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함 양무호 사기 사건 (2)

덕수궁 석조전
덕수궁 석조전

1903년 1월의 군함 양무호 구매는 국방비리, 국제 사기 사건이었다. 일본 미쓰이 물산이 구입한 25만 엔보다 두 배나 비싼 55만 엔(지금 시세로 약 440억원)에 샀는데, 이는 국가 예산의 10.2%, 군부 예산의 26.7%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그런데 너무나 어이없는 것은 해군 병사 1명도 없이 군함부터 샀다는  사실이다. 그 단서가 1903년 7월 29일의 ‘고종실록’에 나온다. 이날 군부대신 윤웅렬이 사직 상소를 냈다. 7월 17일에 임명된 지 12일 만이었다.    

"신이 사직을 청하는 마당에 군무(軍務)에 대해 함부로 논해서는 안 되지만, 새로 구비한 군함 양무호에 대해서 말씀드린다면 이미 구매한 것으로 다시 계약을 파기하기가 어려운 만큼 그냥 바다에 매어두는 것은 비용도 갈수록 많이 들고 배도 갈수록 파손될 것이니 매우 답답합니다. 이에 대해 대책을 서둘러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은 천하 각국이 서로 경쟁하고 있으므로 해군과 전함이 제압을 하고 방어를 하는 좋은 계책이라고 여기지 않는 나라가 없습니다. 그런데 당당한 우리 대한제국은 삼면이 바다인데도 한 명의 해군과 한 척의 군함도 없어 오랫동안 이웃 나라에게 빈축을 사고 있으니 무엇이 이보다 수치스러운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논의하는 자들은 모두 말하기를, ‘국가 재정에 여유 자금이 없으니 해군에 대해 갑자기 논의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스스로 한계를 짓는 견해입니다. (중략) 군함을 구매할 처음에 신이 비록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처음 있는 일이므로 널리 논의했어야 하는데, 의정부에서 충분히 논의하게 하지 않고 군부에서만 계약을 맺게 하여 이것이 잘못되어 의견이 분분히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신은 생각건대, 겨우 한 척의 군함을 구비하자 비용부터 걱정하니, 이 점이 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중략) 성상께서는 굽어살피셔서 신의 상소를 의정부에 속히 내리셔서 회의(會議)하고 품처(稟處)하게 해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이러자 고종은 비답하였다. 

“제수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찌 갑자기 사직하는가? 말미(末尾)에 진술한 것은 의정부로 하여금 충분히 의논하여 품처하게 하겠다.”

그런데 군부 대신은 너무 자주 바뀌었다. 1903년 1월 25일에 군함 도입 계약을 한 신기선은 1월 31일에 교체되었고, 심상훈이 군부대신 서리로 임명되었다. 5월 9일에 이근택이, 5월 13일에는 이봉의가 군부대신이 되었다. 6월 2일에 윤웅렬은 군부대신 서리를 하다가 7월 17일에 군부 대신에 임명되어 7월 29일에 사직 상소를 냈다. 이후 10월 22일에는 이근택이 군부대신 서리로, 11월 24일에는 민영철이, 1904년 1월 21일에 이용익(李容益)이 군부대신이 되었다가 1월 23일에 윤웅렬이 다시 군부대신이 되었다. 이용익은 2일간 하다가 그만 교체되었으니 이런 잦은 인사가 고종 황제의 인사 스타일이었다.      

한편 8월 7일에 의정부 참정 김규홍이 해군 설치는 타당하지 않고, 구입한 군함 문제는 군부에서 따로 논의하도록 아뢰었다. (고종실록 1903년 8월 7일)   

“신이 여러 신하들과 충분히 토의해 보니 모두들 이미 양성해 놓은 사졸(士卒)들이 없고 또 경비(經費)도 이처럼 구차한데 해군을 설치한다는 것은 매우 타당치 않다고들 말하였습니다. 
군함을 접수하는 일은 군물(軍物)과 관계되니 군부로 하여금 따로 방략을 세워 조치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러자 고종이 윤허하였다.    

이윽고 9월 12일에 군부 대신 윤웅렬이 아뢰었다. 

"지금 이미 군함이 있으니 보관 경비가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비용이 적지 않아 사실 방도가 없습니다. 전(前) 해방영, 통제영, 각 수영(水營)에서 관할하는 군사 둔전 토지의 영업세와 해세(海稅), 선세(船稅), 또 해면(海面)의 어선세(御膳稅)를 거두어들여 모두 해당 군함 경비로 삼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에 고종이 윤허하였다.   

해군 사졸 한 명 없이 군함부터 샀고, 군함 운영경비를 또 세금으로 충당하였으니 대한제국은 정말 한심하다. 이러고도 ‘근대화를 향한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부패하고 무능하다. 그런데 누가 군함 사는 것을 주도했을까? 군부대신 신기선인가? 아니면 고종인가? 
 
나중에 양무호는 1904년 2월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해군에게 접수되어 화물선으로 전용되었다. 이후 1907년에 군대해산 후 해양실습선으로 전락했다가 1909년 일본 하라다 상회에 4만2천 엔에 팔렸다. 55만엔에 사서 10분의 1도 못 받았으니 완전히 고철값이었다. 그리고 양무호는  1916년에 동중국해에서 침몰되어 최후를 맞았다.  

‘나라의 힘을 키운다.’고 고종황제가 이름 지은 ‘양무호’는 결국 해군 한 명 없이 무작정 구입한 군함이란 역사적 오명(汚名)을 남겼다.
   
< 참고문헌 > 

o 강준만 지음, 한국 근대사 산책 4, 인물과 사상사, 2007, p 12-14 
o 김용삼, 지금 천천히 고종을 읽는 이유, 백년동안, 2020, p 336-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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