왕위를 넘본다는 소문을 잠재우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단종의 혼사였다.

그러나 왕비를 뽑는 일은 수양대군으로서도 상당한 모험이었다. 훗날 외척의 세력이 강성해져서 내명부가 안정이라도 되는 날이면 수양대군은 발붙일 곳이 없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수양대군이 국혼을 서두른 데는 혜빈 양씨 때문이었다. 혜빈 양씨는 세종의 후궁이었다. 단종에게는 할머니가 되는 인물이었다. 단종이 태어나자마자 산후병으로 세자빈이 숨을 거두자 어린 손자를 양육할 사람이 필요했다. 세종은 그 일을 후궁인 혜빈 양씨에게 맡겼다.

후궁이란 왕이 죽으면 출궁함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혜빈 양씨는 어린 단종의 양육을 위해 세종이 승하한 뒤에도 출궁하지 않고 궁에 남았다. 문종 재위 시절에는 중궁 자리가 비어 있었던 터라 혜빈 양씨가 내명부의 안주인 노릇까지 했다.

이런 터에 만일 혜빈 양씨가 자기의 주변 인물로 단종비를 내세운다면 수양대군으로서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문종의 3년상을 마칠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국혼을 서둘렀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단종이 국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3년상을 마칠 때까지 장가들지 못한다는 법을 태종이 만들지 않았더라도 단종으로서는 국혼을 쉽게 윤허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국혼은 곧 불효이기 때문이었다. 유교를 국시로 하는 조선사회에서 불효는 어떤 이유에서도 용납되지 않는 것이었다.


- 세조가 좌의정 정인지, 우의정 한확, 좌찬성 이사철, 좌참찬 이계린 등과 더불어 아뢰기를,

“지금 전하께서 외롭고 약하시므로, 나라 사람들이 모두 왕비를 맞아들이기를 원하오니, 청컨대 이를 맞아들이소서.”

하니, 하명하기를,

“불가하다.”

하였다. 이에 세조가 다시 아뢰기를,

“왕비를 맞이하는 일은 이미 준비되었사오니, 신 등은 기어이 허락을 받아야겠습니다. 청컨대 경중과 대소를 깊이 생각하셔서 처단하소서.”

그래도 윤허하지 않았다. -

<단종실록> 단종 1년 12월 28일 기사 중에서

그러나 단종의 윤허와는 상관없이 수양대군은 왕비 간택을 서둘러 진행했다. 왕비 간택을 위한 심사에는 수양대군의 인물들로 채워졌다.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을 중심으로 정인지, 한확, 최항 등이 삼간택에 나섰는데 효령대군은 수양대군에게 우호적인 인물이었고, 정인지와 한확은 수양대군과 사돈 관계를 맺은 인물이었으며, 최항은 계유정난이 일어나던 그날 도승지로서 계유정난을 성공시킨 핵심 인물 중에 한 사람이었다.

왕비 후보에는 수양대군이 이미 자기의 친구인 송현수의 딸을 내정해 놓고 있었지만 혜빈 양씨와 수양대군의 넷째 동생인 금성대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금성대군은 수양대군의 야욕을 일찍이 알아차리고 적극적으로 수양대군에게 저항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금성대군은 자기의 처가 쪽 집안인 최도일의 딸을 왕비 후보로 내세웠으나 수양대군의 세력에 밀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2. 송현수의 딸이 왕비로 간택되다.

초간택, 재간택을 거쳐 3간택에 올라온 최종의 후보는 풍저창 부사(豊儲倉副使-정6품) 송현수(宋玹壽), 예원 군사(預原郡事) 김사우(金師禹), 전 사정(司正) 권완(權完)의 딸이었다. 처녀들의 아버지는 모두 수양대군의 심복들이었는데 그 중 송현수는 수양대군과 절친한 사이였다. 결국 최종적으로 왕비에 간택된 처녀는 송현수의 딸 정순왕후였다. 그녀는 조선 최초로 간택의 절차를 거쳐 왕비가 된 여인이었다. 왕비 간택에서 탈락한 김사우와 권완의 딸은 숙의(淑儀)의 직첩을 받고 후궁이 되었다.

송현수는 수양대군과 친구 사이로써 그의 누이동생이 세종의 막내아들인 영응대군에게 출가하여 왕실과 인연을 맺은 집안이었다. 즉 송현수의 누이동생이 수양대군의 제수인 셈이다. 그런 인연으로 그의 딸이 왕비로 간택되었으니 여산 송씨 집안으로선 겹으로 왕실과 인연을 맺게 된 셈이다.

왕비로 간택된 정순왕후는 단종보다 한 살이 더 많은 15살이었다. 14살에 왕비를 맞이한 단종에겐 결코 이른 혼사는 아니었다. 8대 임금 예종이 11살에 장가들어 12살에 인성대군을 낳았으니 그에 비하면 늦장가를 든 셈이다. 그렇게 하여 국혼은 단종 2년 1월 22일에 이루어졌다. 왕실에서는 송현수에게 면포(綿布) 6백 필, 쌀 3백 석, 콩 1백 석을 하사품으로 내렸다.

3. 단종 고집을 피우다

국혼이 치러진 다음 날. 단종의 어명은 또 한 번 조정을 뒤흔들었다.

- 왕비를 맞아들이는 일은 신료들의 청에 쫓겨서 어쩔 수 없이 허락했으나 마음이 편치 못하니, 중전을 궁으로 들이는 일을 정지시키라. -
< 단종실록 > 단종 2년 1월 23일 기사 중에서

어쩔 수 없이 국혼은 치렀지만 3년상을 넘길 때까지는 중전을 사가에 두고 궁궐에 들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자 온 조정은 물론이고 집현전에서까지 반대 상소를 올렸다. 이미 왕비를 책봉하여 국모가 되었는데 어찌 하루라도 민가에 둘 수 있겠냐는 것이 이유였다.

그런데 성삼문만이 단종의 뜻을 받들었다. 그는 처음부터 국혼을 반대했던 사람이었다. 수양대군은 성삼문을 하옥시키고 모든 관직을 거두어버렸다. 국문장으로 끌려나가 고문을 받는 수모를 당했지만 그래도 그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단종은 더이상 고집을 피울 수 없었다.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어명을 거두어들이고 왕비를 궁으로 들이게 하였다. 이로써 단종의 국혼은 완성되었다.

4. 단종의 세 여인

권력이란 부자지간에도 함께 나눌 수 없는 괴물이다. 그러니 수양대군과 송현수가 아무리 가까운 친구 사이라고 하더라도 권력 앞에서 우정이란 아무 쓸모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서로가 장애물이 될 뿐이었다.

이후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나자 세조는 송현수와 권완을 사육신과 함께 반역죄로 엮어서 제거해 버렸다. 여기에 앞장선 인물이 김사우였다. 그는 지방 병권을 쥐고 있어서 송현수나 권완보다 더 위험한 존재였다. 그러나 그의 딸 숙의 김씨가 질병을 오랫동안 앓고 지내던 터라 단종이 궁을 나가 피접할 정도였으니 단종의 관심 밖 여인이 되어 버린 지도 오래였다. 그러니 김사우는 사위인 단종에게 미련 따위는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송현수와 권완이 단종을 복위시키려 반역을 꾀했다고 증언하는데 앞장섰다. 그 대가로 그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권완은 능지처참을 당했고 송현수는 교형으로 죽임을 당했으며 가산은 모두 적몰되고 가솔들은 모두 공신들의 노비가 되었다. 친정 집안의 멸문지화를 입은 정순왕후 송씨나 숙의 권씨는 고통 속에서 살았지만 80세가 넘도록 장수했다.

다음 이야기는 < 왕위 찬탈 > 편이 이어집니다.

정원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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