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9월 20일에 주한 프랑스 공사 플랑시는 프랑스 외무부 장관에게 ‘고종 황제의 외국인 친위대 구성 계획 추진과 의정부 대신들의 거부 움직임 보고’ 공문을 보냈다.

이 공문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한국근대사자료집성 18권, 프랑스 외무부 문서 8 대한제국Ⅰ·1897~1898」에 실려 있다.

“이번 달 8일 공문을 통하여 보고드린 바와 같이 고종 황제가 외국인으로 구성된 친위대를 조직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미국인 법무 고문관 그레이트 하우스가 상해에 체류 중인 5개국 퇴역군인 30명(미국인 9명, 영국인 9명, 프랑스인 5명, 독일인 5명, 러시아인 2명)을 고용하였습니다.

서울에 이 소식이 알려지자 이를 모르고 있었던 대신들과 독립협회 회원들은 물론이고 경찰과 군인들도 동요했습니다.

이에 고종 황제는 딱 잡아떼는 버릇대로 외국인을 고용하라는 지시는 내린 적이 없으며 그레이트 하우스의 행동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독립협회는 9월 17일에 각 대신에게 항의서를 보내어 누가 외국인 친위대를 서울에 오게 하였는지 밝히라고 했습니다. 대신들은 이 문제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8일에는 독립협회는 외부(外部) 앞에서 민중대회를 열고 외부대신에게 협회가 반대하는 6가지 이유를 알렸습니다.

 1. 외국인 친위대를 궁에 둘 필요가 전혀 없었다.

 2. 친위대가 주둔하면 우리 군대가 시기하고 원한을 품을 것이다.

 3. 취해진 조치로 황실은 백성의 충정을 잃을 것이다.

 4. 외국인 친위대가 주둔하면 국제 분규가 일어날 수 있다.

 5. 외국인 용병은 치외법권을 가지고 있는 5개국 국민들이므로 그 조직을 운영하기에는 대한제국 정부 자체도 많은 어려움에 부딪힐 것이다.

 6. 이 계획의 실현은 백성에 대한 신임도 없는 황실의 수치이며, 황궁을 보호할 능력도 없는 조정의 수치이며, 황제조차 통제할 수 없는 외국인들에게 황제의 보위를 맡기는 대한제국 전체의 수치일 뿐이다.

외부대신은 다음 날 이 문제를 의정부에 제기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자신도 외국인 친위대 유지를 승인하느니 차라리 사임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한편 19일 열린 의정부 회의에서 대신들은 만장일치로 군주가 세운 계획을 반대하였습니다. 외국인 친위대는 근무도 하기 전에 해산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는 깨끗이 마무리 지을 일만 남았습니다. 개인마다 1년 계약을 맺었고 매월 70 피아스터를 받기로 되어 있었으니 총 25,200피아스터 (약 63,000프랑)이 됩니다. 이미 재원이 바닥난 내장원(內藏院)은 황제가 저지른 허무맹랑한 행동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것입니다.”

그랬다. 궁정 호위에 불안을 느낀 고종은 1898년 8월에 법무 고문관 그레이트 하우스와 장봉환을 상해에 파견하였고, 이들은 9월 15일에 외국인 용병 30명을 데리고 서울에 왔다.

9월 17일에 독립협회는 군부 ·외부 ·궁내부 ·경무청에 각 3명씩 대의원을 보내어 외국인 용병의 즉각 귀환을 요청하는 항의문을 전달하였다.

또한 9월 18일에 외부 문 앞에서 대규모 민중대회를 개최하고 궁정 호위 외인부대를 즉각 추방을 요구했다. 『독립신문』도 이 사실을 규탄하였다.

9월 18일에 독립협회 소장파 활동가이면서 『제국신문』 주필인 23세의 이승만(1875∽1965)은 논설에서 ‘상하가 함께 부끄러운 큰 괴변’이라고 주장했다.

“슬프도다. 우리의 처신함이여. ... 임금이 그 백성을 믿지 못하여 외국인을 데려다가 대궐을 보호하는 일이 세계 나라 되고서야 어디 있으리오. 이는 신하도 없고 군사도 없고 백성도 없음이니 상하가 함께 부끄러운 큰 괴변이라. 이런 일은 마땅이 신민이 일심으로 주선하여 결단코 시행이 못되도록 하는 것이 도리에 합당한 일이라.(후략)”

(손세일 지음, 이승만과 김구 1부 1권, p 377-378)

이러자 외국인 용병들은 9월 24일에 철수하여 27일에 제물포항을 떠났다.

9월 29일에 플랑시 프랑스 공사는 ”외국인 친위대 해산 및 외국인 송환을 위한 경비 지출 상황 보고”를 했다.

“9월 20일 공문을 통하여 황궁의 경비를 상해에서 고용된 외국인에게 맡기려는 계획에 서울 전체가 들고일어났다는 소식을 보고한 바 있습니다.

대신들은 공식적으로 외국인들을 즉각 귀환시키는 방향으로 의사를 표명해서 이제는 각 개인과 맺은 계약 조건에 따른 경비를 보상할 일만 남았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외국인들은 매월 70 피아스트르를 받고 일 년간 고용되었습니다. 대한제국 정부는 타협해서 외국인들에게 처음에는 3개월, 나중에는 6개월 치 임금을 지불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외국인들은 임금을 한 푼이라도 깎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았고 계약 내용을 모두 이행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외국인 용병의 주장을 전해 들은 각국의 외교관들도 이들의 요구가 정당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제국 정부는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을 빨리 깨닫고 9월 26일에 친위대를 해산하며 외국인 용병들에게 상해로 돌아간다는 조건으로 1년 치 고용비 840 피아스트르를 지급하였습니다. 결국 25,200 피아스트르를 앉은 자리에서 낭비한 것입니다.”

고종 황제는 그의 호위를 외국인 용병에게 맡기려 했다. 이게 나라인가? 더구나 외국인 용병을 단 하루도 근무시키지 못하고 고용계약 기간 1년 치 임금 전액을 지급하여 국고를 낭비했다. 이랬으니 재정은 거덜 났다.

독립신문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전시물) (사진=김세곤)
독립신문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전시물) (사진=김세곤)

( 참고문헌 )

o 이윤섭 지음, 다시 쓰는 한국 근대사, 평단문화사, 2009

o 손세일 지음, 이승만과 김구 1부 1권, 나남, 2008

o 강준만 지음, 한국 근대사 산책 3, 인물과 사상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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