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코너에서 연재하는 이야기는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세조의 혹독한 고문에도 충절을 저버리지 않은 박팽년

문과 급제 후 집현전 발탁돼 세종 총애…사돈까지 맺어
세종 아들인 안평대군과 죽마고우 관계, 영풍군은 사위
세조 왕위 찬탈하며 안평·영풍군 등 제거에 박팽년 울분

재능있는 박팽년 세조 회유에도 거절, 결국 고문으로 옥사
사육신 대부분 멸문지화 됐으나 박팽년 여종의 슬기로 피해
박팽년 숙종 17년에 신원 회복, 죽은 지 235년 만에 충신 추앙

충청북도 기념물 제27호인 박팽년 사당.
충청북도 기념물 제27호인 박팽년 사당.

[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원찬 작가]

1. 왕실과의 인연

박팽년은 1417년 회덕현(지금의 대전)에서 태어났다. 18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가 되어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으로 보아 그의 성품은 청렴하기로 유명한 듯하다.

선조가 하루는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박팽년이 일찍이 친구를 천거하였는데, 그 친구가 고마움으로 밭을 주려고 하였다. 이에 박팽년이 말하기를, ‘친구 간에 주고받는 것은 비록 값진 것이라도 사양하지 않는다는 옛 글이 있지만 이번 선물은 의심을 받을 만하니 받을 수 없다.’ 하고 거절하였다 하니, 이것이 청렴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연려실기술> 제4권 단종조 고사본말 편 기사 중에서

세종은 후궁인 혜빈 양씨와의 사이에서 세 아들을 두었는데 그 아들 중 영풍군을 박팽년의 딸과 혼인케 함으로써 사돈관계를 맺었다. 그만큼 박팽년에 대한 세종의 사랑은 각별했다. 또한 박팽년에 대한 안평대군의 사랑도 각별했다.

안평대군이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박팽년과 함께 노닐었던 무릉도원이 너무 환상적이어서 안견으로 하여금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하였다고 한다. 박팽년이 안평대군보다 한 살 더 많긴 하지만 그들은 죽마고우나 다름없는 사이여서 풍류를 함께 하곤 했다. 이를 보면 집현전 학사들 중에서도 박팽년이 안평대군과 가장 가까운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인연으로 하여 박팽년은 결코 수양대군 편에 설 수가 없었다. 이들의 갈등은 수양대군이 권력을 쥐게 되면서 더 심해졌다. 안평대군이 제거되고 혜빈 양씨와 그의 아들 영풍군이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함에 이르러서는 수양대군과 박팽년은 결코 한 배를 탈 수 없는 운명으로 갈라서고 말았다.

즉 박팽년은 죽마고우나 다름없는 안평대군을 잃었고, 사부인인 혜빈 양씨, 그리고 사위 영풍군을 모두 잃었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던 날, 경회루로 달려온 박팽년이 연못에 빠져죽으려 했던 것을 보면 그의 울분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직하다.

그래서 단종복위운동에 대한 박팽년의 의지는 나머지 사육신들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즉 수양대군은 박팽년과의 원한 관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충청도 관찰사에서 형조참판으로, 이어서 중추원부사로 승진 발령하였다. 박팽년에 대한 세조의 구애는 계속되었지만 박팽년의 마음은 이미 세조로부터 떠나 있었다.

2. 박팽년의 충절

세조는 박팽년의 재주를 사모해 조용히 사람을 시켜서 “네가 내게 항복하고 같이 역모를 안 했다고 숨기면 살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전했으나 박팽년 역시 성삼문처럼 세조를 전하가 아니라 “나으리”라 칭하며 거절했다.

세자가 박팽년을 직접 고문하는 장면을 <연려실기술>을 통해 살펴보자

세조가 말하길 “네가 이미 신(臣)이라 일컬었고 내게서 녹을 먹었으니, 지금 네가 신이라 일컫지 않더라도 소용이 없다.”

“나는 상왕(단종)의 신하로 충청 감사가 됐고 장계에도 나으리에게 한 번도 신이라 일컫지 아니했으며, 녹도 먹지 않았소.”

하여 세조가 그 장계를 대조하여 보니, 과연 신(臣)자는 하나도 없고 거(巨)자로만 써놓았다. 녹은 받아서 먹지 않고, 창고에 봉하여 두었다고 한다. -

< 연려실기술> 제4권 단종조 고사본말 편 기사 중에서

박팽년이 충절을 굽히지 않자 세조는 다른 사람에 비해 더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결국 박팽년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옥사하고 말았다. 며칠 뒤 성삼문 등 다른 충신들이 능지처참을 당할 때 박팽년도 함께 능지처참을 당했는데, 죽은 뒤에 받은 형벌이어서 산 채로 사지가 찢기는 참혹한 고통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행복한 죽음이었는지 모른다.

단종복위운동과 관련하여 박팽년의 가문이 가장 큰 보복을 당했다. 연좌되어 극형에 처해진 사람도 가장 많았고, 대신에게 나누어진 처첩도 가장 많았으며, 종친과 대신들에게 나누어 준 토지도 제일 많았다.

박팽년의 아버지 박중림과, 박팽년 본인, 그리고 형제로 박인년(朴引年), 박기년(朴耆年), 박대년, 박영년(朴永年)이 모두 죽임을 당하였고, 또 박팽년의 아들 박헌(朴憲), 박순(朴詢)도 죽임을 당하였으며 박분(朴苯)은 유배된 이후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윤여환 화백이 그린 박팽년 표준영정.
윤여환 화백이 그린 박팽년 표준영정.

박팽년 그리고 그의 형제들의 아내와 딸들은 종친과 대신들의 노비로 보내졌다. 박팽년의 아내 옥금(玉今)은 정인지의 노비로 내려졌다. 정인지는 집현전 시절 박팽년과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한 사이였다. 그런 사이였던 정인지가 다른 사람도 아닌 박팽년의 아내를 노비로 탐을 냈으니 그의 인간성이 다른 모습으로 느껴진다.

박인년의 아내 내은비(內隱非)는 화천군 권공에게 노비로 보내졌다. 또 박기년의 아내 무작지(無作只)는 익현군 이곤에게, 박대년의 아내 정수(貞守)는 동지중추원사 봉석주에게 노비로 보내졌다. 큰며느리인 박헌의 아내 경비(敬非)와 작은며느리인 박순의 아내 옥덕(玉德)은 이조 참판 구치관에게 노비로 보내졌다.

3. 박팽년의 후손

단종복위운동의 가담자 대부분의 충신들이 멸문지화를 당한 데 비해 박팽년은 멸문지화를 피했다. 그 사유가 <선조실록> <승정원일기> <연려실기술> 등에 전해지는데 그 중 하나를 보면 다음과 같다.

“박충후는 충신 박팽년(朴彭年)의 후손이다. 세조가 신하들을 모두 죽였는데 박팽년의 손자 박비(朴斐)는 유복자였기에 죽음을 면하게 된 것이다. 갓 낳았을 적에 당시의 현명한 사람의 도움을 입어 딸을 낳았다고 속이고 이름을 비(斐)라고 했으며, 죄인들을 점검할 때마다 슬쩍 계집종으로 대신하곤 함으로써 홀로 화를 모면하여 훗날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되었다. 박충후는 곧 그의 증손으로서 육신(六臣)들 중에 유독 박팽년만 후손이 있게 된 것이다.”

<선조실록> 선조 36년 4월 21일 기사 중에서

박팽년의 일족이 모두 처형될 무렵 둘째아들 박순의 처가 마침 임신 중이었다.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는 명이 조정으로부터 내려왔다. 그런데 마침 박팽년의 여종이 임신을 하고 있었는데 출산을 같이 하게 되었다. 마침 박순의 처는 아들을 낳고 여종은 딸을 낳았는데 여종의 슬기로 자식들을 바꿔치기를 했다. 그 하인이 주인의 아들을 거두어 이름을 박비라 부르고 키웠다. 장성한 뒤 성종 때에 박순의 동서 이극균(李克均)이 감사로 부임해 와서 박비를 불러 보고 눈물을 씻으며 말하기를, “네가 이미 장성하였는데, 왜 자수하지 않고 끝내 숨어 사는가?” 하며, 곧 자수시켰다. 임금이 특별히 용서하고 이름을 일산(壹珊)으로 고쳐 주었다.

박팽년의 후손에 관한 기록이 표현은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여러 문헌에서 기록되어 있다. 후손이 절손되지 않고 살아남게 된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점이 공통적이다. 그러다가 숙종 17년에 박팽년의 신원이 회복되었으니 실로 죽은 지 235년 만에 충신으로 추앙받게 된 것이다.

*** 다음 이야기는 < 사육신 이야기 > 편이 이어집니다.

정원찬 작가

▶장편소설 「먹빛」 상·하권 출간
▶장편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출간
▶뮤지컬 「명예」 극본 및 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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