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3년 3월 25일, 고종은 삼정승과 보은 집회 관련 회의를 계속했다.

고종 : "지금 오랫동안 태평하여 군사를 양성하지 않고 있다. 지금 들으니 군사가 없다고 한다. 그런가?"

우의정 정범조 : "단지 노비들과 사령(使令)들만 있을 뿐이니, 허술하기 짝이 없습니다."

고종 : "장차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

영의정 심순택 : "어윤중이 도어사(都御史)로 명을 받고 내려갔는데, 잘 타일러서 해결된다면 된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어찌 처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좌의정 조병세 : "처단은 회유한 다음의 일입니다."

정범조 : "회유해도 해결되지 않으면 비로소 처단해야 할 것입니다."

고종: "일전에 어사를 보내라고 명한 것은 바로 그런 의도에서였다."

조병세 : "하지만 회유하는 글을 선포하는 조치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심순택 : "비록 어사가 내려갔더라도 관례대로 특별히 선무사(宣撫使)를 파견하여 타일러 깨닫게 해야 합니다."

정범조 : "지난번 임술년(1862)에 소요를 진정시킬 때에는 특별히 윤음(綸音)을 내리고 선무사를 보냈습니다. 이번에도 특별히 선유사를 파견하여 계속 윤음을 내리면 이는 곧 거듭 타이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도 강경하다면 엄한 처벌을 미루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고종 : "그러면 선유사로 임명해야 하겠는가, 선무사로 임명해야 하겠는가? 어윤중이 이미 내려갔으니 그에게 그 임무를 맡기는 것이 좋겠는가? 다른 사람을 임명하여 보내는 것이 좋겠는가?"

심순택 : "임술년(1862년)에는 선무사로 하였으니, 이번에도 관례대로 선무사라고 칭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정범조 : "서울에서 다른 사람을 보내는 것이 합당하지만 지금은 시일을 끌 수 없으니 단지 처분에 달렸을 뿐입니다."

심순택 : "어윤중을 충청도와 전라도 선무사에 임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러자 고종이 윤허하였다. 대화는 이어진다.

고종 : 군사를 동원하는 일도 할 수 있는가?"

심순택 : "군사를 동원하는 데에는 부신(符信)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감사와 병사의 직책이지만, 선무사가 서로 의논하여 할 수 있습니다."

고종 : "수령들의 잘잘못도 염찰(廉察)하여 민심을 위로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불법 행위가 있으면 감사(監司)에 대해서는 장계로 보고하고, 절도사(節度使) 이하 관리에 대해서는 직접 처단하는 것이 마땅하다."

심순택 : "지금 하교를 받들었으니 우선 전보를 쳐야 하겠지만, 이 전교(傳敎)로 처분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고종 : "지난번에 청주의 군사를 총제영(總制營)에 옮겨 배치하고 남은 인원이 아직 청주에 있으므로 무기를 모두 다 그대로 두게 하였다."

심순택 : "무기가 있고 남은 군사가 있으니 다행한 일입니다. 방어하는 일은 잠시도 늦출 수 없습니다."

고종 : "요충지의 길은 대체 몇 곳인가?"

심순택 : "수원과 용인은 바로 직로입니다."

정범조 : "안성(安城)도 직로입니다. 광주(廣州)와 용인이 서로 접해 있는 곳입니다."

심순택 : 군사를 우선 수원과 용인 등지에 나누어 주둔시키고 서울의 군사는 형편을 보아가며 활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고종 : "서울의 군사는 아직 파견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른 나라의 군사를 빌려 쓰는 것은 역시 각 나라마다 전례가 있는데, 어찌 군사를 빌려다 쓰지 않는가?"

심순택 : "그것은 안 됩니다. 만일 쓴다면 군량은 부득이 우리나라에서 진배(進排)해야 합니다."

조병세 : "군사를 빌려 쓸 필요는 없습니다."

정범조: "군사를 빌려 쓰는 문제를 어찌 경솔히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고종 : "중국에서는 일찍이 영국(英國) 군사를 빌려 쓴 일이 있다."

정범조 : "이것이 어찌 중국 일을 본받아야 할 일이겠습니까?"

고종 : "여러 나라에서 빌려 쓰려는 것이 아니라 청(淸) 나라 군사는 쓸 수 있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정범조 : "청나라 군사를 빌려 쓰는 것은 비록 다른 여러 나라와는 다르다고 하여도 어찌 애초에 빌려 쓰지 않는 것보다 더 나을 수 있겠습니까?"

고종 : "효유한 후에도 흩어지지 않으면 토벌해야 할 자들은 토벌하고 안착시켜야 할 자들은 안착시켜야 하니, 의정부에서 회의하되 시임 및 원임 장군들과도 의논하는 것이 좋겠다."

이어서 고종이 하교하였다.

"영남에서는 방어지로서 조령(鳥嶺)과 추풍령(秋風嶺) 중 어느 곳이 더 나은가?"

심순택 : "두 영(嶺)이 모두 중요한 요해지입니다. 영남 군사들도 역시 방어를 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고종 : "단속하고 제거할 방도를 잘 모여서 의논하라." (고종실록 1893년 3월 25일 1번째 기사)

이 날 고종은 ‘청나라 군사라도 들여와야 할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러자 대신들이 만류했다.

1894년 4월에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고종은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했고 이로 인해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고종은 참으로 황당 군주였다.

덕수궁 석어당 (사진=김세곤)
덕수궁 석어당 (사진=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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