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하 정숙자칼럼/차를 통한 중년 극복기] 어느 봄날의 초상(肖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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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하 정숙자칼럼/차를 통한 중년 극복기] 어느 봄날의 초상(肖像)
  • 정숙자 문학박사
  • 승인 2021.03.29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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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망이 현실이 되는 것은
누군가의 일방적인 헌신이나 희생이
필요하다.
적어도 이해가 절실하다
정숙자 문학박사
정숙자 문학박사

[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숙자 문학박사] 화창한 봄날에 벚꽃이 눈처럼 날리는 어느 날 우리 집 앞에 덩그러니 컨테이너 박스가 자리를 잡았다. 밭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그 공간은 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퇴임을 하신 먼 친척 아저씨가 흔히 남자들이 이야기하는 로망을 이루려고 오신 장소다. 물론 그 분의 아내는 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여기저기 밭이나 과수원에 컨테이너들이 부쩍 늘었다. 그곳도 아주머니 없이 아저씨들만 오셨다.

그들의 로망은 과연 무엇일까? 시골생활의 부지런함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자연의 품이 그리운 것인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아내분들은 한사코 시골생활을 거부하셨다고 한다. 아마 나도 그랬던 것 같다. 오고 싶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선택권조차 없었다. 나는 선택해서 오지 않은 그네들이 참 부럽다. 오고 나서야 왜 로망이라는 말을 붙여 자연에서의 생활을 거창하게 이야기했는지 알 수 있었다. 적응하느라 힘들었고 풀과 전쟁하느라 뼈 마디마디가 아프고, 손님에 치어서 나 혼자 차 한 잔 마실 여유도 없는 이 시골 생활이 그네들의 로망이라니.

아뿔싸!! 나는 그 로망 속에 나도 모르게 발들 들여놓았다. 꽃같이 아름답고 순수할 때 나비는 다른 꽃을 찾아 나섰고, 새로운 생활, 시집이라는 곳에서 헤매고 있을 때, 모두에게 적이 되어 온갖 욕을 먹을 때 로망을 지닌 그대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욕은 선을 넘어 친정 부모에게까지 치닫고 있을 때 과연 그대들은 울고 있는 아내들에게 무엇으로 위로해 주었나? 아이를 몇 번이나 등에서 내려놓고 업기를 반복할 때 그대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 여린 사람과 꽃 같은 사람은 이제 그대들이 없어도 스스로 안전을 확보할 수 있고 그 누구의 질타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웬만한 무서움이나 외로움을 이겨낼 만큼 단단한 정신을 가지게 되었고 혼자서도 산길을 걸을 수 있는 담대함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독립심 강하게 버려두었다가 나이 들어 친구 없어지고 힘이 빠지니 결국 로망이라는 이름으로 시골살이를 하자고 한다. 적어도 그대들이 로망이 시골이었다면 적어도 이 나이가 되기 전에 아내를 위해 무엇인가를 했어야 했다. 일방적인 말이 아닌 대화를 하고 비난 아닌 칭찬을 했어야 했고 외로움과 두려움을 안고 허덕일 때 적어도 옆에서 손을 잡아 주었더라면 이 나이에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라면을 끓이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벚꽃이 휘날리는 이 눈부신 봄날에 나는 화려함 뒤에 숨어 있는 봄을 보고 있다. 로망이 현실이 되는 것은 누군가의 일방적인 헌신이나 희생이 필요하다. 적어도 이해가 절실하다. 그 요건도 갖추지 못하고 억지로 만든 그대들의 로망의 해답은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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