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3월 10일 오후 2시에 서울 종로의 저잣거리에서 민회(民會)가 열렸다. 이 날 독립신문에는 행사 예고 기사를 실었고 독립협회 회장 이완용과 고문 서재필이 앞에 나서지 않고 은밀히 준비했다.

민회에는 1만여 명의 시민이 모였는데 당시 서울 인구가 19만 6천 명임을 감안하면 대성황이었다.

민중 대회에서 시민들은 쌀장수 현덕호를 회장으로 선출하고 백목전(白木廛) 다락 위에서 시민들이 연설을 하였다. 현공렴, 이승만 등 배재학당과 경성학당 학생들도 연설가로 나섰다. 이들은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 철회와 한러은행 철수, 그리고 러시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해임을 요구하여 집회를 이끌었다.

이 모임에는 러시아 공사, 배재학당 교장 아펜젤러를 비롯한 많은 외국인들이 관람하였는데 집회 열기가 가득하자 서울의 외교계와 정부는 큰 충격에 빠졌다.

‘원조 촛불’이라고 불리는 이 집회는 글이 아닌 말로 정치 참여를 하는 길을 열었고, 민중과 연사가 자주 독립권 수호를 위한 확고한 결의를 내외에 과시했다. 모임은 당초엔 민회라 했으나 만 명이나 모이자 나중에는 ‘만민공동회’라 불렸다.

이러자 고종은 만민공동회의 열기와 러시아 측의 압력 사이에서 고심하면서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다.

우선 고종은 원로대신 김병시와 조병세에게 칙사를 보내어 의견을 물었다. 원로대신들은 러시아 군사교관 및 재정 고문의 해임을 촉구하였다.

고종은 러시아의 세력을 견제하려는 일본 측의 후원도 있었던 까닭에 3월 11일 밤에 이 문제를 내각회의에 붙여 토의하게 하였다.

김홍륙·민종묵·정낙용등 친러파 인사들은 러시아의 원조가 절실함을 내세워 군사교관과 재정고문 철수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다른 대신들은 만민공동회의 민의와 원로대신들의 권유에 따라 러시아의 압력을 사절하자고 주장하였다.

고종은 결단을 내려 러시아공사관에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를 요청하는 회신을 보냈다.

이 시기 러시아는 한반도보다도 만주 경영이 급선무라 여겼기에 고종의 답신을 계기로 한반도에서 한발 물러나기로 결정하였다.

3월 17일에 러시아 정부는 “한국 민중의 여론이 이와 같으면 재정고문과 군사 교관들을 철수하는 것이 가하다.”고 주한 러시아 공사에게 훈령하였다. 이에 스페이에르 러시아 공사는 고종에게 절영도 조차 요구 철회와 재정고문 및 군사교관의 철수를 통고하였다.

3월 24일에 고종은 탁지부 재정고문과 러시아 교관들을 파면하였고, 뒤이어 3월 1일에 개설된 한러은행도 문을 닫았다.

러시아 정부는 스페이에르를 4월12일자로 마튜닌으로 교체하여 한반도에서 후퇴조짐을 보였다. 일본도 그들의 절영도 석탄고 기지를 한국 정부에 돌려 보냈다.

그런데 러시아의 한반도 후퇴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반대 때문이었을까. 이는 독립협회 활동을 과대평가한 것이다. 러시아의 철수는 러시아의 관심이 조선에서 만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최문형 지음, 한국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 지식산업사, 2001, 250-251)

1897년 11월에 독일 함대는 독일 선교사 살해를 이유로 청도가 위치한 교주만을 점령했다. 러시아는 독일의 교주만 점령에 대한 대책으로 1897년 12월 19일에 여순, 대련을 점거하고 1898년 3월 27일에는 요동반도를 조차하였다.

러시아의 이 같은 조치는 영국과 일본으로서는 한국과 만주를 동시에 침략하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영국과 일본은 즉각 대응조치를 취했다. 이러자 러시아 외상 무라비예프는 “지금의 정세로서는 한국에서 일본에게 상당한 양보라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1898년 1월 7일에 러시아 주재 일본공사 하야시 타다시에게 “한국에 대해 러시아는 일본과 협상할 용의가 있다”는 제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일본은 러시아에게 만주와 한국을 맞교환하자는 제의를 했지만 러시아는 거부하였다. 그 대신 러시아는 독립협회의 반러운동을 계기로 한국의 이권을 잠시 포기한 것이다.

이처럼 러시아가 한반도에서 후퇴하게 된 것은 러시아의 극동 정책의 변화가 주된 원인이다.

덕수궁 즉조당(사진=김세곤)
덕수궁 즉조당(사진=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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