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즉위 40년 (2)

덕수궁 석어당

1901년 12월 25일에 황태자가 정청(庭請)하여 세 번째로 아뢰었다.

"신자(臣子)의 간절한 마음은 마음속에서 나온 것이어서 윤허 받지 않고서는 그만둘 수 없습니다. (중략) 바라건대 여러 사람들의 청을 특별히 허락하고 예원(禮院)으로 하여금 예법대로 거행하게 한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이러자 고종이 비답하였다. 

“추위를 무릅쓰고 간절히 청하는 효성도 생각지 않을 수 없으니 존호(尊號)를 올리는 일에 대해서는 마지못해 따른다. 그러나 연회에 대하여 말하면 지금 백성들이 처한 처지에서 헤아리면 짐의 마음이 어찌 편안하겠는가? 내년 가을에 해도 결코 늦지 않으니 부모의 뜻을 받드는 도리에서 보아 마땅히 이해하라.”
(고종실록 1901년 12월 25일 )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1901년에 서울에 진청(賑廳)을 설립하여 5부(部)에서 기아 인구 19,683명을 선별하였다. 이때 얼어 죽은 사람과 굶어 죽은 사람이 수만 명이나 되었으며, 그 고통을 못이겨 온 가족이 독약을 먹고 사망한 사람들도 있었다. 혜민원(惠民院)에서는 날마다 죽을 두 번씩 끓여 결식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렇게 백성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연회를 하는 것이 민망했던지 고종은 몇 번의 사양 끝에 1902년 가을에 연회를 열라고 명한 것이다.     

다음 날인 12월 26일에 고종은 중화전에 나아가 황태자가 직접 올리는 축하문과 백관(百官)이 올리는 표문(表文)을 받고 이어서 하례(賀禮)를 받았다.

이날 의정부에서는 황제에게 가상하는 존호의 망을 ‘건행곤정영의홍휴(乾行坤定英毅弘休)’로 올리니, 아뢴 대로 하라는 칙지를 내렸다. (고종실록 1901년 12월 26일)

한편 1902년 2월 8일(음력 정월 초하루)에 고종은 중화전에서 진하(陳賀)를 받고 사면령을 반포했다. (고종실록 1902년 2월 8일)
    
"(전략) 올해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신음소리가 높고 나라의 재정이 고갈되고 대농(大農)들도 지탱하기 어려운 형편에서 밤낮으로 걱정하다 보니 비단옷에 쌀밥을 먹어도 마음이 편치 않다. 이런 때에 연회를 벌이는 일을 무슨 겨를에 의논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거듭 아뢰는 간절한 정성을 이해하여 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저 경사를 축하하는 절차만 윤허했던 것이다. (중략) 이런 큰 경사를 만나면 의당 사면령을 내리는 은택을 베풀어야 할 것이니 시행해야 할 사항을 아래에 조목별로 열거한다. (중략) 온 나라가 경사를 함께 즐겨야 할 것이니, 천하에 선포하여 다 들어서 알게 하라."

2월 13일에 고종은 의정부에서, ‘탁지부가 청의(請義)한 내진연(內進宴) 연회와 외진연(外進宴) 연회 때, 진찬소(進饌所)의 비용 31만 9,811원(元)을 재가했다. 고종의 속내는 정말 알 수 없다. 경축 진하만 받겠다고 해놓고, 내진연 · 외진연 예산을 재가한 것이다.     

3월 5일에 고종은 중화전에 나아가 또 진하를 받고 대사령을 반포했다.  

"(전략) 백성들이 굶주리고 나라의 저축이 거덜 나서 근심 걱정으로 비단옷에 쌀밥을 먹어도 마음이 편안치 않으니 의문(儀文)과 전례(典禮)는 말할 만한 것이 못 된다. 

그래서 사양하다가 거듭 아뢰기에 경사를 선포할 것에 대해서만 윤허하였는데 또 뒤이어 추위를 무릅쓰고 모든 관리들을 거느리고 대궐 뜰에서 청하면서 여러 날 동안 간절한 성의를 더욱더 보이기에 할 수 없어 억지로 따르기는 하였으나 본심은 아니어서 짐이 실로 부끄럽게 여겼다.
(중략) 음력 정월 18일(양력 2월 25일)에 황태자가 옥책과 금보를 올려 짐에게 ‘건행 곤정 영의 홍휴(乾行坤定英毅弘休)’라는 존호를 더 올렸다. (중략) 아! 짐에게 경사가 생기면 온 나라 사람들이 함께 즐기는 법이다. 덕음(德音)을 반포하니 온 나라 백성들에게까지 그것이 미치도록 다 들어서 알게 하라." (고종실록 1902년 3월 5일) 

이윽고 3월 19일에 고종은 즉위 40년 기념 경축식을 준비하라는 조령을 내렸다.
  
"올가을에 등극한 지 40년이 된 것을 경축하는 예식을 거행하려고 한다. 응행의절(應行儀節)을 의정부, 궁내부, 예식원, 장례원(掌禮院)에서 서로 의논하여 결정한 다음 마련해서 들이게 하라." 
(고종실록 1902년 3월 19일) 

4월 24일에 고종은 1902년 음력 9월 17일(양력 10월 18일)에 경운궁에서 즉위 40돌 경축식을 가지도록 조령을 내렸다. (고종실록 1902년 4월 24일)

고종은 참으로 이중적이다. 처음에는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다면서 연회를 거절하더니, 이제는 내진연 · 외진연 연회는 물론이고 외국 사절도 참석하는 경축식까지 거행하라고 지시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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