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는 일생동안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김세곤 칼럼리스트

[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리스트] 길을 떠난다. 비운의 왕 단종(1441∼1457)을 만나러. 단종애사(端宗哀史)의 흔적을 찾기 위해 맨 먼저 가는 곳은 사육신 공원이다.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에 있다. 공원 입구의 홍살문을 지나 ‘사육신 묘(死六臣 墓)’ 안내판부터 보았다.

“이곳은 조선 제6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목숨을 바친 사육신을 모신 곳이다. 단종 3년 음력 윤6월(1455년)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고 즉위함에 이에 의분을 품은 충신들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탄로되어 참혹한 최후를 마치니 이들을 훗날 사육신이라 부르고 있다. (후략)”

이어서 ‘사육신 공원 역사관’을 관람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곳에 상촌 신흠(1566∼1628)의 시가 적혀 있는데, ‘梅一生寒不賣香(매 일생 한 불매향)’ 구절이 가슴에 와 닿는다.

“매화는 일생동안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역사관에는 ‘충신들의 이야기’가 전시되어 있다. 단종 관련 연표가 정리되어 있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 게시판에는 단종복위 모의 실패가 적혀 있다.

“사육신은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에게 신임을 받았고 문종에게서 나이 어린 세자(단종)을 잘 도와 달라는 명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 처형당한 충신들이다.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이 1455년에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이들은 단종 복위를 결의하고 그 기회를 살피고 있었다. 1456년 6월 이들은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에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유응부가 별운검이 된 것을 기회로 세조 일파를 제거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운검이 취소되자 실행을 미루었다.

이에 같은 동지이며 집현전 출신인 김질이 뒷일이 두려워 세조에게 단종복위 음모를 일러바쳤고 세조는 연루자를 모두 잡아들여 직접 이들을 심문했다. 이때의 주모자중 남자는 처형되었고 여자는 노비가 되었다. 이 충신들은 1691년 숙종 때 관직이 복구되었고 노량진 동산의 묘소아래 민절(愍節)서원에 모셔졌다.”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 사육신공원을 찾았다. 이곳은 단종애사(端宗哀史)의 흔적이 고스란이 남아있는 장소다. 사진=김세곤

그러면 단종 복위운동을 자세히 살펴보자. 1453년 10월10일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은 정권을 장악했다. 1455년 윤6월11일에 단종은 경회루에서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선위했다. 사실상 왕위 찬탈이었다. 이 때 단종의 명을 받고 상서원에서 옥새를 가져온 예방승지(禮房承旨) 성삼문이 통곡하니, 세조가 부복(俯伏)하여 사양하다가 머리를 들어 이를 눈여겨 보았다.

박팽년은 경회루 연못에 투신하려 하자 성삼문이 만류하며 “왕위는 비록 양위되었으나 단종이 상왕으로 있으니, 죽지 말고 후일을 도모하자. 도모하다가 실패했을 때 죽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고 설득하니 박팽년이 따랐다.

10월24일에 세조는 예문대제학 신숙주를 주문사로 삼아 명나라에 보내 국왕의 책봉을 청했다. 1456년 2월3일에 신숙주를 따라갔던 김유례가 일행보다 먼저 돌아와서 책봉이 이루어진 사실과 환관 윤봉과 김흥이 책봉사가 되어 2월15일에 북경을 출발한다는 기별을 전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성삼문은 박팽년과 함께 단종 복위 거사를 결심하게 된다. 성삼문 가문과 명나라 환관 윤봉과는 친교도 있었다. 드디어 3월22일에 윤봉 등 명나라 채봉사가 의주에 도착했고 4월20일에 세조는 친히 모화관으로 나와서 책봉 조서를 받았다. 5월16일에 세조는 상왕(단종)과 더불어 경회루에서 잔치를 베풀어 명나라 사신을 접대했다.

이에 승지 성삼문, 중추원 부사 박팽년, 집현전 직제학 이개, 예조참판 하위지, 성균 사예 유성원 등 집현전 출신 학자들을 주축으로 거사를 계획했고 무반인 유응부, 박쟁, 성승과 예문 대제학 박중림, 예조판서 권자신, 이조판서 김문기, 성균 사예 김질, 공조참의 이휘, 윤영손 · 허조 · 송석동 등 70여명이 뜻을 함께 하였다.

사육신은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에게 신임을 받았고 문종에게서 나이 어린 세자(단종)을 잘 도와 달라는 명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 처형당한 충신들이다. <불사이군의 충절 게시판> 사진=김세곤

이들은 상왕이 명나라 사신을 창덕궁으로 초대하여 환송연을 베푸는 6월1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세조와 세자가 연회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고, 세조는 별운검(임금을 호위하기 위해 칼을 든 무신)으로 성승 · 유응부 · 박쟁을 선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사 한명회가 분위기가 이상함을 느끼고 연회 직전에 창덕궁 광연전이 좁고 날씨가 무덥다는 핑계를 대어 세조는 별운검을 들이지 말라고 어명을 내렸다.

이러자 주모자간에 의견이 엇갈렸다. 무신 유응부는 일이 누설될 것을 염려하여 계획대로 진행하자고 했고, 성삼문과 박팽년은 “별운검을 세우지 않고 세자가 오지 않은 것은 하늘의 뜻이니 거사를 연기하자”고 했다. 결국 성삼문·박팽년의 의견이 관철되어 거사는 연기되었고 유응부 의 우려대로 내부밀고자가 생겼다. 김질이 그 장본인이었다. (다음주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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