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고문 정치    

독립신문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소장)
독립신문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소장)

 

1904년 2월 23일에 외부대신 임시서리 이지용과 주한 일본 공사 하야시 곤노스께 간에 6개 조의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가 체결되었다. 

한일의정서 제1조에는 “한일 양국 사이의 항구적이고 변함없는 친교를 유지하고 동양(東洋)의 평화를 확고히 이룩하기 위하여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 정부를 확고히 믿고 시정(施政) 개선에 관한 충고를 받아들인다.”고 규정하였다. 

5월 말에 일본 각의는 ‘대한 방침(對韓方針)’과 ‘대한 시설강령’등을 잇따라 채택하였다. 여기에는 (1) 한국 내 일본군의 영향력 확대, (2) 재정권 장악, (3) 외교권 장악 (4) 철도 장악 (5) 우편 전신등 통신 시설의 일본 측 관린 (6) 일본인을 농업 ·임업 ·광업 · 어업 등에 진출 등 6개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몇 달 뒤인 8월 22일에 일본은 8월 22일에 <한일의정서> 제1조에 규정된 ‘시정개선’을 구실로 <한일 협정서(韓日協定書)>를 체결하였다. (고종실록 1904년 8월 22일 1번째 기사)  

이 조약은 “대한(大韓) 정부는 일본 정부가 추천한 일본인 1명을 재정 고문(顧問), 외국인 1명을 외교 고문으로 삼아야 하며 재정 · 외교에 관한 중요한 사무는 일체 그의 의견을 물어서 시행해야 한다. 또 대한 정부는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거나 기타 중요한 외교 안건 즉 외국인에 대한 특권 양여와 계약 등의 문제 처리에 대해서는 미리 일본 정부와 상의해야 한다.”고 규정 하였다.  

그 결과 대한제국은 재정 고문에 일본의 대장성 주세국장 메카다 다네타로, 외교 고문에 20여년 간 줄곧 일본에 고용되어 일해온 미국인 스티븐스를 임명했다. 고문(顧問) 정치의 시작이었다.     

이후에도 일본은 ‘시정개선’이란 명목하에 궁내부 고문 가토 마스오, 경무고문 마루야마 시게토시, 학부 참여관 시데하라 타이라, 법부 고문 노자와 다케노스키, 군부 고문 노츠 시즈다등 많은 일본인을 고문, 보좌관, 교관 등으로 한국 정부가 초빙하도록 강요했다. 

이들은 행정 각분야에 직접 종사하면서 실무 집행까지 관여했다는 점에서 1894년 갑오개혁 기의 고문관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한편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승장구하자, 일본은 5월 초에 고종에게 러시아와 관계 단절을 선언하는 칙선서(勅宣書)를 발표하라고 강요했다. 5월 18일에 고종은 어쩔 수 없이 러시아의 수도에 있는 공사관(公使館)을 철폐하고 공사 이범진을 소환하라고 명하였다. 이어서 이 날 외부대신이 칙선서 초안을 보고하니 고종이 윤허하였다. (고종실록 1904년 5월 18일 3번째 기사)   

“대한(大韓) 정부는 일본이 러시아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한 것이 오직 대한국의 독립을 유지하여 동양 전체의 평화를 확고히 하는 데 있다는 것을 헤아려 이미 의정서를 체결하고 협력함으로써 일본이 교전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편리하게 하였다. 이번에 또 러시아주재 공사관을 철회하였으니 이것으로 실상 대한국과 러시아 간의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다. 그러나 또 앞으로 우리 대한국의 방향을 명백하게 하고 러시아가 이전과 같이 조약과 특준(特準) 합동 등 조건을 핑계하여 침략적 행위를 다시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외부 대신이 칙선서(勅宣書) 초안을 의정부 회의에 제출하여 토의를 거친 뒤에 의정부 참정(參政)과 연명으로 상주(上奏)하니, 고종이 그것을 윤허하였다.”

대한국 정부는 5월 18일 밤 관보 호외를 통해 황제의 칙선서를 반포하였다. 

〈칙선서(勅宣書)〉

1. 이전에 한국과 러시아 두 나라 사이에 체결된 조약과 협정은 일체 폐기하고 전혀 시행하지 말 것이다.

1. 러시아의 관리와 백성들에게나 회사(會社)에 인준한 특허 합동(特許合同) 가운데 지금까지도 유효 기간이 있는 것은 이제부터 대한 정부가 무방하다고 인정하는 것이면 이전대로 그 인준해 준 것을 계속 누릴 수 있게 한다. 그러나 두만강, 압록강, 울릉도의 산림 채벌 및 식수(植樹) 특허권은 본래 한 개인에게 허락한 것인데, 실상은 러시아 정부가 자체로 경영할 뿐 아니라 당해 특준(特準) 규정을 지키지 않고 제멋대로 침략 점거 행위를 하였으니, 당해 특준을 폐지하고 전연 시행하지 말 것이다.

9월에 들어서자 일본은 본격적으로 대한제국의 해외 공관 철수를 추진하였다. 당시 대한제국의 해외 공관 현황을 보면, 러시아 공관은 이미 철폐 상태였고 일본 · 영국 · 미국 주재 공사는 귀국한 뒤 일본 측 개입으로 후임자가 파견되지 않고 있었으며, 프랑스, 독일, 청국 등 3국에만 공사가 주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제는 12월에 ‘외교관 및 영사관 폐지에 관한 건’을 공포하고 본격적으로 해외 공관 철수 작업을 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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