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11월 20일에 ‘독립문(獨立門)’이 준공되었다. 대한제국이 탄생 한 지 40일 만이었고, 1896년 11월 21일에 기공식을 한 뒤 1년 만이었다. 독립문은 자주 독립의 상징이었다.

서재필은 준공식 석상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제부터 옛날 종노릇 하던 표적을 없애버리고 정말 실질적 독립을 소원한다는 표로 이 독립문을 세우는 것이니, 우리 국민은 이점을 잘 생각하고 우리나라 독립 · 자주를 위하여 더욱 분투해야 합니다.”

독립문 건립을 위해 1896년 7월 2일에 창립된 독립협회는 신문·잡지 발간, 강연회·토론회 등을 통하여 국민을 계몽하였다.

서재필은 1896년 4월 7일에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독립신문은 한글 전용을 실시하여 민족 언어와 문자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국민에게 신문의 중요성을 알게 하고 여론과 공론을 형성하여 정치활동을 전개하는 방법을 확립하였으며, 세계 사정을 알게 하고 국제 정세와 세계 각국의 문물을 소개하여 한국인의 시야를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영문판 The Independent는 한국의 사정을 한국인 입장에서 세계 각국 사람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편 독립협회는 기관지로 『대조선독립협회 회보(大朝鮮獨立協會 會報)』를 1896년 11월 30일에 창간하였다. 독립협회는 회보 간행을 통하여 자주독립으로 표방되는 근대적인 민족주의와 과학 문명 및 진보의 개념을 동력화하여 한국사회의 근대화를 추진시킬 수 있도록 노력했다.

회보는 표지를 포함해서 지면이 13여 장 내외밖에 안 되는 소책자였지만, 회보에는 계몽 논설, 회원 기고, 세계 중요 사건 요약, 각국 사정, 독립협회 소식 등이 두루 실렸다.

 이와 같이 독립신문과 독립협회회보는 민중을 근대지식과 민족의식으로 계몽하여 독립협회의 민중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서재필은 아펜젤러 목사의 요청을 받고 배재학당에 가서 학생 160명에게 특별 강의를 하였다. 첫 번째 강의는 1896년 5월 21일에 있었고 매주 목요일 열렸다. 강의를 시작한 지 약 반년이 지나 서재필은 배재학당 학생들에게 토론회를 열게 하였다. 처음 서재필의 제의에 호응하고 나선 사람은 13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은 협성회를 조직하여 1896년 11월 30일 첫 모임을 열었는데 서기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토론에 열심이어서 ‘정치를 하러 배재를 다닌다’는 말이 나올 정도 였다. 협성회 토론은 1898년 3월 중순까지 42회를 열었다.

서울 서대문구 소재 독립관 (사진=김세곤)
서울 서대문구 소재 독립관 (사진=김세곤)

이어서 서재필은 독립문과 함께 자주독립의 상징으로 모화관(慕華館)을 개수하여 독립관이라 이름하고 독립협회의 집회 장소로 사용키로 하였다.

1897년 5월 23일에 개수작업이 완료되었다. 1897년 8월 8일 독립협회 모임에서 서재필과 윤치호는 회원들에 대하여 독립협회를 좀 더 유용한 기구로 개편할 것을 주장하여 매주 일요일 오후 3시에 독립관에서 토론회를 열기로 하였다.

독립협회가 토론회를 열기로 결정한 것은 배재학당의 협성회가 토론회를 개최하여 성공하고 있었던 것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1897년 8월 29일 오후 3시 독립관에서 “조선에 급선무는 인민의 교육”을 주제로 약 70여 명의 회원이 참가하는 가운데 제1회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제2회 토론회에는 방청인만도 2백 명이나 참석하였으며, 토론회 참가자와 방청인 수는 계속 증가하여 제8회 토론회부터는 약 5백 명이 참가하기에 이르렀다.

토론회는 1898년 2월 13일 구국선언상소를 결정한 제21회 토론회를 전환점으로 달라졌다. 그 이전까지는 신교육진흥, 산업개발, 미신타파, 위생과 치안, 신문보급 등 계몽적인 것이 주된 주제였는데, 2월 13일 이후는 자주독립, 대외정책, 수구파 비판, 이권 반대, 자유 민권, 의회설립 주장 등 정치와 사회 현안이 주류를 이루었다.

독립협회의 하이라이트는 1898년 3월 10일에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였다.

독립관 안내문(사진=김세곤)
독립관 안내문(사진=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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