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12월 14일에 만민공동회는 광화문 앞에서 만민들을 폭행하려고  침투한 보부상 간부 4명을 잡아 추궁하였다. 이들은 ① 윤치호·고영근· 이상재의 암살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 ② 서울 시내 주요 보부상 도소 3곳에 보부상 및 몽둥이 꾼 수백 명을 매복시켰다는 것, ③ 보부상의 경비 19만 냥이 고종의 내탕금에서 공급되었다는 것, ④만민공동회를 공격하기 위해 백민회(白民會)가 조직되었는데 자금 2,000원을 탁지부 대신 민영기가 조달했다는 것 등을 자백하였다.

12월 16일에 만민공동회는 보부상 간부 4명을 경무사에게 인도하여 그들의 음모를 조사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12월 17일에 경무청 문 앞에서 모임을 개최하였다. 17일에 만민공동회는 고종에게 상소를 올렸다. 

상소의 요지이다. ①보부상을 혁파했다고 하지만 황국상무협회(皇國商務協會)로 개명하여 고종의 분부를 받아 행동하고 있고, ②보부상들의 경비는 황제의 하사금과 탁지부의 지출이라 하며, ③ 고영근·윤치호·이상재를 암살하려하고 있고,  ④ 백민회(白民會)는 만민공동회를 공격하기 위한 단체로 그 경비는 군부대신 민병석이 입안하여 탁지부대신 민영기가 지출했다 하니 이를 조사해서 처벌할 것이며, ⑤민영기·심상훈·김명규  3 대신의 해임, 조병식·민종묵·김정근 대신의 징계, 유기환·이기동 2흉의 재판 요구였다. 

 또한 만민공동회는 총대위원 이건호, 이승만을 파견하여 경무사 김영준의 사직을 권고하였다.

한편 고종은 12월 14일에 의정부에 중추원 개원 준비를 명했다. 중추원 의장 이종건은 12월 15일 오후 4시에 개원해서 윤치호를 부의장으로  선출했다. 

12월 16일 오전 11시에 속개된 중추원은 헌의 6조와 조칙 5조의 조속 실시를 촉구했다. 

또한 독립협회 출신 의관 최정덕은 현안 타개책으로 정부 대신에 임명할 11명을 선발하여 정부에 천거해서 황제가 서용하도록 하자고 제안하였다. 이 제안이 의제로 채택되어 정부 대신 급에 임명할 11명을 공천하기로 의결되었다. 이어서 중추원 의관들의 투표에 의하여 11명이 천거되었다. 개혁파로는 민영환·이중하·박정양·한규설·윤치호·김종한·박영효·서재필  8명이고, 수구파로는 민영준·최익현·윤용구 3명이었다.

그런데 중추원이 박영효와 서재필의 천거한 것은 너무 무모한 일이었다. 박영효는 대역죄인의 죄명을 쓰고 일본에 망명 중이었고, 서재필은 1898년 5월에 미국으로 추방된 상태였다. 그러나 이미 의결된 것이니, 박영효는 공개재판으로 죄의 유무 판정을 거치도록 하고, 미국 국적을 가진 서재필은 재입적을 거친 후 공천하기로 원안이 확정되었다.

중추원의 11명의 천거는 고종에게 중요한 결단을 요청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만일 고종이 중추원 천거자 11명으로 신정부를 수립했다면 만민공동회는 자발적으로 해산했을 것이고, 자주독립과 개혁이 추진될 수 있었으리라.  

독립협회 출신 중추원 의관들은 11명의 투표선출 결과를 만민공동회에 알리고 사후 인준을 구하였다. 이에 만민공동회는 일본에 망명해 있는 박영효를 소환하여 법부에서 그 죄의 유무를 재판해서 죄가 있으면 다스리고 죄가 없으면 징계를 면하여 서용하자고 결의하였다.

이런 가운에 만민공동회는 12월 18일에도 종로에서 모임을 계속하였다.

중추원의 11명 공천 결의안은 곧 정부에 제출되었다. 이에 고종은  고민에 빠졌다. 박영효는 고종의 결단을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내부(內部) 주사 이석렬 등 33인이 연명 상소하여 박영효의 소환과 서용을 주장하였다. 또한 독립협회 내 소장 급진파들인 이건호,현공렴, 이승만, 최정덕 등이 중심이 되어 박영효의 귀국 운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한편 민영기 등 수구파들은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킬 것을 은밀히 추진했다. 대한제국은 또 한 번 회오리가 몰아칠 분위기였다.  

덕수궁 중화전과 중화문   
덕수궁 중화전과 중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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