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즉위 40년 칭경 행사 준비

창덕궁 인정전
창덕궁 인정전

 

                                  
1902년 5월 27일에 고종은 함녕전에서 기로소 당상(耆老所 堂上)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고종실록 1902년 5월 27일 1번째 기사)

참석자는 황태자와 영왕, 의정 심순택, 특진관 조병세, 영돈녕 원사 윤용선, 기로소 당상 조병식·이순익·서상우·이용원 등이었다. 연회에는 술과 과일, 음식 등이 나왔고, 악공들이 연주하고 무동(舞童)들이 춤을 추었다.  

이어서 고종은 기로소에서 연회를 베풀 것을 명했다. 

"기로소의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나머지 음식을 가지고 가서 기로소에서 연회를 벌이게 하라." (고종실록 1902년 5월 27일 2번째 기사)   

5월 30일에 고종은 함녕전에 나아가 외진연(外進宴)을 받았다. 

“(전략) 황태자가 제1작(第一爵)을 올리고 이어 사배하였으며 종친과 문무의 관리들이 국궁하고 사배하였다. 반수(班首)인 의정 심순택이 제2작을 특진관 조병세가 제3작을, 영돈녕원사 윤용선이 제4작을, 완평군 이승응이 제5작을, 학부대신 민영소가 제6작을, 참정 김성근이 제7작을, 내부대신 이건하가 제8작을, 특진관 김영목이 제9작을 올렸는데, 모두 위와 같은 의식으로 하였다.” 
(고종실록 1902년 5월 30일)   

다음날인 5월 31일에는 함녕전에서 내진연(內進宴)을 행하였다. 제1작(第一爵)은 황태자가, 제2작은 황태자비가, 제3작은 영왕(英王 영친왕 이은)이, 제4작은 연원군부인(延原郡夫人)이, 제5작은 정경 부인 한씨가, 제6작은 정부인(貞夫人) 홍씨가, 제7작은 정부인 이씨가, 제8작은 종친의 반수(班首)인 완평군 이승응이, 제9작은 척신(戚臣)의 반수인 특진관 김석진이 올렸다. 이어서 야진연(夜進宴)을 행하였다.
(고종실록 1902년 5월 31일)

그런데 황현은 『매천야록』에 이렇게 적었다. 

“고종이 기로소에 들었다. 이것은 숙종과 영조 전례에 의한 것이다. 
 임금은 영수각에 참배하고 양로연(養老宴)을 베풀었다. (중략)
 바야흐로 양로연을 치르면서 연일 북을 치고 풍악을 즐기므로 백성들은 궁중으로 기와 조각을 던졌다. 이에 별입시(別入侍)들은 별원(別院)으로 장소를 옮기자고 청하였는데, 고종은 그때까지 투석사건을 몰랐다.”

민심을 외면한 고종과 황태자 그리고 대신들, 그들은 마냥 축하연만 하였다.   

1902년 7월 20일에 의정부 의정 윤용선이 즉위 40돌 경축 기념식에 대하여 아뢰었다. 
  
“어극(御極) 40년 칭경예식을 참작하고 의논해서 마련하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신들이 정부에 일제히 모여 자세히 상의해서 의정(議定)한 내용을 별단(別單)으로 올립니다.

별단은 아래와 같다.
 
1. 올해 10월 18일(음력 9월 17일) 대황제 폐하의 즉위 40년을 칭경할 때 높고 낮은 신하들과 백성들이 모두 칭송하는 경축 의식을 할 것입니다. 

1. 외부대신은 6개월 전에 정부와 의논한 다음, 수도에 주재하고 있는 각국의 공사와 영사들에게 칭경하는 예식 날짜를 알려 본국 정부에 통보하게 할 것입니다. 

1. 예식원에서는 6개월 전에 아뢰어 황제의 칙령으로 위원(委員)을 정해 가지고 분장(分掌)하게 하여 거행하게 할 것입니다. 

1. 경축 의식날에 원구단에 고유제(告由祭)를 친행(親行)하실 것입니다. 

1. 원구단에 고유제를 친행하실 때 황태자 전하가 규례대로 모시고 참석하며, 종친들과 문무의 백관은 예문(禮文)대로 예식을 진행하고 각국 사신들은 반열을 따라 들어와 참석할 것입니다. 

1. 경축 의식 이튿날 축하를 올릴 때 대황제 폐하는 중화전에 친림(親臨)하시되 황태자 전하는 규례대로 모시고 참석하며 종친들과 문무의 백관은 예문대로 예식을 진행할 것입니다. 

1. 관병식(觀兵式), 원유회(苑遊會), 각종 연회는 예식원에 관계되는 각 부(府), 부(部), 원(院), 청(廳)에서 규례대로 마련하여 설행할 것입니다. 

1. 칭경예식 때 일체 시행해야 할 여러 일은 위원이 각 해사(該司)에 알려 그로 하여금 기한에 앞서 준비하고 기다리다가 분명하고 질서 있게 거행하도록 할 것입니다. 

이러자 고종이 윤허하였다.”
(고종실록 1902년 7월 20일 1번째 기사)


어극 40년 칭경예식은 1902년 10월 18일에 치를 예정이었다. 정부는 행사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런데 문제도 일어났다. 황현의 『매천야록』을 읽어보자 

“예식원을 지어 경축연 행사장으로 삼고, 창덕궁을 중수하여 각국 대사들의 연회장소로 삼으려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뭇 도둑들이 마구 들어가 목창(木廠)을 파괴하고 장판지를 벗겨 갔다. (황현 지음 · 임형택 외 옮김, 역주 매천야록 하, 2005, p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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