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레라로 칭경식이 두 번이나  연기되다. 

고종 어극 40년 기념우표 

1902년 가을에 콜레라가 전국에 퍼졌다. 원산에서 윤치호는 1902년 9월 1일과 7일 일기에서 이렇게 적었다.

“9월 1일(음력 7월 29일) 월요일, 흐림.

중국 북부지방에서 일어난 의화단 사건이 남긴 유산 중 하나는 콜레라다. 콜레라는 의주를 통해 조선으로 침투하였다. 진남포는 콜레라에 감염된 것 같다. 그것도 심하게 말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콜레라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고 한다. 원산은 큰 위험지역이다. 

사람들은 콜레라를 두려워하는 것 같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장 간단한 위생 규칙을 준수하게 만드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오물과 먼지가 쌓여 있는 집안을 청소하도록 강제하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투덜거린다. ʻʻ우리 아버지 세대들은 오랫동안 아주 더러운 곳에 살면서도 그다지 나빠지지 않았습니다. 살고 죽는 것은 다 운명에 달렸습니다.ʼʼ

9월 7일, 일요일, 비

원산. 태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거의 잊어버릴 지경이다. 지난 7일 동안 비, 비, 오직 비뿐이다. 이 끔찍한 날씨에 완전히 질려버렸다. 곡식들이 비 속에서 썩어가고 있다. 콜레라는 원산의 말할 수 없는 오물, 이름 없는 악취와 지독한 날씨 때문에 노동 현장을 강타한 것 같다. (중략)

원산에서 콜레라 환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하디 박사의 조제약을 받아서 경찰서로 보내 환자들에게 공급하게 하였다. 하지만 경찰서 형사는 환자들이 그 약을 지시한 대로 복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외국 약은 필요없다고 말한다.(후략)”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 4, 1902년 9월)  

콜레라가 극성이자 9월 20일에 고종은 조령(詔令)을 내려 즉위 40년 경축식을 내년(1903년)에 하도록 명했다.   

“요즘 몹쓸 병 기운이 크게 퍼지는데, 이런 때에 각국의 사신들이 먼 길을 오는 것도 심히 불안한 노릇이다. 경축 의식을 내년에 가서 택일하여 거행하도록 분부하라. 이어 임시 혼성 여단(渾成旅團)을 해산하며 수도에 불러올린 각 진위대(鎭衛隊)를 도로 내려보내라고 명하였다.”
(고종실록 1902년 9월 20일)   

황현도  『매천야록』에 진위대에 대하여 기록했다.     

“강화, 원주, 대구, 진주, 수원, 전주의 진위대에서 1,500명을 차출하였다. 장차 여단(旅團)을 편성하여 경축연(慶祝宴)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진위대의 병사들이 올라오면서 도로가 소란하였으나, 얼마 후 경축연의 예식 일자가 미루어지자 다시 되돌아가라는 명을 내렸다.”

10월 4일에 장례원경 서리(掌禮院卿 署理) 이용선이  "왕위에 오른 40돌 경축 의식을 음력 계묘년(1903) 4월 4일(양력 4월 30일)로 날을 받아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아뢰니, 윤허하였다.
(고종실록 1902년 10월 4일)

기념식은 1903년 4월 30일로 연기되었으나, 기념 우표는 제 날짜인 1902년 10월 18일에 예정대로 발행되었다. 대한제국 전환국은 3전짜리 우표 5만장을 발행했는데 등황색에 왕관과 이화가 디자인되어 있었다.   

아울러 정부는 기념식을 위해 포드 자동차를 구입했다. 탁지부 대신이 알렌 공사에게 협조를 요청했는데, 알렌은 미국의 자동차 딜러에게 부탁하여 포드 자동차가 인천항에 들어왔다. 그런데 국내에는 운전사가 없어 일본인을 고용했다 한다. (김용삼 지음, 지금 천천히 고종을 읽는 이유, 2020, p 336) 그래서 자동차 업계는 1903년을 한국 자동차의 원년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1903년 4월 10일에 고종은 칭경식을 가을로 연기하라고 명령했다. 영친왕 이은이 천연두에 걸린 것이다.

“궁중에 천연두의 증세가 있는데, 이런 때 각국의 사신을 접견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편안하지 않다. 칭경(稱慶)하는 예식은 가을에 날을 받아 거행하라” (고종실록 1903년 4월 10일 2번째 기사)   

경축식이 20일 앞두고 연기되었으니 예식 준비 관계자는 우왕좌왕하였다.   
 
황현은 『매천야록』에 이렇게 적었다.  

“이은이 마마병(천연두)을 앓고 있어 경축식을 다시 가을로 미루었다. 외국 사절을 접견하면 불결한 일이 있을까 싶어 경축연을 가을로 미룬 것이다. 서양의 사절 중에 이미 도착한 사람에게는 우물쭈물 변명해 사례하고 여객선 비용을 배상하여 주었다.”

한편 경축식과 관련하여 부작용도 일어났다. 역시 『매천야록』에 나온다.   
“경축연의 경비가 궁색하여 다시 경강(京江)의 상선(商船)에 대한 세금을 부과하였다. 대선(大船)은 30냥, 중선(中船)은 22냥, 소선(小船)은 15냥이었다.

일본 상인이 경축 기념잔(盞)을 제조하여 서울에서 판매하였다. 그들은 우리 조정이 날마다 경축행사를 꾸미고 있는 것을 보고 백자 기념잔 10만개를 만들어 그 잔에다가 금으로 새기기를, 「壽齊南山 福溢漢水(수제남산 복일한수 : 수는 남산과 가지런하고, 복은 한강수처럼 넘치리)」라고 하였다. 황제를 송축하는 글귀라고 하지만 외국인들에게 조롱당함이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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