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의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

기념비각
기념비각

서울시 광화문 교보빌딩 앞 도로변 모서리에 있는 비각을 찬찬히 보았다. 비각에는 ‘기념비전’ 현판이 붙어 있고, ‘기념비전’ 현판 글씨 오른편  위에는 ‘헌필(獻筆)’, 왼편에는 ‘광무 6년 임인 9월’이라고 적혀 있다. 광무 6년이면 1902년이다. 비각 정면에는 ‘만세문’이 있고, 그 양옆에는 해치상이다.  

비각 오른편에는 ‘서울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高宗 御極 四十年 稱慶紀念碑)’라고 적힌 안내판이 있다.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는 1903년 9월 2일에 세워졌다. 비석 앞면의 전액(篆額)은 황태자 순종의 글씨로 ‘大韓帝國大皇帝寶齡望六旬御極四十年稱慶紀念頌(대한제국 대황제가 60세를 바라보게 된 것과 즉위한 지 40년이 된 것을 축하한다.)”라고 썼다. 

원래 고종이 즉위한 지 40년이 되는 해이자 51세가 되어 기로소에 입소한 해는 1902년이었지만, 나라 형편이 어려워 한해 늦게 세우게 되었다.” 

칭경기념비의 비문은 의정(議政) 윤용선이 짓고, 글씨는 민병석이 썼다. 
비문은 서(序)와 송(頌)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황제 칭호를 쓰고 광무(光武)라고 연호를 세운 일, 재위 40년이 된 일과 영수각(靈壽閣)에서 기로소에 들어간 의절(儀節)을 베푼 사실 등을 서술하였다. 

한편 황현은 『매천야록』 ‘권3 1903년’에 ‘송덕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 지방관들에게 돈을 징수했다.’고 적었다.   

“송축소(頌祝소) 보조금을 다시 징수하였다. 지난해 조병식 등이 고종의 송덕기념비를 건립할 때 그 비용을 경관(京官) 및 지방관들에게 징수하니, 관찰사는 100원, 군수는 4등급으로 나누어 80원에서 40원까지 받고 또 각 군별로 벼슬아치와 선비들도 장부에 기록하였으나 아무도 응한 사람이 없으므로, 군수가 부호(富戶)를 택하여 강제로 수십, 수백냥을 부과하였다. 이토록 한 번만으로 부족해서 이때 또 징수한 것인데, 군수가 종종 착복하기도 하였다.”

또한 윤치호도 1902년 9월 7일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9월 7일(음력 8월 6일), 일요일, 비

『황성신문』은 소위 황제 탄신일 관련 사설에서 이 거짓으로 가득 찬 나라에서 남녀노소 모두의 속을 뒤틀리게 하는 지나친 아첨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사람들의 속이 뒤틀리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먼저 『황성신문』을 읽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조선인의 위장은 왕을 향한 메스꺼운 아첨을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양의 아첨에도 속이 뒤집히지 않는다. ... 이것은 모두 올해가 근대나 고대를 통틀어 역사상 그의 영광과 덕목에 필적할 만한 자가 없는 황제의 재위 40주년이기 때문이다!!

대황제의 찬란한 업적을 찬양하는 글을 새긴 기념비가 서울에 세워질 예정이다. 이 일을 위해서 정부의 모든 관료들이 1개월분 녹봉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 돈만으로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 국민의 주머니를 털어야 했고, 13개 도의 유지들은 자발적으로 기부하라는 강요를 받고 있을 것이다. 함경남도는 2만 5,000냥, 즉 5천 달러를 내야 한다. 우리 구역인 덕원은 1,100냥을 내기로 되어 있다. 

대황제가 40년 동안 재위하면서 이룬 수많은 업적 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사실은 빼놓지 않고 반드시 새겨 넣어야 한다.

1. 대황제의 궁궐은 일본군에 의해서 세 차례 침범당했다.
2. 일본인이 황후를 시해했다.
3. 황제와 황제의 부친사이에 비정상적인 싸움이 일어났다.
4. 일본의 은총을 받아 조선에서 중국인을 축출했고, 그 뒤 왕이 황제로 등극했다.
5. 황제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다.
6. 보잘 것 없는 대가를 받고 조선의 가장 귀중한 권리와 이익을 외국에 이양했다.
7. 황제는 습관적으로 많은 훌륭한 개혁 약속을 했다가 저버리곤 한다.”

그런데 1903년 가을에 성대하게 치르기로 한 ‘고종 즉위 40년 칭경식’은  무산되었다. 1903년 4월 러시아가 무단으로 용암포에서 산림을 채벌하자 러일 관계가 악화되었고, 10월에는 만주와 한반도를 둘러싸고 러일 간 갈등이 극에 달했다. 결국 1904년 2월 8일에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이로써 여러 번 연기된 칭경식은 치르지 못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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