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 참정(총리) 신기선의 상소

창덕궁 인정전
창덕궁 인정전

1904년 7월 15일에 안종덕은 고종 정권이 ‘청렴, 근면하지 않고 공정하지도 않으며 신뢰도 잃었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로부터 한 달이 지난 8월 22일에 고문정치가 시작되었다. 고종은 재정 고문에 일본인 메카다, 외교 고문에 미국인 스티븐스를 임명했다. 이로써 일본은 대한제국의 재정권과 외교권을 침식하기에 이르렀다. 

8월 28일에 철도원(鐵道院) 총재 신기선이 의정부 참정(參政 총리)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5일 후인 9월 2일에 신기선이 사직 상소를 올렸다.
"(전략) 현재 온몸과 터럭들까지 다 병들어 단 한 점의 살점도 성한 것이 없이 만신창이가 된 것처럼 온갖 법이 문란해지고 모든 정사가 그르쳐졌습니다. 하나하나 두루 진찰해 보면 변사를 갈아대며 말해도 그 증세를 다 말해 낼 수 없으며 그 어떤 약도 효력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증세에 대한 처방을 가장 근원적인 데서 찾으면 두 가지 문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는 첫째 대궐을 엄숙하고 맑게 하는 것이고, 둘째 뇌물을 없애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온 나라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으로서 신기하고 심원한 논의가 아니며 본래 평소의 확실한 이치여서 시행하기 쉬운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무엇을 꺼려 시행하지 않겠습니까? 

첫째, 대궐을 엄숙하고 맑게 하는 것입니다. 임금은 만백성의 위에 있습니다. 깊은 대궐에서는 상하의 엄격한 구분이 있고 친척들이 뵙는 것도 정해진 시간이 있으며 궁인(宮人)들과 내시(內侍)들의 시중에도 제한이 있고 만나는 사람은 오직 공경이나 어진 사대부들 뿐인 것입니다. 

(중략) 그런데 지금은 하찮고 간사한 무리들이 폐하의 곁에서 가까이 지내는가 하면 점쟁이나 허튼 술법을 하는 무리들이 대궐 안에 가득합니다. 

대신은 폐하를 뵈올 길이 없고 하찮은 관리만 늘 폐하를 뵙게 됩니다. 정사를 보는 자리는 체모나 엄할 뿐 서리나 하인들이 직접 폐하의 분부를 듣습니다. 시골의 무뢰배들이 대궐의 섬돌에 꼬리를 물고 드나들며 항간의 무당 할미 따위들이 대궐에 마구 들어갑니다. 관리도 가까이 하지 못하던 폐하의 앞을 난잡하게 마구 질러다닙니다. 

이로 인하여 벼슬을 함부로 주고 이를 통해 청탁이 공공연히 벌어집니다. 굿판이 대궐에서 함부로 벌어지고 장수하기를 빌러 명산(名山)으로 가는 무리들이 길을 덮었습니다. 

논의가 분분하여 홍릉(洪陵)을 천봉(遷奉)하는 일은 끝낼 날이 막연하고 이것저것 꺼리는 것이 풍속이 되어 법정에서 해를 넘기도록 사건을 묵혀둡니다. 대궐 안의 말이 순식간에 전파되고 기밀에 속하는 문제가 외국인에게 곧바로 전달됩니다. 

폐하께서 생각해보건대, 우리 왕조 500년 동안에 이런 가법(家法)이 있은 적이 있었습니까?

근원이 되는 곳이 이처럼 문란하기 때문에 자질구레한 일들에까지 폐하께서 나서게 되어 여러 신하들이 게을러지고, 공적인 도리가 시행되지 못해서 모든 정사가 다 그르쳐져서 나라가 나라 구실을 못하게 되고 외국인의 충고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폐하께서는 그래도 깨닫지 못합니까?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선뜻 마음을 돌려 신속히 조상들의 옛 가법대로 소인(小人)들을 멀리하고 어진 사대부들을 가까이하며 경찰들에게 엄히 신칙(申飭)하여 필요 없이 대궐에 들어가는 것을 단속하여서 대궐을 엄숙하고 맑게 만들어야 합니다. 
폐하가 정복(正服) 차림을 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날마다 재상과 대신을 만나 정사의 도리를 강론한다면 정사가 어찌 깨끗해지지 않고 법이 어찌 서지 않으며 대궐의 문란이 어디에서 생기겠습니까?”

이어서 그는 뇌물을 없애라고 간언한다. 

“둘째, 뇌물을 없애는 것입니다. 대체로 벼슬자리를 만들어 놓고 직무를 맡기는 것은 장차 하늘이 준 직책에 나가 하늘이 낸 백성을 잘 다스리는 것입니다. 오직 어질고 재능 있는 사람만을 선발하여 등용하고 조금도 사적인 마음을 개입시키지 말아야 하는데, 하물며 뇌물로 벼슬을 주는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폐하의 명철함으로는 절대로 재물을 귀중히 여기고 어진 것을 천하게 여기면서 불법적으로 벼슬을 팔아먹을 리가 없건만, 수십 년 이래로 뇌물 주고받는 것이 풍습이 되고 관청 문이 저자처럼 된 것은 틀림없이 간사한 무리들이 연줄을 타고 청탁을 하여 사욕을 채우고 진상(進上)을 구실로 규례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상하가 서로 이익을 다투는 것을 마치 일상적인 일처럼 보며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뇌물이 아니면 벼슬을 얻을 수 없고, 뇌물이 아니면 송사(訟事)에서 이기지 못하는 것으로 알며, 관찰사나 수령 자리에는 모두 높은 값이 매겨져 있고 의관(議官)이나 주사(主事) 자리도 또한 값이 정해져 있어서 심지어는 뇌물을 바치고 어사(御使)가 되어 각도(各道)를 시찰하기도 합니다.” (고종실록 1904년 9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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