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역사 2부 – 무오사화 126회 김종직의 시호를 의론한 이원과 행장을 지은 표연말의 공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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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역사 2부 – 무오사화 126회 김종직의 시호를 의론한 이원과 행장을 지은 표연말의 공초
  • 김세곤 칼럼니스트
  • 승인 2021.05.16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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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8년(연산군 4) 7월 18일의 이원의 공초는 이어진다.

“신이 봉상시 참봉(參奉)이 되어 김종직의 시호를 의론하기를 ‘김종직은 천자(天資)가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온량(溫良)하고 자애(慈愛)하였고, 일찍이 시례(詩禮)를 배워 자신이 이 도를 책임하여 덕에 의거하고 인(仁)에 의지하고, 충신하고 독경(篤敬)하여 사람 가르침을 게을리하지 아니하고, 사문(斯文)을 일으키는 것으로써 자기 직책을 삼았다. 그 학문을 하는 데는 왕도를 귀히 여기고 패도를 천히 여겼고, 그 일에 임해서는 지극히 간략하여 번거함을 제거하였고, 그 사람을 가르침은 문(文)을 널리 배워 예로 간략하고, 어버이를 섬기면 그 효를 다하고 임금을 섬기면 그 충을 다했으며, 사람의 선을 가리지 않고 사람의 악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청(淸)해도 애(隘)하지 않고 화(和)해도 흐르지 않았으며, 문장과 도덕이 세상에 특출하였으니, 참으로 삼대(三代) 시대의 유재(遺才)인 동시에 사문(斯文)에 대한 공이 중하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은 본시 김종직의 사람됨을 알지 못하옵고, 다만 표연말이 지은 행장(行狀)에 극구 칭찬하였기 때문에 이에 인하여 이렇게 의론한 것이온데, 그 때에 신이 과찬을 한 것으로써 죄를 받았습니다."

봉상시는 조선 시대 국가의 제사 및 시호를 의론하여 정하는 일을 관장하는 관서이다. 직제는 도제조(都提調) 1인(겸임), 제조 1인, 정(正) 1인, 부정(副正) 1인, 첨정(僉正) 2인, 판관 2인, 주부 2인, 직장(直長) 1인, 봉사(奉事) 1인, 부봉사 1인, 참봉 1인의 관원이 있었다.

참봉 이원은 봉상시의 가장 말단 관원이었다. 그런데 그가 시호를 의론하는 데 크게 영향력을 발휘했을까? 이런 말단 관원을 공초하는 연산군이 우스울 따름이다. 이원을 공초한 이유는 김종직과 관련 있는 인물이어서 그러리라.

이어서 표연말도 공초하였다.

"신은 함양(咸陽)에 사옵는데, 김종직이 본군의 군수로 와서 신이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신이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경의(經義)에 의심나는 곳을 질문하였으며, 그 문집은 신이 보았으나 단 조의제문은 문의를 해득하지 못했으며, 그 시집(詩集)은 당시에 보지 못했으므로 이른바 ‘육군(六君)’이 어느 사람을 지적한 것인지 알지 못하옵니다.”

표연말(表沿沫 1449∽1498)의 고향은 함양이었다. 그는 1472년(성종 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에 들어가고, 1490년에는 이조참의·대사성이 되고, 1492년에는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김종직(1431∽1492)은 40세인 1470년에 71세의 노모를 모시기 위하여 함양군수로 발령을 받았다. 1471년 12월에 봉정대부(奉正大夫)에 승진되었는데, 유자광이 일찍이 이 군(郡)에서 노닐면서 시를 짓고는 군 관아에 부탁하여 그 시를 판(版)에 새겨서 벽 위에 걸어놓았었는데, 선생이 이르기를, “유자광이 감히 현판(懸版)을 걸었단 말이냐.” 하고는, 즉시 명하여 거두어서 불태워버리게 하였다.

이어서 김종직은 1472년 8월에 두류산(지리산)을 산행하여 두류유산록(頭流遊山錄)을 지었고, 1475년까지 함양군수로 근무하였다. 이때에 김종직은 표연말, 정여창, 김굉필 등 여러 제자들을 가르쳤다.

표연말의 공초는 이어진다.

“다만 신이 김종직의 행장을 지으면서 쓰기를 ‘공의 도덕과 문장은 진실로 일찍이 현관(顯官 높은 벼슬)으로 등용되어 사업에 베풀었어야 할 것인데 어버이를 위하여 외직(外職)을 빌어 오래 하리(下吏 낮은 벼슬)에 머물러 있었고, 늦게야 임금의 알아줌을 입어 빨리 육경(六卿)으로 승진되어 바야흐로 크게 쓰이게 되었는데, 공의 병은 이미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두 번 다시 조정에 오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우리 도의 불행이 아니랴!

의논하는 자는, 「공이 조정에 선 지 오래지 않아서 비록 큰 의논을 세우지 못하고 큰 정책을 진술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 세상의 사문(斯文)의 중망을 짊어지고 능히 사도(師道)로서 자처하여 인재를 작성함에 있어서는 근세에 한 사람일 따름이다.’ 하였습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8일 3번째 기사)

김종직은 1476년에도 노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선산부사로 부임하였고, 1479년에 노모가 세상을 떠난 후, 1482년에 홍문관 응교를 거쳐 1489년에 형조판서에 제수되었다. 그런데 그는 병으로 1489년에 사직하고 고향 밀양으로 돌아와서 1492년에 별세했다.

경남 함양군 학사루 (사진=김세곤)
경남 함양군 학사루 (사진=김세곤)
학사루 안내판 (사진=김세곤)
함양 학사루 안내판 (사진=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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