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8년(연산군 4년) 7월에 일어난 무오사화는 크게 3단계로 전개되었다. 연산군이 사관 김일손을 친국하면서 시작하여 2단계는 교유한 관원과 선비로 번졌다가, 3단계는 유자광이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조목조목 풀이하면서 사화로 확대되었다.

그러면 1과 2단계를 요약해보자. 7월1일에 윤필상·노사신·한치형·유자광이 연산군을 비밀스럽게 만났다. 연산군은 즉시 의금부 도사를 경상도로 보내어 누구를 잡아오라 했다.

끌려온 사람은 함양에서 요양 중인 김일손(1464∼1498)이었다. 7월12일에 연산군은 희정당에서 김일손을 친국하였다. 연산군의 추국은 세조와 관련된 것이었다. (1)세조의 아들 덕종(성종의 아버지)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후궁인 귀인 권씨를 세조가 불렀지만 그녀가 분부를 받지 않았다는 것 (2)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의 능을 파서 바다에 버렸다는 것 (3)계유정난 때 죽은 황보인 ·김종서 ·정분과 성삼문 · 박팽년 등 사육신이 절개를 지켰다는 것 (4)노산대군(단종)의 시체를 숲속에 던져 버린 일 (5)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에 김일손이 충분(忠憤)을 부쳤다고 쓴 뒤 전문(全文)을 사초에 붙인 것 등이었다.

이처럼 김일손의 사초는 단종, 사육신, 소릉 같은 중대한 정치적 사안부터 홀로 된 며느리를 취하려는 패륜에 가까운 세조의 행동까지 민감한 문제를 건드리고 있었다.

연산군은 ‘반심(反心)을 품은 것이 분명하다’면서 김일손을 친국했다. 하지만 사실은 쉽게 확인되지 않았고 책임소재는 불분명했다. 김일손과 관련자들이 사실을 부인했기 때문이다.

이런 마당에 홍문관과 예문관이 나서서 임금이 ‘실록을 열람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이러자 연산군은 이들을 즉시 국문하라고 지시했고 대간이 합사하여 국문이 온당치 않다고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한편 사화는 사초에 담긴 불온한 내용의 출처를 규명하는 과정에서 확대되었다. 연산군은 사초 사건에 연루된 자들의 집을 수색할 것을 명했고, 이목의 집에서 임사홍의 차남 임희재의 편지를 찾아냈다. 그 편지에서 임희재는 현실정치와 임금에 대한 불만을 나타냈다. 연산군은 즉시 국문하라고 명했고, 임희재가 해명했지만 붕당을 만들어 국사와 재상을 비판한 것으로 간주했다. 이어서 윤필상 등은 김일손에게 편지를 보낸 권오복을 국문할 것을 청했다.

이상이 7월12일부터 7월14일까지 3일 간의 주요 사건이다.

그런데 국문 4일째인 7월15일에 한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글 중 하나인 「조의제문」이 사건 전면에 등장했다.

먼저 「연산군일기」‘1498년 7월15일 4번째 기사’부터 읽어보자.

유자광(柳子光)이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구절마다 풀이해서 아뢰었다.

“이 사람이 감히 이러한 부도(不道)한 말을 했다니, 청컨대 법에 의하여 죄를 다스리시옵소서. 이 문집(文集) 및 판본을 다 불태워버리고 간행(刊行)한 사람까지 아울러 죄를 다스리시기를 청하옵니다.”

연산군이 전교하였다.

“어찌 이러한 마음 아픈 일이 있단 말이냐. 의의(議擬 의논하고 헤아림)하여 아뢰도록 하라. (후략)”

사실 「조의제문」은 7월13일의 김일손의 공초에서 이미 알려진 상태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3일 3번째 기사)

김일손이 공초하였다.

"사초(史草)에 이른바 ‘노산(魯山)의 시체를 숲속에 던져버리고 한 달이 지나도 염습(斂襲)하는 자가 없어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서 쪼았는데, 한 동자가 밤에 와서 시체를 짊어지고 달아났으니,물에 던졌는지 불에 던졌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한 것은 최맹한에게 들었습니다.

신이 이 사실을 기록하고 이어서 쓰기를 ‘김종직(金宗直)이 과거를 하기 전에, 꿈속에서 느낀 것이 있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충분(忠憤)을 부쳤다.’ 하고, 드디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썼습니다.”

7월 13일 이후 유자광은 이틀 동안 조의제문을 세밀히 분석했다. 그 단서가 김일손이 사초에 적은 ‘충분(忠憤:충의로 생기는 분한 마음)’이라는 단어였다.

한편 서얼 출신 병조참지 유자광(1439∼1512)은 예종 즉위년인 1468년에 태종의 외손이자 병조판서를 한 남이(1441∼1468)를 역모했다고 고변하였다. 모반의 증거로 남이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돌아오면서 지은 시의 한 글자를 조작하여 아뢴 것이다.

그러면 남이가 지은 시를 읽어보자.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白頭山石磨刀盡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   豆滿江波飮馬無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 평정하지 못한다면   男兒二十未平國

훗날 그 누가 대장부라 하리요.   後世誰稱大丈夫

그런데 유자광은 제3구의 ‘남아이십미평국(未平國)’을 ‘나라를 얻지 못하면 뜻의 미득국(未得國)’으로 바꾸어 고변한 것이다.

이렇게 1468년에 남이를 무고하게 죽인 조작의 달인 유자광은 30년 후인 1498년에 다시 사화의 중심에 섰다.

김종직 선생 생가 안내 표시판 (경남 밀양시) (사진=김세곤)
김종직 선생 생가 안내 표시판 (경남 밀양시) (사진=김세곤)
김종직 선생 생가 앞 동상 (사진=김세곤)
김종직 선생 생가 앞 동상 (사진=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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