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 : 나가모리 프로젝트    

홍릉 비각
홍릉 비각

 

1904년 2월 8일에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2월 23일에 한일의정서를 체결한 일본은 4월에는 전보사와 우체총사를 접수하고 군기 누설 예방 명목으로 전보 검열을 실시했다. 

5월 초순에 러일전쟁에서 승전하고 있는 일본은 고종을 압박하기 위해 궁궐 숙청을 단행했다. 내관들을 다수 파면하고 황제 알현은 대신과 협판에 한정시키는 등 고종을 근왕 세력들로부터 완전히 고립시키고자 했다.

또한 전라도·경상도·강원도 연해 어업권에 이어 전쟁 중인 일본군에 신선한 생선을 공급한다는 명목으로 평안도 · 황해도 · 충청도 3도 연해 어업권 등 각종 이권마저 요구했다.

그런데 6월에 일본인 나가모리 도키치로(長森藤吉郞)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가 알려져 큰 파문이 일었다. 1903년 12월에 일본 대장성 관리였던 나가모리가  대한제국에 와서 경제 · 금융 사정 등을 살피고 대한제국을 경영할 방법을 구상한 결과가 ‘황무지 개척권 요구’였다. 

나가모리는 1904년 3월 16일 「대한제국 내 토지의 개간 · 정리 및 소주, 연초, 백삼, 식염, 석유 등의 제조 · 수입 전매특허에 관한 계약서」를 작성하고 궁내부대신 민병석과 교섭을 진행했다. 그런데 6월부터는 일본 외무성 지시하에 주한 일본 공사관 측이 공식적으로 나서서 대한제국 정부와 교섭을 시작했다. 6월 6일에 일본 공사 하야시는 외부(外部)에 50년 동안 전국 황무지의 개척권을 위임하라고 요구했다. ‘황무지(荒蕪地) 개척권 요구’는 개간되지 않은 전국의 많은 땅을 황무지라 하여 50년간 일본인에게 무상 대여하라는 것이었다. 그런 후에 그 땅들을 자기들이 비용을 들여 경제가치가 있는 땅으로 바꾸어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일본이 겉으로는 우리를 돕기 위한 제안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리나라 땅의 절반 이상을 공짜로 삼키겠다는 야욕에 지나지 않았고, 일본은 황무지 개간권 획득을 통해 막부 말기부터 폭발적으로 늘어난 일본 내 과잉 인구를 한반도에 이주시키려는 속셈이었다. 

이와 같은 일본의 야욕에 국민들은 분노했다. 울분에 차 있던 국민들은 전 국토의 3할에 해당하는 황무지를 한 푼의 대가도 없이 강탈하려는 일본의 만행을 결코 묵과하지 않았다. 유생 및 전직·현직 대신들이 반대 상소를 연거푸 올렸고,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 등도 논설과 기사로 일제히 일본을 규탄하였다. 

또한 전 중추원 의관 송수만, 심상진은 보안회(保安會)를 조직하고 구국민중운동(救國民衆運動)을 더욱 확대, 발전시켜나갔다. 보안회는 종로에다 소청(疏廳)을 두고 공개 성토대회를 열어 결사반대를 외치면서 전국에 통문을 보냈다.  

이러자 대한제국 정부는 6월 29일 자로 그 계약을 인준할 수 없다고 일본 측에 통고했다.

당황한 일본은 보안회의 해산과 집회 금지를 정부에 강력히 요구했다. 이어서 일본 공사관은 일본 헌병이 서울의 경찰 임무를 맡겠다고 통고하였고, 7월 21일에는 송인섭·송수만·원세성 등 보안회 주요 간부들을 체포했다. 더구나 하야시 공사는 고종이 날마다 시위 경비로 2천 원씩을 보안회에 내려주어 은밀히 배일 집회를 교사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황무지 개간 사업 등 일본 측 요구에 대해 고종은 용단을 내리라고 압박했다.

이러자 언론에서는 연일 일본의 불법행위를 폭로, 규탄하였고, 보안회의 활동과 유생·대신들의 상소운동도 더욱 격렬해졌다. 정부도 7월 23일에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거절하는 긴급고시를 전국에 반포하였다. 결국 국민들과 대한제국 정부의 일치된 저항으로 일본은 8월 10일에 계획을 중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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