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역사 2부 – 무오사화 118회 김종직의 「화도연명술주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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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역사 2부 – 무오사화 118회 김종직의 「화도연명술주시』 (3)
  • 김세곤 칼럼니스트
  • 승인 2021.03.23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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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의 「화도연명술주시」는 다섯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6구, 8구, 8구, 6구, 2구로 이루어졌다. 시는 중국의 역사와 고사(故事)가 많고 우의(寓意) 또한 상당하여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첫째 단락 6구가 서사(序詞)라면 둘째 단락부터는 본사(本詞)에 해당한다. 우선 두 번째 단락 8구를 읽어보자.

당시에 사마씨는 남으로 건너갔으니 當時馬南渡

중원에는 무덤만 남았을 뿐이었네 神州餘丘墳

천심은 아직 떠나지 않았기에 天心尙未厭

마치 새벽이 두 번 온 듯했는데 有若日再晨

처중이 맨처음 난을 일으키었고 處仲首作孼   원주) 왕돈(王敦)이다.

이리 새끼는 길들일 수 없었으며 狼子非人馴  원주) 소준(蘇峻)이다.

악명을 남긴 어리석은 사나이는 蚩蚩遺臭夫

자식에게 그 몸을 죽게 하였네 斅兒戕厥身  원주) 환온(桓溫)의 부자(父子)이다.

그러면 김종직의 시를 한 구씩 자세히 음미해보자.

당시에 사마씨는 남으로 건너갔으니 當時馬南渡

중원에는 무덤만 남았을 뿐이었네. 神州餘丘墳

사마씨(司馬氏)는 위(魏) · 오 · 촉나라가 다투는 삼국(三國) 시대 위나라의 명장인 사마의(司馬懿 179~251 사마중달로 잘 알려짐)의 손자 사마염(司馬炎 236~290)이다.

서기 265년에 위나라 원제(元帝) 조환(曹奐 246∽303)은 성대한 의식을 베풀고 사마염에게 양위 조서를 발표하였다. 위나라는 조조가 화북을 통일하고 죽은 후 그의 아들 조비(曹丕)가 후한의 마지막 임금인 헌제(獻帝)의 자리를 빼앗아 220년에 세운 나라이다.

“고대의 성군 요·순의 교훈에 따라 임금의 자리를 어진 신하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은퇴하겠노라.”

양위식에서 사마염은 조비가 후한의 헌제로부터 임금의 자리를 물려받은 때와 마찬가지로 세 번 사양의 뜻을 표한 후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진(晋)이라 일컫고 수도를 낙양에 정하였다.

진나라는 280년에는 동오(東吳)를 멸망시키고 삼국(三國)을 통일했으나, 316년에 이르러 한(漢)의 유요(劉曜)의 침략을 받아 진은 멸망하였다.

이러자 317년에 황실의 후예인 낭야왕(琅琊王) 사마예(司馬睿, 276~323)가 건강(建康, 지금의 난징)에서 진(晉)왕조를 다시 세웠는데, 이를 '동진(東晉)'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사마염이 세운 진을 ‘서진(西晉)’이라고 부른다.

천심은 아직 떠나지 않았기에 天心尙未厭

마치 새벽이 두 번 온 듯했는데 有若日再晨

천심은 말할 것도 없이 한나라의 부흥을 두고 한 말이다. 한나라의 유요(劉曜)가 진을 멸망시킨 것은 정통(正統)이었다. 중국은 한나라 황실을 정통으로 여겼다.

처중이 맨 처음 난을 일으키었고 處仲首作孼

이리 새끼는 길들일 수 없었으며 狼子非人馴

시에 ‘처중은 왕돈(王敦)이다, 이리 새끼는 소준(蘇峻)’이라고 김종직은 원주(原註)를 달았다. 김종직은 왕돈과 소준을 내세워 반역의 대가가 어떠한 것인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처중은 왕돈(王敦)의 자인데, 그는 동진의 원제(元帝) 사마예를 도와 공을 세웠으나, 뒤에 공을 믿고 제멋대로 권력을 부리면서 마침내 난을 일으켰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병으로 죽었다.

소준(蘇峻)은 동진의 원제를 도와 공을 세우고 관군장군(冠軍將軍)이 되었는데, 3대인 성제(成帝) 때에 반역하여 관군(官軍)을 차례로 물리치고 임금을 석두성(石頭城)에 내쫓기까지 하였으나, 끝내 도간(陶侃) 등의 군대에게 패하여 죽었다.

악명을 남긴 어리석은 사나이는 蚩蚩遺臭夫

자식에게 그 몸을 죽게 하였네 斅兒戕厥身   원주) 환온(桓溫) 부자(父子)이다.

악명을 남긴 어리석은 사나이는 진(晉) 나라 환온(桓溫)이다. 그는 권세가 극에 달하자, 반역할 생각을 품고서 일찍이 말하기를 “사나이가 백세에 좋은 명성을 전하지 못할 바엔 또한 악명이라도 만 년에 남겨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환온은 은밀히 왕위 찬탈을 꾀하다가 끝내 이루지 못하고 병들어 죽었다. 그의 아들 환현(桓玄) 또한 막대한 권력으로 동진의 안제(安帝)에게 선위(禪位)를 받고 자칭 황제가 되었다. 404년에 유유(劉裕)는 곳곳의 호걸들과 연계해 환현을 토벌하는 군사를 일으켰다. 유유의 군대는 비록 2천 명에 불과했지만 용맹하여 복주산 싸움에서 환현의 군대를 대패시켰다.

그런데 환현을 토벌한 유유(劉裕 363~422, 재위 420∼422)는 420년 7월에 동진의 공제(恭帝)를 시해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송나라를 세웠다.

도연명(365∽427)은 동진(東晋 317~420) 말기부터 남조(南朝)의 송(宋 420~479)나라 초기에 걸쳐 살았는데, 그는 유유가 공제를 시해한 일에 대하여 분개하는 마음을 은밀하게 나타내는 술주(述酒)시를 지었다.

김종직 재실인 추원재 안내판(경남 밀양시) (사진=김세곤)
김종직 재실인 추원재 안내판(경남 밀양시) (사진=김세곤)
추원재 (사진=김세곤)
추원재 (사진=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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