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기로소에 들다.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 (서울시 광화문 교보문고 앞)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 (서울시 광화문 교보문고 앞)

1902년 4월 2일에 황태자가 상소하여 기로소(耆老所)에 들 것을 청했다. 

"우리 왕조의 기사(耆社)의 예법은 또 경사스러운 의식 중에서도 성대한 것입니다. 이 예법은 우리 왕조 초기에 처음 생겼는데 숙종과 영조 두 훌륭한 임금이 그것을 계승하였는데 이것도 보기 드문 일입니다. (중략) 올해는 바로 폐하께서 51세가 되는 경사로운 해로서 이 해에 영조가 이미 시행한 규례를 그대로 시행하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떳떳한 법이며 국조(國朝)의 전고(典故)에도 근거할 만한 의식 절차가 있으므로 소자의 청을 기다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중략)
또한 진연(進宴)하는 의식도 있습니다. 이것 역시 이미 시행한 것으로써 응당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중략) 위로는 조종(朝宗)의 성헌(成憲)을 생각하고 아래로는 신하와 백성들의 여론을 따르소서."

이러자 고종이 비답하였다. 

"네가 한 말은 모두 선대의 일을 이어받는 문제인 만큼 기사(耆社)의 절차는 억지로나마 따른다. 연례(宴禮)는 지금 나라 형편 때문에 절대로 거론할 수 없으니 너는 그리 알라."
(고종실록 1902년 4월 2일) 

고종은 기사는 허락하고 연회는 거절했다. 하지만 연회도 황태자가 또 다시 청하면 마지못한 척하면서 허락할 것이다. 이런 적이 한두 번이었던가.       

4월 13일에 황태자가 연회를 베풀 것을 다시 청했다.

"(전략) 외람되이 거듭 청하니 부황 폐하께서는 재삼 생각해서 진연(進宴)을 시행하도록 빨리 명령을 내려서 선대의 옛 법을 본받고 저의 마음을 굽어 살피소서."

이에 고종이 비답하였다. 

"연회를 그만두려고 하였다. 하지만 너의 효성이 간절하니 진연(進宴)을 베푸는 일을 마지못해 따른다. (고종실록 1902년 4월 13일) 

고종은 이번에도 마지못해 따랐다. 참으로 노회하다.  

이날 고종은 진연청 당상 김성근과 전선사 제조 이지용을 소견하였다. 고종이 말했다. 

“외진연 처소는 중화전으로 하고 내진연 처소는 함녕전으로 하라. 이번 진연은 나라의 형편과 백성들의 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 간략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고종실록 1902년 4월 13일) 
 
내진연은 왕족들끼리 축하하는 잔치이고, 외진연은 신하들이 축하하는 잔치이다. 경축식은 내외 귀빈이 모두 축하하는 자리이다. 

5월 4일에 고종은 기로소(耆老所)에 가서 영수각(靈壽閣)을 봉심(奉審)하고 기로소에 참여한다는 내용의 어첩(御帖)을 직접 썼다. 황태자와 영왕(英王) 이은도 따라 올라갔다. 예식이 끝나자 상의사 제조(尙衣司 提調) 이지용이 궤장(几杖)을 바치자 황제가 직접 받고나서 대신들과 기로소의 당상(堂上)을 인견(引見)하고 말했다. 

고종이 말했다. 
"음식을 내릴 것이니 기로소의 당상이 받고 내가 대궐로 돌아갈 때에는 나의 행차를 따르지 마라."

(고종실록 1902년 5월 4일) 

5월 5일에 고종은 중화전에 나아가 축하를 받고 대사령(大赦令)을 반포하였다. 이번이 세 번째이다. 

" (전략) 기로소에 들어가는 어첩을 쓰는 것으로 말하면 50세 이후에 더러 하는 것으로써 원래 일정한 규례가 없으며 떳떳한 법도는 세 선조 임금의 옛 법도는 그대로 따르는 것이니 이번이 네 번째의 경사가 된다. 
이것은 선대의 일을 이어나가는 것으로써 반드시 지나치게 겸손할 필요가 없겠기에 기로소에 직접 가겠다고 마지못해 허락하였다. 

올해 음력 3월 27일(양력 5월 4일) 새벽에 하늘과 땅, 종묘 사직에 삼가 고하고 먼저 진전(眞殿)을 전알(展謁)한 다음 영수각을 참배하였다. 궤(櫃)에서 선대의 어첩을 꺼내고 선대의 사적을 본받아 직접 어첩을 썼으며 왼쪽의 궤(几)와 오른쪽의 지팡이는 상의사에서 무릎을 꿇고 바쳤다. (중략) 응당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야 할 것이다. 천하에 포고하니 모두 알게 하라." (고종실록 1902년 5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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