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8년(연산군 4년) 7월 15일에 유자광은 연산군을 독대하여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구절마다 풀이해서 아뢰었다.

“이 사람이 감히 이러한 부도(不道)한 말을 했다니, 청컨대 법에 의하여 죄를 다스리시옵소서. 이 문집(文集) 및 판본을 다 불태워버리고 간행(刊行)한 사람까지 아울러 죄를 다스리시기를 청하옵니다.”

이에 연산군이 대신들과 의논하여 아뢰라고 전교했다.

이러자 유자광은 윤필상과 전지(傳旨 임금의 명을 받드는 문서)를 만들어 김종직의 죄를 논하려 하였다.

이 때 대사헌 강귀손(姜龜孫)이 아뢰었다.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이 뜻을 알게 한 후에 죄를 결정하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강귀손이 윤필상과 유자광이 독단으로 죄를 논하는 것을 견제한 것이다.

이러자 연산군은 “오늘에야 비로소 대간이 있음을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김일손의 사초 문제에 대하여 엄격하고 가혹한 연산군이 대사헌 강귀손(1450∼1505)의 발언에 대하여 상당히 우호적이다.

강귀손은 좌찬성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의 장남이다. 그는 1479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관 부제학·이조 참의· 승정원 동부승지, 도승지(都承旨)에 이르렀다. 1497년에 경기도 관찰사를 하였다가, 1498년에 병조참판을 하였고 5월24일부터 대사헌이 되었다. 대사헌은 요즘 같으면 검찰총장이다.

한편 유자광은 강귀손이 유자광의 전횡을 견제하는 발언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독단적으로 전지를 만들려고 하였다.

이러자 강귀손은 말하기를 ‘당연히 승정원으로 하여금 주장하게 해야 한다.’ 하매, 여러 재상들이 다 ‘그렇다.’ 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5일 5번째 기사)

임금의 명령문서는 승정원(요즘 같으면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소관이다. 설혹 비선 실세가 명령문서에 간여하더라도 명령문은 승정원을 거쳐서 의정부에 보내져야 한다. 이점에 대하여 여러 재상들도 강귀손의 의견에 동조했다.

7월16일에도 조의제문 논의는 계속되었다. 연산군이 먼저 전교하였다.

"세조께서 일찍이 김종직을 불초(不肖)하다 하셨는데, 김종직이 이것을 원망하였기 때문에 글월을 지어 기롱하고 논평하기를 이에 이른 것이다. 신하가 허물이 있으매 임금이 책했다 해서 이렇게 하는 것이 가한가. 여러 재상들은 알아 두라."

김종직이 세조가 꾸지람한 것을 원망하여 조의제문을 지었다는 연산군의 전교는 전후가 안 맞는다. 김종직은 1459년에 과거에 급제했고, 1457년에 조의제문을 지었다. 따라서 조의제문은 세조의 꾸지람을 원망하여 지은 글이 아니다. 이렇게 연산군은 사실조차 왜곡되게 해석했다.

『연산군일기』는 이어진다.

이러자 윤필상이 함께 의논하여 김종직의 문집 편집자를 국문하기를 청하니, 대사헌 강귀손이 말하였다.

"편집한 자가 만약 그 글 뜻을 알았다면 죄가 참으로 크지만, 알지 못했다면 어찌할 것인가?"

김종직의 시문집인 점필재집(佔畢齋集)은 김종직이 죽은 다음 해인 1493년(성종 24)에 그의 제자이자 처남인 조위(曺偉)에 의하여 편집되었다. 1494년에 원고를 더 모으라는 성종의 명이 있었으나 성종이 붕어하자 문집은 간행되지 못하였고 3년 뒤인 1497년(연산군 3)에 정석견(鄭錫堅)에 의하여 최초로 간행되었다.

이어서 『연산군일기』를 읽어보자.

이러자 유자광은 말하기를,

"어찌 우물쭈물하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어찌 머뭇머뭇하는가?" 하였다.

유자광은 대사헌 강귀손을 다그친다. 관련자를 즉시 국문하라고 한 것이다.

이어서 윤필상 등이 아뢰었다.

"신 등이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보니, 그 의미가 깊고 깊어 김일손의 ‘충분(忠憤 충의로 생기는 분한 마음)을 부쳤다.’는 말이 없었다면 진실로 해독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 뜻을 알고 찬집하여 간행하였다면 그 죄가 크오니, 청컨대 국문하소서."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6일 1번째 기사)

윤필상 등도 김일손이 7월13일의 공초에서 ‘사초(史草)에 노산군(단종)의 시신에 관한 사실을 기록하고 이어서 김종직(金宗直)이 과거를 하기 전에 꿈속에서 느낀 것이 있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충분(忠憤)을 붙인 다음에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었다’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조의제문의 의미가 깊고 깊어 제대로 해독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랬다. 유자광이 아니었으면 조의제문은 조용히 넘어갈 사안이었다.

김종직 선생 동상 (추원재 입구) (사진=김세곤)
김종직 선생 동상 (추원재 입구) (사진=김세곤)
김종직 생가, 추원재 안내판 (경남 밀양시) (사진=김세곤)
김종직 생가, 추원재 안내판 (경남 밀양시) (사진=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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