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송진 채취 상처를 안고
묵묵히 산을 지키고 있는 양평 용문사 소나무
고통이 인간만의 아픔이 아니었음을
새삼 깨닫게 한다

정숙자 문학박사
정숙자 문학박사

[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숙자 문학박사] 함께 공부하는 도반들과 먼 거리의 스승님을 만나기 위해 더위를 밀치고 길을 나섰다. 대학원을 마치고 각자의 지역과 자리에서 활동 중이라 만나기가 쉽지 않아 꽤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다. 여전히 열정이 가득했고 아직도 배움에 목말라 있었다. 논문을 지도하시고 우리의 배움을 확장시킨 교수님을 중심으로 몇몇이 아직도 그 연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배움이라는 하나의 목적으로 만나 서로를 배려하고 염려하는 마음이 진솔하게 와 닿는다.

반가운 얼굴들과 양평에 있는 용문사 절을 방문하였다. 늦은 오후라 사람들이 적었다. 아니 코로나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사람들의 드문 방문을 뒤로하고 소나무 숲길을 지나 은행나무가 위치한 절까지 가는 도중에 우리는 되돌아왔다. 산이라 갑자기 어둠이 밀려왔다. 코로나에 밀리고 어둠에 밀쳐져 우리는 작은 인간으로 남는다.

절을 향하는 동안 큰 소나무마다 상처의 흔적이 남아있어 여쭈었더니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강제로 송진을 채취해 갔다는 것이다. 6.25의 흔적이 아닌 그보다 전 시대에 생긴 아픔의 상징이었다. 그렇다, 나라 없는 서러움을 사람만이 겪었던 것이 아니었다. 우리 산천도 우리와 함께 그 설움을 감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묵묵히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만이 그 고통을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리 없이 울부짖던 고향산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리의 설움과 고통이 하늘을 향했고 끈질긴 투쟁이 인간만의 몫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절을 내려오는 동안 그 소나무의 상처가 오랫동안 뇌리에 남았다. 아픔이 전해오고 있었다. 묵묵하게 바람에 따라 소나무의 가늘고 여린 잎들은 살짝살짝 어두운 하늘에게 가슴을 보이고 있다. 어둠이 조용하게 소나무 손가락 사이로 파고든다. 긴 몸통은 어둠과 함께 노닐고 있다. 어둠이 소나무를 삼킨 것인지 소나무가 어둠을 흡수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아마 어느 쪽이든 소나무는 불평 없이 그저 받아들이고 또 그렇게 세월을 보낼 것이다. 그러면서 나이를 잘 먹어갈 것이다. 조급하지 않고 욕심내지 않으면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잘 성숙하게 늙어 갈 것이라고 확신한다.

오늘 나는 용문사의 소나무를 보면서 자연도 우리와 함께 나이를 먹어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세상의 진리를 하나 깨닫는 순간 나는 혼자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들에게 아픔을 묻고 이야기에 관심을 가진다면 나의 이 척박한 인생도 다소 풍요롭지 않을까 싶다.

저작권자 © 한국농어촌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