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역사 2부 – 무오사화 -128회 이극돈, 한치형 ·신종호 · 노사신과 상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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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역사 2부 – 무오사화 -128회 이극돈, 한치형 ·신종호 · 노사신과 상의하다.
  • 김세곤 칼럼니스트
  • 승인 2021.06.02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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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8719일에 무오사화를 일으킨 이극돈이 상소하였다. 상소문을 읽어보자. (연산군일기 14987192번째 기사)

 

지난날에 신이 한치형과 더불어 의정부에 함께 있었는데, 한치형이 가만히 신에게 말하기를 김일손의 사초는 세조 조의 중대한 사실을 썼다 하는데, 사실인가?’ 하므로, 신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여 소릉(昭陵) 복구에 대한 일을 대답하니, 한치형은 신이 반드시 알지 못하는 것이라 여기고 다시 말하지 않았습니다.”

 

한치형(1434~1502)은 성종의 모친인 인수대비(1437~1504)의 인척이었다. 1467(세조 13)에 이조참판, 1469년에 호조참판이 되었으며, 성종이 즉위한 뒤 대사헌이 되었고 1471년에 형조판서를 하였다. 그 뒤 호조와 병조판서를 거쳐, 연산군이 즉위한 직후 좌찬성을 하였고 14987월에는 우의정이었다.

 

149871일의 연산군일기를 읽어보자.

 

파평 부원군 윤필상, 선성 부원군 노사신, 우의정 한치형, 무령군 유자광이 차비문(差備門)에 나아가서 비사(秘事)를 아뢰기를 청하고, 도승지 신수근으로 출납을 관장하게 하니 사관(史官)도 참예하지를 못했다. 그러자 검열(檢閱) 이사공이 참예하기를 청하니, 수근은 말하기를 참예하여 들을 필요가 없다.’ 하였다. 이윽고 의금부 경역(經歷) 홍사호와 도사(都事) 신극성이 명령을 받들고 경상도로 달려갔는데, 외인은 무슨 일인지 알지를 못했다.”

 

 

이처럼 한치형은 윤필상·노사신·유자광과 함께 무오사화의 주역이었다.

 

이극돈의 상소는 이어진다.

 

그 후에 신종호가 신의 집에 와서 이 사실에 언급한 뒤에 신이 비로소 알고, 다시 한치형에게 말하였습니다.

 

이극돈 : ‘전자에 말하던 세조 조의 중대사란 바로 모종의 사건이 아닌가?’

한치형 : ‘그렇다. 어떻게 들었는가?’

신은 신종호로부터 들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이극돈 : ‘공은 척리(戚里 인척) 대신이니, 궁금(宮禁)이 아무리 치밀하다 할지라도 어찌 듣고 보는 일이 없겠는가. 나는 비록 외신이긴 하지만 선왕조에 근밀(近密)의 곳에 처하여 조석으로 승지의 출입에 앞서거나 뒤서고 하였는데, 만약 그 사실이 있었다면 우리들이 반드시 먼저 들었을 것이 아닌가. 이 일을 듣고부터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으니, 끝내는 기필코 폭백(暴白 죄나 잘못이 없음을 밝힘)하고 말 것이네.’

한치형도 내 생각도 역시 그러하다.’ 하였습니다.”

 

신종호(1456~1497)는 할아버지가 신숙주이고, 어머니는 한명회의 딸이다. 그는 1480년 식년문과에 두 번째 장원을 하였고, 1486년 부응교로 있을 때 또다시 문과중시에 장원하여 과거제도가 생긴 이후 세 번이나 장원을 한 것은 처음이라며 칭송이 자자하였다. 1488년에 예조참의·좌승지·우승지·도승지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491년 대사헌, 1495년에 예조참판을 하였다. 1496년에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1497년에 돌아오던 중에 개성에서 죽었다.

 

이를 보면 이극돈과 신종호가 만난 것은 1496년 이전이다.

 

 

이극돈의 상소는 이어진다.

 

그 후에 신이 노사신의 집에 갔더니, 노사신이 신에게 말했습니다.

 

노사신 : ‘사관(史官)이 세조 조의 궁금(宮禁)에 대한 일을 쓴 것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러한가?’

 

이극돈 : ‘나도 역시 김일손의 사초에 씌어 있다는 것을 들었다. 내가 공과 더불어 날마다 근밀한 곳에 있었으니, 그런 일이 있었다면 우리가 당연히 먼저 들었을 것인데, 김일손(14641498)은 나이 어린 사람으로서 어디에서 세조 조의 일을 들었단 말인가?’

 

노사신 :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이후 서로 더불어 마음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습니다.”

 

노사신(1427~1498)은 조부가 좌의정 노한이고, 부친은 동지돈녕부사 노물재이다. 1453년에 급제하여 곧 집현전 박사에 선임되었고, 1462년에 세조의 총애로 세자좌문학에서 5자급(資級)을 뛰어넘어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1463년에는 도승지, 1465년에는 호조판서가 되어 최항과 함께 경국대전(經國大典)편찬을 총괄하였다. 1468년에는 남이·강순 등의 역모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 3등에 올라 선성군에 봉해졌다. 1469년에 의정부 우참찬·좌참찬을 거쳐 우찬성에 올랐고, 1470(성종 1)에 의정부 좌찬성에 올랐다. 1492년에 좌의정, 1495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문과독권관(文科讀卷官)이었을 때 처족을 합격시켰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영의정을 사직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 때 윤필상·유자광 등이 김일손 등 사림파를 제거하는 논의를 주동하자, 세조의 총신이어서 미온적으로나마 동조하였다.

 

사진 창덕궁 희정당 (사진=김세곤)
사진 창덕궁 희정당 (사진=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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