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민공동회 2일째인 1898년 11월 6일에는 서울의 시전상인들이 모두 철시하고 만민공동회에 참가하였고 시민들은 경무청 문 앞에서 철야했다.

11월 7일 아침 6시경에 경무청은 이상재 등 17명을 고등재판소로 이송하였다. 이에 따라 시민들은 고등재판소 앞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외부대신 민종묵은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는 것에 양해를 구하기 위해 각국 공사관을 순방하였다. 그런데 영국 총영사와 미국 공사가 군대 동원에 우려를 표명했다.

한편 만민공동회는 고등재판소장에게 이상재 등 17명의 재판은 공개재판으로 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날 오후 경무사가 만민공동회의 해산을 종용하였지만 만민공동회는 “17명과 함께 생사를 같이 하기를 원한다.”고 대답하고 물러가지 않았고, 고등재판소 문 앞에는 시민들이 더욱 많아졌다.

특히 각 학교 학생들은 학부(學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수 참가하였는데, 11세의 소학교 학생 장용남의 “피를 토하는 연설”이 화제였다.

한편 만민공동회 참가자가 수만 명에 이르자, 수구파와 고종은 크게 당황했다.

11월 8일엔 차가운 겨울비가 내렸다. 시민들은 찬비를 맞으면서도 고등재판소 문 앞에서 시위를 계속하면서 철야했다.

고종은 이날 중추원 의장 한규설을 법부대신 겸 고등재판소장에 임명하여 정책 전환의 조짐이 보였다.

11월 9일 오전 9시경 군부대신 서리 유기환은 군대 동원에 의한 만민공동회 탄압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친위대 2개 중대 병력을 투입해서 탄압을 획책했다가 실패하였다.

이날 구경나온 외국인들은 만민공동회의 시위와 시민의 호응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으며, 외국공사·영사들도 외부(外部)를 방문해서 만민공동회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보초를 선 군인들까지도 독립협회를 지지하고 만민공동회에 동정을 표시했으며, 이날 밤 만민공동회를 포위하고 있던 200명의 군인들도 스스로 해산하여버렸다.

심지어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나온 한성부 관리들까지도 수구파 정부의 모략을 개탄하고 만민공동회에 동정을 표시하였다.

한편 전 승지 윤길병 등이 상소를 올렸다.

“이상재 등 17인을 경무청에 가두었다가 곧 법부에 넘겼습니다. 신 등이 삼가 생각건대 저와 같이 잡힌 17인은 바로 신 등과 일체 공적도 같고 일체 죄를 지은 것도 같습니다. 때문에 모두 자수하여 옥에 갇히려고 법부의 문 앞에서 4, 5일간 풍찬노숙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차에 경무사 신태휴가 신 등을 타이를 때 소매 속에서 익명의 투서를 꺼내서 보이고, 또 이름을 적은 목록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신 등은 이 투서가 간사한 무리들이 음모를 꾸며 모함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이 글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 백성은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터인데 유독 한 사람만이 먼저 보고서 임금에게 보고하였으니 너무나 의아합니다.

저들이 진실로 무슨 마음으로 나라와 백성들을 분란의 지경에 놓이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그 보고한 자를 특별히 의금부에 내려보내어 밝은 하늘 아래에서 재판을 받게 하소서" (고종실록 1898년 11월 9일 5번째 기사)

이날 밤도 시민들은 추위와 찬비 속에서 여전히 동요하지 않고 철야하였다.

만민공동회 6일째인 11월 10일에 대세는 결정적으로 만민공동회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시위가 계속되자 고종은 조병식·민종묵·유기환 등을 해임하였다. 이어서 고종은 법부대신 한규설을 불러들여 독립협회 17명의 재판이 어떻게 되었는가 묻고 재심까지 끝났다는 대답을 듣자, 즉시 돌아가 판결해서 마무리 지으라고 명령하였다.

이윽고 법부 대신 한규설이 피고 이상재 등 17명은 대신을 위협하고 재판을 강청한 죄가 있으므로 17명 전원을 태형 40대에 처한다고 선고했다고 아뢰자, 고종은 칙임관·주임관으로서 실직(實職)이 있는 사람만 속전(贖錢)을 물도록 하고 나머지는 속전도 면제한다고 제칙을 내려 17명 전원을 즉각 석방하였다. (고종실록 1898년 11월 10일 양력 4번째 기사)

이로써 만민공동회의 6일간의 투쟁으로 17명의 독립협회 지도자들이 석방되었다. 시민들은 감격에 넘쳐 서로 붙들고 울며 만세를 소리쳐 불렀다.

덕수궁 중화전 (사진=김세곤)
덕수궁 중화전 (사진=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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