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쑥불쑥 나오는 갱년기를 데리고
나선 골목길에서
오롯이 나를 찾는 시간을
시작하려 한다

정숙자 문학박사
정숙자 문학박사

[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숙자 문학박사] 어제 폭포수처럼 내리던 비는 오늘은 얌전한 얼굴로 다가선다. 오늘, 변덕스러운 사람의 모습을 닮아 친근하게 옆에 선 하늘은 어제 광란의 시간을 쉽게 잊으라 한다.

요즘 내 마음은 어제처럼 소용돌이치는 비와 바람 같다. 오늘의 날씨를 닮은 나는 예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어 어색하지 않고 늘 친근하다. 그런데 어제의 비처럼 예측이 힘든 마음이나 감정이 근래에 새로이 생겨났다. 너무나 충동적이고 화가 들불처럼 일어나기도 해서 당혹스럽고, 때로는 저 끝도 알 수 없는 바다 속 같이 어둡고 고요해서 적응이 힘든 것을 세상에서는 갱년기라고 부른다. 언제부터 내 속에서 자라 이제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었던 본래의 나조차 집어삼키려고 한다. 분명 내 안에 있었다면 내가 만들어 키워 왔을텐데 미리 알지 못하고 그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와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며 아우성칠 때 이제야 알게 된 것인지 모를 일이다. 그냥 열심히 살면 그것이 최선이라 여기며 사는 동안 내 안에는 내가 없었다. 이제라도 난 나를 찾아 길을 나서려고 한다. 불쑥불쑥 나오는 이 갱년기를 데리고 조용한 골목길을 찾아 거닐어 보려고 한다.

나는 큰 길을 돌아서 끝도 잘 보이지 않는 예쁘고 아기자기한 골목길을 이제 막 들어서고 있다. 그 길 군데군데 보이는 집들의 사람냄새와 이름 모를 작은 꽃들과 익숙한 나무들에게 한껏 정을 느끼고 더 깊숙한 골목길로 들어선다. 간혹 만나는 사람도 있다. 내가 원하든 원치 않던 그 골목을 예전부터 걸었던 사람들, 살고 있는 사람들, 나처럼 막 그 길을 들어서는 사람들…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

나는 그 끝에 분명 나와 상관있는 행복한 일들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안고는 그 길을 걸어보려고 한다. 사실 겁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단 한 번도 남들이 닦아 놓은 평탄한 길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그것이 내가 사는 방식이었고 규범이었다. 남들의 이야기 속에서 비극적인 주인공이 되는 것도 싫었다. 또한 남들의 이야기로 내 시간을 빼앗기기도 싫어서 오직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길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걸었다. 나에게 주어진 이 작은 상자가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안도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제 그 상자를 열고 세상 밖으로 나와 힘차게 그 골목에서 다시 시작해보려고 한다.

그 골목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에 창문을 열어 바람을 맞이한다. 그 옛날 마르코폴로가 동방을 향했던 것처럼 그의 이름을 딴 홍차를 우려서 마신다. 긴 호흡과 함께.

저작권자 © 한국농어촌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